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과 김여진

2011.07.01 20:10 입력 2011.07.01 21:46 수정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오랫동안 망각의 강 너머로 유배당했던 김진숙이라는 이름 석 자가 우리에게 돌아왔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발해서 6개월이 넘게 타워크레인에서 농성을 벌이던 그를 보이지 않던 존재에서 보이는 존재로 만들어낸 주인공은 언론도 정치인도 아닌 트위터였다. 그의 소식은 트위터를 타고 르몽드에 실리기도 했다. ‘희망버스’라는 새로운 연대 방식을 조직한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었다. 2007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소금꽃나무>가 한정판으로 재출간되어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이 현상들을 자세히 뜯어보면 흥미로운 진실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먼저 김진숙이라는 존재가 소셜네트워크라는 공론의 장에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김여진이라는 소셜테이너의 공헌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판 에이드 셀러브리티라고 할 수 있는 소셜테이너의 역할은 정치적 대립구도로 인해 교착상태에 빠진 특정 사안을 중립적인 차원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이택광의 왜?]김진숙과 김여진

대체로 정치적 대립구도라는 것은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논리에 따라서 특정 사안을 인식하는 태도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진영논리는 진보와 보수에서 일정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2008년 촛불 이후에 이런 진영논리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기존의 진영들에 속하지 않는 ‘대중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권자로 분류했을 때 부동층, 사회경제적으로 정의했을 때 중간계급으로, 문화적으로 정의했을 때 인터넷 주체로 규정할 수 있는 이들이다.

이 상황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과거에 정치에 속할 수 없었던 것들이 정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진숙이라는 상징적 존재의 부상도 이렇게 기존 진영들에 포섭당하지 않는 세력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 세력이야말로 한국적인 맥락에서 ‘시민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데, 이들이야말로 평등과 자유라는 모순적인 정언명령을 내면화한 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김진숙을 ‘노동자’가 아니라 근대적인 개념에 근거해서 ‘인간’으로 호명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적인 의미에서 인도주의가 마침내 탄생하는 순간인 것이다. 이 근대적 인간은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서구 계몽주의가 그토록 양성하고자 했던 주체적인 시민이다. 이 시민은 평등한 공동체를 유지하고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함께 일어선 국가’에 거주하는 이들이다. 이런 유래로 인해 시민은 당연히 국가에 대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근대적 시민의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분명 노동운동 일반에 대한 과거의 인식과 다른 무엇을 보여준다. 노동자를 시민으로 인준해주는 공동체의 합의를 전제하지 않고 이런 변화를 설명하기 곤란하다. 한동안 혼란은 있겠지만, ‘노동자도 사람이다’라는 당위적 주장은 앞으로 ‘노동자는 시민이다’라는 사실적 주장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동안 자칭 보수우파들이 억압해왔던 근대주의의 윤리가 소셜네트워크라는 기술적 민주주의를 통해 제도화되기 시작하는 징조를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앞으로 확실한 것 하나는 이 흐름이 기존에 익숙한 진보-보수의 분법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새로운 대립구도가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한국 사회에 진짜 보수의 가치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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