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해일 피해’ 미야기현 서울사무소 아베 다카오 소장

2011.03.21 20:04 입력 2011.03.22 11:02 수정
손동우 기획에디터

“한국인 진심어린 위로에 감동… 이젠 두 나라 ‘진짜 이웃’ 돼야죠”

이웃은 때로는 피를 나눈 사촌보다 더욱 진한 정을 느낄 수 있기에 ‘이웃사촌’이란 말도 생겼을 터이다. 그러나 바로 서로의 곁에서 아옹다옹할 수밖에 없는 이웃은 경계와 질시의 대상이기도 하다. ‘근공원교(近攻遠交)’라는 국제정치학의 철칙 아닌 철칙이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특히 인접하는 두 국가 사이의 역학관계가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 강자에 대한 약자의 경계심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과 해일, 원전파괴 등 상상을 초월하는 대재앙은 표면적인 ‘우호선린’과 심층적인 ‘경계긴장’이 교차하는 한·일관계의 전통적 패러다임을 적어도 정서적으로는 바꿔놓고 있다. 고통과 비탄에 빠진 이웃에게 진심어린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웃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의 지진해일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 바로 미야기(宮城)현이다. 일본 3경(景)의 하나인 마쓰시마(松島)를 비롯해 수많은 명승절경을 갖고 있는 관광지이자, 전통산업과 첨단산업이 고루 발달된 미야기현은 한·일양국의 경제·산업·문화·관광 교류를 위해 서울사무소를 두고 있다. 그곳은 경향신문이 위치한 중구 정동에 있었다. 경향신문과 미야기현은 한·일 이웃관계에다 ‘동네 이웃’이 중첩된 ‘2중 이웃’인 셈이다. 아직도 꽃샘 추위가 가시지 않은 정동길을 걸어서 미야기현 서울사무소를 찾았다. 이곳의 책임자인 아베 다카오(阿部貴夫·47) 소장은 참사가 발생한 지 1주일이 지났는데도 표정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인터뷰의 통역과 보충설명을 위해 서울사무소의 김도형 대리가 자리를 함께 했다.

미야기현 서울사무소 아베 다카오 소장이 중구 정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일본 도호쿠 대지진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그는 “이번에 한국 사람들이 보여준 따뜻한 이웃사랑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미야기현 서울사무소 아베 다카오 소장이 중구 정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일본 도호쿠 대지진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그는 “이번에 한국 사람들이 보여준 따뜻한 이웃사랑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지진해일 참사 발생 직후인 11일 오후 아베는 일본의 미야기 현청 동료와 업무상의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동료는 ‘건물이 몹시 흔들린다. 나중에 통화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웬만한 지진이야 미야기 지역에서 “늘 있는 일”인데다 일본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과 마찬가지로 현청 건물은 내진설계가 돼 있어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2005년과 2008년에도 미야기현에서 규모 7.2의 강진이 발생한 바 있어 ‘아무리 심해도 그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갖가지 소식은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거나 경험했던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들이었다. 아베는 “50년 전에도 5.5m의 쓰나미가 몰아닥친 적이 있다지만 이번의 경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며 “20m 높이의 쓰나미와 원전사고 등은 미야기현을 떠나 일본을 통틀어서도 처음 겪은 국난(國難)”이라고 말했다.

아베가 이번 참사에서 더욱 마음을 졸였던 것은 부모님과 동생 부부, 두 살배기 조카 등이 모두 한동안 실종됐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미야기현에서도 가장 지진피해가 심했던 구리하라(栗原) 시내에 살고 있는데 무려 5일 동안 연락이 끊어졌다가 인터뷰가 시작되기 10분 전에야 모두 무사하다는 사실이 극적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부모님은 승용차 안에서 닷새를 버텼고, 구리하라 시청 보건복지부서 공무원인 동생은 퇴근도 하지 않은 채 구호작업에 참여하면서 휴대폰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통화를 하지 않을 때는 전원을 끄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70대 후반의 부모님은 차안에 비치된 물과 비상식량으로 끼니를 대신하면서 차량 히터로 추위를 견뎠다. 아베는 “부모님과 동생 부부가 무사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면서도 “그러나 센다이에 있는 현청 동료들이나 동료 가족, 고향 구리하라의 친구들이 죽거나 실종된 사례가 너무나 많아 조금도 기쁘지 않다”고 말했다. 동료와 친구들의 생사를 언급하면서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눈가에는 물기가 번졌다.

[손동우가 만난 사람]‘지진해일 피해’ 미야기현 서울사무소 아베 다카오 소장

지진해일 발생 이후 사무소는 빗발치는 문의전화와 미야기의 상황을 점검하려는 사무소 직원들의 숨가쁜 움직임으로 그야말로 전시사령부의 작전상황실을 연상케 했다. 미야기에 홀어머니가 살고 있는 어느 일본 기업인은 “지금 당장이라도 어머니를 보살피러 가야 하는데 항공편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고, 센다이로 시집간 어느 한국 여성의 부모는 “딸과 사위는 어떻게 됐느냐”로 울면서 전화했다고 한다. 또 서울사무소의 주선으로 센다이에 출장을 떠난 한국기업인들의 가족·친지들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문의를 하기도 했다. 아베는 “이런 일은 1992년 미야기현 서울사무소가 생긴 이래 처음”이라고 말했다.

해일이 몰려들기 불과 1시간 전인 11일 오후 1시30분쯤 센다이에 도착한 어느 한국 수산업체 사장의 사례도 극적이다. 그는 서울사무소의 주선으로 현지로 떠났는데 거래처인 일본 수산물업체가 해안가에 있어 쓰나미 소식을 접한 서울의 부인이 곧바로 사무소로 전화를 걸어왔다. 3시쯤 사무소에 다시 전화가 울렸다. 부인은 다급한 목소리로 “조금전 남편이 ‘산으로 도망간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온 뒤부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이후 아베와 서울사무소 직원들은 센다이 현청과 센다이 한국영사관은 물론 구글, SNS 등 모든 수단을 통해 한국인 사장의 소식을 확인하려 했지만, 현지에서도 인명 구출작업이 급선무인지라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부인은 거의 몇 분 간격으로 울면서 전화를 걸었고, 그때마다 사무소 측은 “죄송하지만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시라”는 답변밖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4일 만에 일본 거래처 관계자를 통해 한국인 사장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접했고, 사무소 측은 단숨에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낭보를 전했다. 부인이 울면서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아베는 “매 시간 매 분 단위로 참사 소식만 들려오는 와중에 이런 소식도 전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됐다”고 말했다. 원래 이달 27일 부모님의 결혼 50주년을 맞아 부인, 아들과 함께 일시 귀국할 예정이었다는 그는 “비행기 티켓까지 예약해 뒀는데 지금 상황이라면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일찍이 없었던 대참사를 당한 일본을 돕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간바레 니폰(힘내라 일본)’ 운동이 펼쳐지고 있지만 일본과는 미묘한 관계에 있는 한국이 민간·정부 할 것 없이 진심어린 위로와 지원을 보내고 있는 것에 대해 아베는 크나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그는 “2년 동안의 서울 근무로 알게 된 한국인 친구들과 지인들이 전화와 메일로 안부를 묻고, 성금과 성품을 보내오는 데 감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미야기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성금을 보냈다’는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이에 사무소 직원들이 ‘제발 성함이라도 알려 달라’고 부탁했는데도 ‘돕는 게 중요하지 이름 석 자를 내세우는 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정중히 거절했다는 것이다. 아베는 “이번 일로 일본은 한국말로 ‘은혜를 많이 입었다’”고 말했다. ‘지속적이고 견고한 한·일 양국의 우호선린 관계를 위해 무엇이 중요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그는 “과거사 문제 등은 어차피 양국 정부 차원에서 풀어나가야 한다”면서 “민간 레벨에서도 ‘두 나라는 가까운 사이이며, 더욱 가까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어린 세대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쳐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국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다섯살 난 아들을 통해서도 그는 한국인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있다. 아들이 걱정할까봐 아베 부부는 대참사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치원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일본에 있는 가족들은 별 일 없느냐’고 안부를 묻고, 손을 잡아주거나 껴안아 주는 등 애정과 관심을 표시하는 바람에 아들이 자연스레 알게 됐다는 것이다. 아베는 “한국친구들도 많이 생겼고, 어디에 부딪히면 일본어보다는 ‘아이쿠, 아파’라고 한국어로 말하는 아들이 ‘유치원 선생님과 친구들이 너무 좋다’고 말할 때마다 가슴이 찡하다”고 말했다.

아베가 태어나고 자란 미야기현 구리하라는 그의 선조 때부터 300년을 넘게 살아온 곳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와 목재일을 해왔으며, 그의 아버지도 아직까지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구리하라뿐만 아니라 현 대부분이 농산물과 수산물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경관이 곳곳에 펼쳐져 있는 미야기는 일본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는 “어렸을 적 뛰놀았던 산과 들, 딸기밭, 학교 운동장 등이 물에 잠기고, 눈에 익은 정겨운 곳들이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변한 광경을 TV를 통해 보면서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쏟아진 게 한 두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고교시절 아베는 특별활동으로 탁구반 활동을 했는데 탁구반 학생들은 체력단련을 위해 수업이 끝난 뒤 학교 밖으로 나와 구보를 했다. 그런데 가끔씩 힘에 부칠 때 그는 대열에서 이탈해서 터널을 포함한 철길을 샛길로 이용했는데 그때마다 터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배들에게 들켜서 혼이 나곤 했다. 아베는 “그때 탁구반 선후배들과 함께 달렸던 길, 몰래 빠져나와 걸었던 철길과 터널도 지금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파괴됐을 거라고 생각하니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지금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고향의 아름다운 길에는 소년 아베 다카오의 추억이 서려 있는 ‘로맨스 코스’도 있다. 고교시절 그는 ‘준수한 외모’를 앞세워 구리하라 시내의 여고생들과 데이트를 즐기곤 했다. ‘당신이 주도한 연애 건수는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아베는 “닥상 아리마스(だくさん あります·많이 있다)”라고 대답했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줄 수 없느냐’고 채근하자 그는 “아내가 한국어를 잘 해서 자칫 입을 놀리다가 걸리면 혼난다”며 교묘하게 빠져 나갔다.

어렸을 적 그의 꿈은 소방공무원이 되는 것이었다. 몸이 약했던 할머니가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소방서 구급대원들이 출동해 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것을 여러번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소방대원의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위난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주는 모습이 참으로 멋있게 보였다”고 말했다.

고교를 졸업한 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구리하라시 소방공무원 시험에 응시했으나 100 대 1의 경쟁률을 뚫지 못한 채 낙방하고 말았다. 곧이어 미야기현 공무원 시험에서는 합격했다. 고향 구리하라에서 소방공무원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현청 소재지인 센다이에서 현의 일반공무원이 되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 아베는 “동생이 구리하라시청 공무원으로 일하는 한편으로 아버지의 농사일도 도와드리면서 고향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도호쿠학습원대학에 진학한 그는 경제학 전공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아베가 미야기현 서울사무소장으로 부임하게 된 것은 오랫동안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적이 고향 구리하라에 있어 어렸을 때부터 한국이 낯설지 않은데다, 미야기 현청 소재지인 센다이시가 광주광역시와 자매결연을 맺었기 때문이다.(별도기사 참조) 또 센다이를 비롯한 미야기 현에는 재일동포들의 숫자도 많아 평소에도 이들과의 교류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사무소장으로 근무하기로 결심한 그는 지원의사를 밝히기 1~2년 전부터 한국의 정치·경제·문화·역사 등에 대해 그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아베는 “서울사무소장은 인기가 많아 경쟁이 치열했다”고 말했다.

2009년 4월 제8대 서울사무소장으로 취임한 그는 지금까지 업무상 호텔업·석탄무역업 관계자와 LED기술자 등 많은 한국인들을 알게 됐고, 업무를 떠나서도 적잖은 한국인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었다. 이제는 한국생활에 꽤 익숙해졌는데도 아직도 적응하기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한국사람들과 술자리를 갖는 일”이다. 2년 동안 부지런히 마셔서 소주 1.5병의 주량을 갖게 됐다는 아베에게 ‘내년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책임지고 주량을 소주 5병으로 만들어드리겠다’고 큰소리를 치자 그는 파안대소하면서 “1주일 만에 처음으로 많이 웃었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에게 ‘나로서는 밥벌이를 위한 것이지만 이 보잘것 없는 기사가 당신과 당신의 고향사람들, 나아가 일본인들을 위한 작은 위로와 격려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의례적인 ‘립 서비스’가 아니라 내 나름의 진정성을 담은 것이었다. 그 순간 아베는 갑자기 눈물을 쏟으며 내 손을 잡았고, 나 역시 코끝이 시큰했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는 어느덧 가슴과 가슴이 통하는 진짜 ‘동네이웃’이 되었다. 우리 ‘정동사람들’은 정도 많고, 눈물도 많다. 미야기현 지진해일 성금 계좌 △예금주:사)미야기현 서울사무소 △계좌번호:국민은행 411401-01-225230 △문의 02-725-3978.

◇안중근 의사 기념비 세우고 활발한 경협 ‘한국의 이웃동네’

‘대지진 참사’ 미야기현

[손동우가 만난 사람]‘지진해일 피해’ 미야기현 서울사무소 아베 다카오 소장

도호쿠 대지진 참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미야기현은 한국과 여러모로 인연이 깊은 지역이다.

우선 역사적으로 백제왕의 후예인 경복(敬福)이 금을 발견한 곳이 바로 미야기현이다. 미야기현 서울사무소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예부터 미야기현 사람들은 ‘황금의 나라 일본’을 멀리 유럽에까지 알린 ‘한국 도래인’에 대해 존경심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종군한 일본군 장수 다테 마사무네는 조선에서 가져온 매화나무인 ‘가류바이(臥龍梅)’를 미야기현에 심었다.

미야기현은 안중근 의사와도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하얼빈 감옥에 수감돼 있던 안 의사의 기개와 인격을 흠모했던 일본인 간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는 안 의사에게서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는 휘호를 얻었다. 뒷날 일본에 돌아간 지바는 고향인 미야기현 구리하라에 기념비(사진)를 세웠다. 또한 안 의사의 위패는 다이린지(大林寺)라는 사찰에 봉안되고, 안 의사 기념관도 건립됐다. 아베는 “어려서부터 안 의사에 대해 워낙 잘 알고 있었던 것이 한국근무를 지원하게 된 계기의 하나가 됐다”면서 “어떻게 보면 고향 선배인 지바가 후배인 나를 한국으로 데리고 왔던 셈”이라고 말했다.

경제적으로도 미야기현은 한국과 밀접하다. 농업·수산업뿐만 아니라 반도체 산업도 발달된 미야기현은 한국의 관련업체들과 수많은 거래·제휴·협력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를 지원하기 위한 서울사무소는 미야기현 최초의 해외사무소이기도 하다.

센다이 공항의 수입화물부문 제1위 국가도 당연히 한국이다. 아베는 “식품가공 등의 전통기술과 첨단산업이 골고루 발달된 미야기현과 한국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공존상생할 요소가 많다”고 말했다.

미야기현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명승지가 운집해 있는 만큼 한국인 관광객들의 발길도 잦다. 260개의 작은 섬들이 바다 위에 떠있는 마쓰시마 해안은 일본 3경의 하나로서 마치 한국의 다도해를 한곳에 모아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현내의 수많은 유명 온천과 수려한 경관의 골프장, 설질(雪質)이 뛰어난 스키장 등도 한국인들의 발길을 붙잡아 왔다.

비옥한 토양에서 수획되는 농산물과 청정해역에서 거둬들인 해산물이 모두 풍요로운 미야기현은 맛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곳이 주산지인 ‘히토메보레’는 일본의 최고급 쌀로 인정받고 있으며, 사사가마보코와 선어 등을 재료로 하는 생선요리도 빼놓을 수 없다.

아베는 “고향 미야기현이 하루 빨리 옛 모습을 되찾아 한국인 친구·친지들이 관광을 즐기고 맛있는 특산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베 다카오 약력

△ 1964년 미야기 현 구리하라 출생
△ 구리하라에서초·중·고 졸업
△ 도호쿠학원대학 경제학과 졸업
△ 미야기현청 인사과·기획과 등 근무
△ 2009년 4월 미야기현 서울사무소 제8대 소장 취임
△ 부인과 1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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