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청소노동자 그리고 요즘 대학 풍경

2011.01.05 21:01 입력 2011.01.11 11:45 수정
이대근 논설위원

[이대근칼럼]홍대, 청소노동자 그리고 요즘 대학 풍경

학교 직원으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은 학부모라면 적잖이 놀랄 것이다. “선생님 아들이 요즘 학교에서 뭘 하고 다니는지 아십니까?” ‘혹시 우리 아들이 술 먹고 사고 쳤나, 남의 물건을 훔쳤나, 아니면 마약?’ 그런데 교직원이 전해준 아들의 비행이란 것이 이렇다면 어떨까. “학교 청소원들이 노조를 만들었는데 아들이 이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런 일 계속하면 아들이 학교를 못 다닐 수 있습니다.” 지난달 초 홍익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노조를 싫어한다 해도 이런 전화는 불편할 것이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반사회적 행위를 한 것도 아니다. 성인이 된, 다 큰 아들이 자기 신념에 따라 한 활동이다. 부모가 나무랄 나이도 아니고 그럴 성질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홍대는 부모에게 겁주고 아들을 학생처로 불러 청소노조 지지 대자보를 왜 붙였느냐, 선동 말라며 공안검사처럼 문초하고 징계하겠다고 협박했다.

홍대 청소노동자들은 법정 최저임금 이하에 하루 11시간씩 중노동을 하면서도 천대를 받아왔다고 한다. 이들은 그런 비인간적 대우를 개선하고자 학생의 도움을 받아 노조를 결성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특별하지 않다. 최저임금 보장, 폭언 금지, 식비 지급, 식사 공간, 휴가.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최소한의 것들이다. 그러나 홍대는 용역업체 변경을 통해 한 해가 끝나는 마지막 날 해고했고, 이들은 지난 3일 새해 첫 출근일에 총장실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학교는 경찰 투입을 요청했다. 동국대도 같은 날 같은 이유, 같은 방법으로 청소노동자를 해고했다가 재고용으로 바꾸었다.

‘보편적 가치’ 외면하는 대학들

이런 문제에 관한 한 홍대를 동국대, 혹은 다른 대학과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여성·노인·비정규직·하청 노동자라는 4중의 굴레를 쓴 이 사회의 가장 약한 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학의 차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홍대는 특정 대학의 이름일 필요가 없다. 대학이 기성체제의 일부가 되고자 욕망하는 한 때로는 악덕 자본, 때로는 낡은 질서를 지키는 권력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대학에 진리를 향한 목마름이나 지성의 향연이 있을 수 없다. “지상에서 대학보다 아름다운 곳은 없다”던 영국의 계관시인 존 메이스필드의 말이 아득하다.

그러나 대학은 아직도 스스로를 이기심 혹은 이윤 동기와 같은 속된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와는 다른, 고귀한 영혼이 숨쉬는 인간적 공동체로 알려지는 것을 좋아한다. 여전히 대학을 기성사회에 속하지 않는 제도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의 권위라도 유지하려면 그런 위선은 필요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대학에 대해 미련을 다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도 그런 위선에 기여한다. 사람들은 아무리 대학의 이념이 변질되었다 해도 대학은 공장이나 직업훈련소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대학이 젊은이를 교양 있는 시민, 건강한 민주적 시민으로 교육하는 기관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기대는 포기하기 어렵다. 대학을 소유한 어느 재벌 총수는 대학생이 부기를 배워야 한다고 했지만, 대학의 본질은 그런 단편 지식과 기능 습득에 있지 않다.

대학은 노동의 존엄성을 가르쳐야 한다. 노조의 중요성을 일러줘야 한다. 표현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을 존중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그들과 연대하도록 해야 한다.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를 심어줘야 한다. 학생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청소노동자의 처지를 돕는 일은 이 모든 가르침에 부합하는 일이다. 그러나 홍대로 상징되는 현실의 대학에 갇힌 학생들은 노동을 천시하고 사회적 약자를 짓밟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당한 노조활동을 방해하고 남의 고통을 외면하도록 학습하고 있다.

‘교육 이념’ 다시 되돌아보길

대학이 아직도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것은 재벌이 기증한 번지르르한 신축 건물이나 스타벅스가 있는 안락한 교정 때문이 아니라, 진리·정의·연대·공감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심없이 기성체제를 수용하기보다 뒤집어 보고 부정하는 경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부정을 통해 긍정하도록 대학이 도와주어야 한다. 그것이 대학의 본분이다. 그러나 홍대는 약자 돕는 일을 “학생의 본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했고 부모에게 전화 걸어 가정교육에 책임을 돌렸다. 혹시 또 그런 전화를 받는 학부모가 있다면 당황하지 말고 그 대학의 교육 이념을 낭독해 달라고 요구해 보기 바란다. 요즘 대학에는 바로 서야 할 것들이 물구나무서 있다.

<이대근 논설위원 grt@kyunghyang.com>

[전진한의 삐딱선] 청소의 기억, 그리고 홍대 청소 노동자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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