당찬 도전? 무모한 모험?

2010.06.01 17:48 입력 2010.06.02 05:39 수정
김진호 선임기자

13세 미국 소년 에베레스트 최연소 등정

‘하늘의 이마(사가르마타·산스크리트어)’로 불리는 에베레스트(해발 8848m)의 신비가 갈수록 퇴색하고 있다. 지난해에만 400여명이 정상을 밟고 내려왔다. 정상 부근에 등산장비를 비롯한 수t의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한 지도 오래다. 지난달 22일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13세 소년 조던 로메로가 정상을 가장 어린나이에 밟았다. 네팔 셰르파족의 밍 키파가 15세이던 2003년 세계를 발 아래로 내려다본 지 7년 만에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로메로가 정상에 도전한 날 인도 델리의 16세 소년 아르준 바지파이 역시 등정에 성공했다고 하니 ‘하늘의 이마’가 10대들의 놀이터가 된 인상마저 준다.

[세계의 창]당찬 도전? 무모한 모험?

인류가 세계의 지붕에 처음 오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1953년 뉴질랜드 출신 에드문드 힐러리가 첫 등정에 성공하기까지 30년의 도전과 좌절을 겪어야 했다. 1924년 영국의 조지 맬러리와 앤드루 어빈이 첫 정상 등정에 도전했지만 돌아오지 못했다. 영국 BBC방송의 다큐물 제작팀이 해발 8160m 지점에서 추락사한 맬러리의 시신을 발견한 건 그로부터 75년 뒤의 일이다.

그토록 인간의 한계를 농락했던 에베레스트가 쉽게 정상을 내주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20세기에 비해 정상 등정에 필요한 기술이 크게 발전한 건 사실이다. 시간 단위로 산중 날씨를 거의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상정보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힐러리의 등정 이후 인류의 체력이 월등히 향상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더더욱 히말라야의 변화무쌍한 날씨는 여전히 과학의 얄팍한 예측능력을 무위로 만들기 일쑤다. 그럼에도 10대들의 잇단 도전이 성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메로의 등반 과정과 이후 엇갈리는 반응은 이러한 궁금증을 풀 단서를 제공한다.

로메로 가족이 지난달 22일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등정 기념으로 찍은 사진. 왼쪽이 아버지, 오른쪽이 새엄마다. 로메로 가족 제공 | AP연합뉴스

로메로 가족이 지난달 22일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등정 기념으로 찍은 사진. 왼쪽이 아버지, 오른쪽이 새엄마다. 로메로 가족 제공 | AP연합뉴스

로메로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세계 7개 대륙의 최고봉을 정복하겠다는 원대한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에베레스트는 6번째 목표였을 뿐이며, 올해 말 마지막으로 남은 남극대륙의 최고봉 빈슨 마시프에 도전한다. 로메로가 세계적인 등반가의 꿈을 갖게 된 계기는 아주 일상적이다. 9세 때 초등학교 복도에 전시된 세계 7대 봉우리의 사진을 본 게 직접적인 계기였다. 로메로는 집에 돌아와 부모에게 “7대 봉우리를 오르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아이의 꿈에 부모의 의지가 가세했다. 등산을 비롯한 야외활동 애호가인 아빠는 곧바로 로메로를 산 사나이로 조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로메로가 1년 가까이 만만치 않은 등산훈련 끝에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를 오른 건 10세 때다. 로메로는 코시우스코(호주 최고봉·해발 2228m)를 제외한 5개 대륙 최고봉 등정 당시에도 모두 최연소 기록을 수립해왔다.

로메로가 이번 에베레스트 등정에 아빠와 새엄마, 3명의 셰르파와 동행했듯 그동안의 산행 역시 혼자만의 모험은 아니었다. 산악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럼에도 에베레스트는 13세 소년이 도전할 대상이 아니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알파인 어센트 인터내셔널의 창설자인 등산가 토드 벌슨은 미국의 소리(VOA) 방송 인터뷰에서 “누군가 죽기 전까지는 잘못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잘라말했다. 부모들이 후원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사실상 아이를 몰아갔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이번 산행은 무리하게 강행된 측면이 적지 않다. 로메로의 블로그(www.jordan romero.com/weblog)에는 폴라텍과 버프 등 군소 스포츠용품 업체들이 후원사로 등록됐지만, 준비 비용이 충분치 않았다. 3명의 현지 셰르파만을 고용했을 뿐 전문적인 산악단체의 도움은 받지 못했다. 코스 역시 등반연령을 16세로 제한하는 네팔을 우회, 더 위험하지만 연령제한을 두지 않는 중국 측 코스를 택했다.

블로그와 위성전화, 트위터 등 첨단 통신수단들은 로메로의 등산을 캘리포니아의 고향사람뿐 아니라 전 세계에 중계했다. 위성위치확인장치(GPS) 덕분에 히말라야에서 로메로의 움직임이 분 단위로 전해지기도 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13세 소년이 해발 8000m 이상의 고도에 무사히 도착했더라도 위험은 남는다.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한다고 해도 고도가 주는 기본적인 피해에서는 자유롭지 않다는 말이다. 우선 뇌와 폐에 물이 고임에 따라 뇌졸중 또는 발작 위험이 있다. 해발 0m에서 뇌에 공급되는 산소량이 100%라면, 에베레스트 높이에서는 65~70%에 그친다. 이 상태로 등산을 강행하기에 13세가 적당한 나이냐는 과학적 의문들이 생긴다. 아직 고산지대 등산이 어린아이의 뇌에 미치는 피해에 대해서는 의학적으로 규명된 게 없는 상태다. 로메로가 10세 이후 정복한 5개 대륙 최고봉들은 모두 해발 7000m 이하였다.

댈러스뉴스의 편집장 재럿 러시 역시 “로메로가 에베레스트 등정에 필요한 전문기술을 모두 습득했다고 해도 자칫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변수들이 너무 많았다”면서 “과연 13세에 목숨을 걸 만한 일이었는가”라고 반문했다. 다행히 이번 산행을 끝까지 함께한 로메로의 아버지는 응급구호요원으로 고산지대에서 예상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사전 대처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무책임할 일은 전혀 없다”면서 아들의 무리한 등반에 대해 제기되는 비판에 그가 동의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로메로의 쾌거가 몰고올 부작용 역시 적지 않은 우려를 자아낸다. 로메로는 네팔 수도 카트만두로 복귀한 지 하루 만인 지난달 27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의 신체는 에베레스트의 고도에 매우 잘 적응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에베레스트는 어려운 산이고, 너무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면서 “나보다 어린 나이에 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에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로메로의 성공은 자칫 목숨을 걸어야 하는 에베레스트 등정이 다른 아이들의 도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실제로 로메로의 고향인 캘리포니아주 빅베어의 주민 캐서린 블랑은 현지언론 인터뷰에서 “로메로는 아이들에게 비디오게임을 접고 밖으로 나가 큰 목표를 세우라는 영감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소아과 전문의인 로빈 실버맨은 로메로가 갈수록 모험심을 잃어버리는 아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실버맨 박사는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로메로와 같은 신체적 능력과 부모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면서 “로메로의 성공이 다른 아이들에게 에베레스트나 다른 봉우리를 등산할 허가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로메로 스스로 그러한 경쟁의식에서 탄생한 ‘괴물’이기도 하다. 7개 대륙 최고봉 등정은 애시당초 창의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미국 유타주의 17세 고교생 자니 콜린슨이 지난 1월 역시 최연소의 나이에 7개 대륙 최고봉 등반에 성공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콜린슨이 16세에 에베레스트에 올랐다는 것뿐이다.

로메로는 현재 네팔 카트만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장딴지가 좀 쓰라리고 심하게 햇볕에 그을렸다. 좀 심하긴 하지만 별것 아니다”라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에베레스트 등정 최연소 기록을 2년이나 경신한 그에게는 상업적인 대박의 기회가 활짝 열렸다. 로메로는 가까운 시일 내 홍콩과 런던, 뉴욕을 거쳐 귀향할 예정이다. 동네 영웅에서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된 덕이다. 로메로는 잠재적인 비즈니스 협상의 계기가 될 약속들이 많이 잡혀 있다고 자랑했다. 레포츠 업계의 광고를 대행하는 페일 모닝 미디어의 드류 시몬스 사장은 “로메로는 상품성이 매우 높다”면서 매력적이고 인기 있는 10대로서 그의 모험을 현금화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고 전했다. “최소한 레포츠 업계만 놓고 보더라도 많은 어린이들의 활발한 야외활동을 부추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이들의 모험심과 부모의 극성, 여기에 마케팅 정신이 인터넷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현상이 에베레스트 주변만 서성거리는 건 아니다. 국내에는 덜 알려졌지만 바다에서도 10대들의 경쟁은 치열하다. 지난달 16일 호주의 16세 여학생 제시카 왓슨이 ‘항해의 에베레스트’라고 불리는 단독 요트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한 번도 정박하지 않는 논스톱 항해로 이 역시 최연소 기록이다. 왓슨은 이미 자신의 항해 경험을 담은 <진정한 정신(True Spirit)>이라는 책을 최근 출간, 많은 소녀들의 모험심을 자극하고 있다. 로메로와 마찬가지로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항해 경로와 사진 등의 자료를 올려놓고 있기도 하다.

로메로의 블로그에 게재된 3쪽짜리 ‘보도자료’에는 13세 아이의 발상이라고 해석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이 눈에 띈다. 그는 산을 오르는 이유를 “여행을 사랑하고 지구상의 사람들 및 나와 같은 아이들에 대해 배우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시에 자신의 등반을 통해 존 웨인 암재단에 대한 세상의 관심을 촉구하고,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부인 미셸이 어린이 비만 퇴치를 위해 벌이는 ‘움직이자(Let’s Move)’ 프로그램에 동참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동안 각종 학교와 클럽, 비즈니스 업계 등에 초대받거나 TV, 라디오, 잡지, 신문 인터뷰 등을 통해 등반경험을 나눴다고 소개한다. 7개 대륙 최고봉 정복 뒤에는 미국 50개주 최고봉을 오를 계획이다. 영하 23~24도에 시간당 최대풍속 79㎞, 강설량 15㎜. 로메로의 블로그가 생중계한 지난달 31일 오전 현재 에베레스트의 기상정보다. 당신이라면 그곳에 아이를 올려놓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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