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쿠르베 ‘상처 입은 남자’

2011.10.19 19:46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총 맞은 것처럼!

눈은 마음에 창이지요? 화가 나면 열이 눈으로 올라오고, 불안하면 눈빛이 흔들립니다. 사랑에 빠지면 눈빛이 부드러워지고, 안정적인 사람은 눈빛이 맑습니다. 총 맞은 것처럼, 아니, 저 그림의 남자처럼 칼 맞은 것처럼 가슴이 아프면 어떤 눈빛일까요?

쿠르베의 ‘상처 입은 남자’는 쿠르베의 자화상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감고 있기는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저 남자의 눈매, 매력적이지요? 묘합니다. 저 눈매는 상처 때문에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의 눈매가 아닙니다. 저 남자, 상처를 오히려 소중한 연인인 양 느끼고 있나 봅니다. 의연하게 상처를 품고 있는 남자의 고통스러운 평화가 단박에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적인 작품이 바로 저 작품, 쿠르베의 ‘상처 입은 남자’입니다.

쿠르베의 자화상을 볼 때면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그는 겸손했던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아니,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알고 그 사실을 즐기기까지 했던 오만한 남자였던 것 같습니다. 잘난 남자가 그렇게 행동하면 웃으며 봐줘야지 별 수 없지요? 우직하기보다는 대담하지만, 섬세하기도 해서 자존심을 굽히고는 살아갈 수 없는 남자, 그런 남자가 통과해야 할 터널은 고독입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상처 입은 남자’(1844~1854), 캔버스에 유채 81.5×97.5㎝, 오르세 미술관, 파리.

귀스타브 쿠르베 ‘상처 입은 남자’(1844~1854), 캔버스에 유채 81.5×97.5㎝, 오르세 미술관, 파리.

쿠르베는 법적으론 평생 독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남자로서, 화가로서, 시민으로서 자신감이 있었던 당당한 남자였으니 어찌 여자가 없었겠습니까? 빌지니 비네일과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음에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구속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꺼이 자유롭고자 어떠한 사랑의 구속도 용납하지 않았으니 또 얼마나 고독해야 했겠습니까? 사랑한다고 해서,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해서 자유를 포기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고독은 운명입니다.

쿠르베는 평생 저 그림을 곁에 두고 아꼈다고 합니다. 고독이 운명인 사람답지요? 외부에서 기습적으로 덮치는 것이라 생각되는 운명이란 것도 어쩌면 ‘나’의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거, 아닐까요? 자신이 좋아서 혹은 편해서 취한 바로 그 성격과 태도가 불러들이는 친구 같습니다, 운명은.

그나저나 총 맞은 것처럼 심장이 너무 아파보셨습니까? 돈 때문에 아픈 거라면 머리가 아플 거고, 명예 때문이라면 머리가 복잡하겠지요? 쿠르베는 19세기 중반 소용돌이치는 프랑스 역사를 온몸으로 겪은 시민이기도 했습니다. 귀족의 역사가 아니라 민초의 역사를 쓰고 싶어했던 그는 권위에 아첨하는 하인의 눈이 아니라 민초의 눈으로, 본 것만을 그리겠다고 선언한 사실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체제 때문에 아픈 거라면 화가 올라오겠지요?

저렇게 아픈 건 심장처럼 소중한 것을 상실했을 때입니다. 보십시오, 저 남자! 손동작으로 봐서 분명히 심장 근처에 상처가 깊습니다. 그런데도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것도 아니고,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것도 아니고, 기막히다고 화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독이 운명인 사람답게 큰 나무에 기대 누워 편안히 눈을 감고 조용히 아픈 곳을 느끼고 있습니다.

칼 맞은 것처럼 가슴이 아픈 자리, 그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는 사람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없습니다. 저런 표정은 죽을 것처럼 아픈 그 자리에서 자기도 몰랐던, 그러나 자기가 만들어왔던 자기 삶의 운명을 충분히 만나고 느끼고 용서하고 위로하고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의 표정입니다. 산산조각 난 꿈, 그 마지막 자락에서 저렇게 차분히 아픔을 음미하고 사색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화입니다. 거기가 그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부활의 자리일 테니.

한 순간 내가 해체되는 것 같은 때가 있었습니다. 소중한 것이 떠나가고 지키고 싶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을 때, 그리하여 지킬 힘도 없이 무력해지기만 할 때! 구멍 난 가슴에서 올라오는 무서운 쓰라림에 지쳐 한 시기를 보낸 후에 단박에 사랑하게 된 그림이 바로 저 그림이었습니다. 저 남자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내 아프고 시린 곳도 부끄럽지 않고 소중해집니다. 저 남자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느끼는 것이지 벗어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상처를 떨쳐버리려 애만 쓰다보면 동일한 상처가 반복됩니다. 상처 속에서 배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처의 고통 속에는 진실이 있고 진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상처를 느끼며 상처와 대화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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