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일본인들, 개인은 죄가 없다고 하지만 집단의 ‘책임’은 인정해야

2011.04.01 21:03 입력 2011.04.01 21:06 수정

일본어를 ‘모어’로 배운 서경식 교수의 두번째 평론집

‘식민주의 피해자’ 증언 외면한 日 진보지식인들 비판

[책과 삶]일본인들, 개인은 죄가 없다고 하지만 집단의 ‘책임’은 인정해야

▲ 언어의 감옥에서…서경식 | 돌베개

“구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에서 태어난 나는 원래는 모어여야 할 언어(조선어)를 이미 박탈당하고 과거 종주국의 언어를 모어로 해서 자라났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일본어로 생각하며 모든 것을 일본어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벽’에 갇힌 수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재일 조선인인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 교수(60·사진)가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수상할 당시 소감문이다. 수상 이유를 ‘뛰어난 일본어 표현’이라고 들었을 때 그는 ‘골수까지 일본어가, 일본적 정서가 침투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고 적고 있다.

[책과 삶]일본인들, 개인은 죄가 없다고 하지만 집단의 ‘책임’은 인정해야

<디아스포라 기행>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등으로 잘 알려진 저자는 국내에서 출간되는 두번째 평론집 <언어의 감옥에서>를 통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마저 일본어를 통해 형성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과 함께 여전히 극복되지 않고 있는 ‘식민주의’에 대해 얘기한다. 책은 저자가 2006년부터 2년간 한국에 머물던 기간에 쓴 시론과 시평을 중심으로 전후 10년간의 글을 엮었다.

서 교수는 한국 국적을 가진 재일 조선인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모어로 익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익히는 언어인 ‘모어’(일본어)와 국적에 따라 정해지는 ‘모국어’(조선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모어 속에 자신의 민족을 억압한 침략국의 ‘제국주의적 시선’이 반영돼 있을 수도 있다는 참담함을 느끼지만 이를 벗어나기란 어려웠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저자가 진정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은 제국주의·식민주의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한 역사의 반성이다. 그러나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나와 실상을 증언했던 프레모 레비가 결국 자살했듯, 사람들은 이에 둔감하다. “피해자가 피해자임에도 증언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기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증거가 없다든지 허풍 떤다고 한다든지 설득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 중심은 아직도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이다. 특히 저자가 상당 부분을 할애해 비판하는 것은 일본 내 우익이 아니라 그동안 호의적으로 평가돼 온 리버럴 지식인들이다. 일본인으로서 식민지 지배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일본 내 리버럴 지식인들은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반론한다. 국가에 소속된 국민이라는 것만으로 개개인에게 과거의 책임까지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개인의 ‘죄’와 집단의 ‘책임’은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해 “죄는 개인에 귀속되는 것이지만 집단의 책임은 오직 망명자이거나 국가가 없는 사람들만이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 또한 한국인 개개인이 ‘죄’를 짓지 않았지만 ‘책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일본의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는 한·일 역사 청산의 좋은 기회가 일본 패전 당시와 한일조약 체결,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때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89년 히로히토 일왕 죽음을 계기로 또 한번의 호기가 있었지만 “아사히신문조차 일왕의 책임을 변명했던 일본의 태도”로 인해 무산됐다고 지적한다. 최근에도 일본 동북부 대지진에 대한 한국인들의 도움이 답지하면서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올랐지만 역사왜곡 교과서 검정 통과로 찬물을 끼얹었다.

이쯤되면 “그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묵살하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에 다시금 귀기울여 보게 된다.

이러한 비판은 일본에만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5·18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게 됐지만 사건의 총책임자인 전두환은 아직도 건재하며 지지자도 적지 않다”는 것과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은 과거의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등에 업고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5·16쿠데타가 혁명으로, 광복절이 건국절로, 군사독재가 산업화로 바뀌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저자가 프레모 레비를 통해 “인간은 증언에 귀를 기울여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 교훈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일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권혁태 옮김.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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