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의 마술에 걸린 한국정치

2011.01.19 19:40
이대근 논설위원

오세훈으로부터 망국적 포퓰리즘이라는 공격을 받는 바로 그 시점에 민주당이 과감하게 무상복지 시리즈를 내놓았다. 한나라당이 포퓰리즘의 불을 댕기자 아예 기름을 확 부어버린 것이다. 좋아, 정면 대결해보자! 이런 결기가 느껴진다. 이건 정말 민주당답지 않다. 가끔 역주행, 자주 우왕좌왕의 3년을 보낸 그 민주당, 우물쭈물하다 때를 놓치기 전문인 그 민주당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그동안 민주당은,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흐리는 이명박 정권의 친서민 중도 실용과 진보정당 사이에 끼여 갈피를 못잡았다. 그랬던 민주당이 무상 폭탄을 던지며 단번에 복지담론을 추종하는 아류에서 의제를 선점하고 담론을 주도하는 위치로 올라섰다. 그 덕에 늘 비판의 대상이었던 민주당은 순식간에 지원해야 할 대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한나라당을 복지의 밧줄로 얽어맸다. 한나라당에는 결코 유리할 수 없는 복지 대 반복지, 무상복지 대 포퓰리즘, 무한 복지 대 찔끔 복지의 구도를 만든 것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나라당은 망국·거짓말·세금폭탄의 요란한 소리를 내지만 그것은 ‘민주당=복지’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부작용’을 일으키며 민주당의 귀만 즐겁게 해 줄 뿐이다.

[이대근칼럼]복지의 마술에 걸린 한국정치

그래도 승산이 있을지 모르지만 한나라당은 복지논쟁에 뛰어들어 판을 키우기보다는 복지 대 선진화의 구도로 몰아갔어야 했다. 그런데 급한 불 먼저 꺼야 한다는 조급증 때문에 남의 의제를 흠잡는 데 정신을 쏟고 말았다. 그 결과 복지를 시대의 과제로 각인시키고 자기의 의제인 선진화, 친서민은 스스로 땅에 묻어 버렸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곰이 꿀을 보고 지나칠 수는 없는 법. 민주당의 무상 시리즈가 그냥 봐도 허술한데 공격의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허술함은 민주당이 준비한 미끼였을까? 곰은 좀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그러나 꿀에는 독이 묻어 있다. 한나라당은 전 가구의 70% 복지를 약속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무상보육을 공약했다. 박근혜는 나름의 복지국가를 구상 중이다. 복지 확대가 포퓰리즘이라면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토건에 돈 퍼붓는 재정운용, 부자 감세로는 그 공약을 실현할 수 없다. 세금, 더 걷어야 한다. 세금폭탄·포퓰리즘은 한나라당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니 일관성과 원칙을 지키자면 양자택일해야 한다. 반복지냐 포퓰리즘이냐? 물론 반복지면 꿈나무 박근혜에게 타격을 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은 지금 무상보육이나 다름없다며 무상복지론에 편승하고 싶어한다. 복지를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양다리 걸치겠다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민주당이 잘한 일은 여기서 끝난다. 민주당은 세금폭탄론의 벽을 넘지 못했다. 증세를 피한 것이다. 복지의 필요성, 당위성을 확산시키고 공유하는 것이 먼저라는 주장은 타당하다. 증세부터 꺼내면 증세 찬반론이 복지 찬반론을 대체, 국면을 뒤집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증세 없는 복지는 힘을 잃을 것이다. 더 내고 많이 받기를 설득해야 한다. 복지 구상의 내용도 부실하다. 단지 비전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능력과 의지 박약의 반영일 수도 있다. 노동자·서민 등 복지세력의 조직화와 연대, 이들을 대표하는 다수파로서의 복지정당도 필요하다. 민주당만으로는 안 된다. 그런데 복지국가를 위한 정교한 사회, 경제, 정치적 프로그램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반짝 인기를 노린 깜짝쇼, 혹은 복지를 목표로 한 게 아니라 반MB 진영 내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수단으로 일시 활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준다. 진심이라 해도 너무 일찍 터뜨린 것은 아닌지, 복지국가 만들기는 마라톤 경기와 같은 것인데 초반 질주하다 곧 지쳐 떨어지는 건 아닌지, 과연 뒷심이 있는지 불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갑작스러운 변신이 또 다른 배신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되돌아올지언정 일단 민주당이 반MB를 넘어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반대의 독점권을 가진 제1야당이 앞장섰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결과가 뻔한 길이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다. 우리의 의지·능력·노력에 따라 성공과 실패의 다양한 경로가 펼쳐지게 될 그런 길이다. 그래서 미래를 모른다는 것은 이제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희망의 증거이다. 그것도 이제 시작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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