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 가면 쓴 ‘강제철거’, 용산의 아픔은 이어진다

2019.01.19 06:00 입력 2019.01.19 06:38 수정

2010년 12월 용산참사가 벌어진 남일당 건물이 철거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0년 12월 용산참사가 벌어진 남일당 건물이 철거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영정 한 장 남기지 못한 죽음이 있었다. 2018년 12월4일, 재건축으로 살던 집에서 쫓겨나 빈집과 거리를 전전하던 30대 세입자가 한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5만원. 10평 남짓한 집에 그가 살았다.

 그가 살던 동네엔 지난해 7월부터 4개월간 24차례의 강제집행이 있었다. 철거용역들이 소화기를 난사하며 세입자를 끌어내던 날, 서둘러 집을 빠져나온 그와 그의 어머니는 사진 한 장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광고지 뒷면에 쓴 유서와 함께 남긴 지갑 속 주민등록증 사진이, 마포구 아현동 주민 박준경씨의 영정이 됐다.

 20일은 경찰의 강제진압 과정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숨진 용산참사가 발생한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그사이 정부가 두 번 바뀌었고, 뉴타운식 대규모 재개발 대신 ‘도시 재생’으로 개발 패러다임을 전환하겠다는 선언이 나왔다. 더 이상 폭력적인 강제집행은 없다는 약속, 집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 되도록 하겠다는 정책 결정권자들의 선언도 잇따랐다.

 이는 견고한 부동산 성공신화를 바탕으로 평범한 이들의 ‘욕망의 정치’를 자극했던 뉴타운·재개발 광풍이, 필연적으로 용산참사를 낳았다는 반성에서 출발한 듯했다.

 그러나 “살기 위해 망루 위에 올랐지만 죽어서 내려왔다”는 용산 철거민의 말처럼, 해마다 개발지역에서 비슷한 죽음이 반복된다. 박준경씨가 살던 아현동이 그랬듯, 개발이 추진되는 도시 곳곳에서 여전히 폭력적인 강제집행이 이어진다. ‘주민 참여’ ‘마을 만들기’를 강조하는 도시재생의 시대에도, 여전히 수십년간 한 지역에서 살았던 원주민들은 개발에 반대하는 순간 ‘주민’에서 ‘철거민’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며 출발한 도시재생 사업지엔 투기꾼과 기획부동산이 몰려들며 원주민과 세입자가 밀려나는 일이 반복되지만, 이런 젠트리피케이션은 ‘뜨는 동네’의 필연적 부작용쯤으로 치부될 뿐이다. 이들에게 ‘용산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곳은 이제 부자들의 천국으로 바뀌겠지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았는지 기억도 못할 정도로 화려한 곳이 되겠지요.” 용산참사 유족 권명숙씨는 참사 발생 355일 만에 불탄 남일당 앞에서 열린 노제에서 ‘부자들의 천국’으로 변할 ‘가난한 사람의 지옥’을 이야기했다.

 남일당 망루가 있던 곳, 용산4구역은 참사 이후 7년여간 공터와 주차장으로 방치되다 2016년 말부터 ‘센트럴파크’라는 이름이 붙은 43층 규모의 주상복합건물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곳에서 마지막까지 망루에 남아 감옥살이를 했던 천주석씨는 폐허만 남은 철거촌으로 돌아갔다. 출소 후 고깃집을 연 김성천씨는 치솟는 임대료로 건물주와 갈등을 빚고 있다. 용산참사 10년. 용산 이전에도 떠돌았고, 여전히 떠돌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아직 끝나지 않은 용산’의 이야기를 들었다.

 망루를 덮쳐오는 물대포와 경찰 사이렌 소리가 멎었다. 화염을 피해 건물을 이리저리 헤치던 사람들 모습이 사라졌다. 그 정적과 소멸 직전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죽었다. 2009년 1월20일, 용산참사 이후 10년이 지났다. 망루를 지키던 9명은 징역형을 살았다. 짧게는 10개월, 길게는 4년여를 감옥에서 보냈다. 이들은 이제 서로 다른 장소에서 제 삶을 살아간다.

 서울 동작구 상도4동 주거 철거민으로 참사 당시 망루에 올랐던 천주석씨(56)는 아들과 함께 매일 새벽 건물 공사 일을 나간다. 망루 화재 이전 체포된 당시 정금마을 철거대책위원장 김성천씨(62)는 방배동에서 정육식당을 운영한다. 용산 재개발지구에서 금은방을 하다 점거농성에 참여한 김재호씨(63)는 건물 야간 경비원으로 일한다.

 평범한 일상이 찾아온 것일까? 이들에게 재개발과 탐욕이 빚어낸 ‘용산참사’는 진행 중이다.

서울 동작구 상도4동 주거 철거민으로 참사 당시 망루에 올랐던 천주석씨. 그는 4년간의 감옥 생활 후  재개발이 진행중인 마을에 다시 돌아왔다. 과거 1000여 가구가 살았던 이곳엔 이제 두 가구 밖에 남지 않았다. 김영민 기자

서울 동작구 상도4동 주거 철거민으로 참사 당시 망루에 올랐던 천주석씨. 그는 4년간의 감옥 생활 후 재개발이 진행중인 마을에 다시 돌아왔다. 과거 1000여 가구가 살았던 이곳엔 이제 두 가구 밖에 남지 않았다. 김영민 기자

서울 동작구 상도4동 주거 철거민으로 참사 당시 망루에 올랐던 천주석씨. 그는 4년간의 감옥 생활 후  재개발이 진행중인 마을에 다시 돌아왔다. 과거 1000여 가구가 살았던 이곳엔 이제 두 가구 밖에 남지 않았다. 김영민 기자

서울 동작구 상도4동 주거 철거민으로 참사 당시 망루에 올랐던 천주석씨. 그는 4년간의 감옥 생활 후 재개발이 진행중인 마을에 다시 돌아왔다. 과거 1000여 가구가 살았던 이곳엔 이제 두 가구 밖에 남지 않았다. 김영민 기자

 1994년, 천씨는 결혼하며 이곳으로 이사 왔다. 장모가 살던 집 방 한 칸을 빌려 들어왔다. 두 아이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다. 근처 학교에서 초·중·고를 마쳤다. 그는 “동네 전체가 우리 애들 놀이터였다”고 말했다. 넉넉지 않지만 다른 곳에 방 한 칸 못 구할 정도는 아니다. 추억, 억울함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 “징역 살 때 이 골목 냄새가 생각이 났어요. 비가 오면 나는 골목 특유의 냄새…. 마을을 떠났지만 못 잊고 오시는 분들이 많아요.” 참사 당시 망루를 지키던 그는 징역 4년을 선고받은 뒤 대구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2013년 1월 특별사면돼 나왔다. 만기 출소를 앞둔 때였다.

 상도4동은 2007년 주택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됐다. 이전 주민들은 양녕대군 후손들로 구성된 재단법인 ‘지덕사’ 소유 땅에 사용료를 내고 건물을 짓고 살았다. 시작은 무허가였지만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매매, 전세 거래가 이뤄졌다. 지덕사에서 땅을 사들인 건설사는 이전 매매 계약을 무시하고 무조건 “나가라”고 했다. 검은 복면을 쓴 용역들이 들이닥쳤다. “한손엔 쇠파이프를 들고 마을을 돌아다녔어요. 바닥에 쇠파이프 긁는 소리가 들리면 아이들도, 어르신들도 다 겁을 먹었어요.” 그는 “억울했다. 최소한의 보상도 없이 나가라는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경찰도, 공무원도 우리 편이 아니라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전국철거민연합회에 연락이 닿았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대책위를 꾸렸다. 서울 각지에서 강제 철거가 이뤄진다는 걸 알았다. 그가 용산으로 연대 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데 4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지는 짐작도 못했다.

■여전히 쫓겨나는 그들

 2007년 8월,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은 용산국제업무지구 특별계획구역 개발 방안을 확정 발표했다. 이후 강제 철거가 시작됐다. 용산지역 철거민들은 이주 대책과 보상을 요구하며 2009년 1월 남일당 옥상에 망루를 짓고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김재호씨는 1월19일 망루에 올랐다. 딸에게 “한 달이면 올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아이 곁으로 돌아가기까지 1345일이 걸렸다. 징역 4년을 선고받고 2012년 10월 가석방돼 나왔다. 그사이 딸은 우울증을 앓았다.

 “딸이 초등학생일 때 벌어진 일입니다. 처음 철거당하고 용역을 피해 도망간 집에서 아이가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쥐가 방 안을 왔다 갔다 했거든요. 딸이 지금도 ‘밖에서 유리창이 덜렁덜렁하면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엄마 들어올 때까지 너무 더운데도 이불 뒤집어쓰고 있었어’라고 얘기합니다.”

 감옥에서 딸에게 편지를 썼다. 길게 쓴 편지를 잘 읽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경향신문 연재만화 ‘장도리’처럼 그림을 그려 보내면 아이가 읽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때부터 만화를 더해 보냈다. 편지와 그림을 엮어 2013년 1월 책 <꽃피는 용산, 딸에게 보낸 편지>를 냈다. 1345일간의 수감생활 동안 딸에게 보낸 편지는 400여통에 달했다.

 출소 후 3~4년을 집에서 쉬었다. 용산역 근처 백화점 경비 일자리를 잡았다. 오후 4시부터 밤 12시까지 경비로 일한다. 일터는 망루가 불탔던 남일당과 걸어서 10분여 거리에 있다.

서울 용산 재개발지구에서 금은방을 하다 점거농성에 참여한 김재호씨. 그는 4년간 수감생활하면서 딸에게 보낸 ‘그림편지’를 책으로 엮어냈다. 우철훈 선임기자

서울 용산 재개발지구에서 금은방을 하다 점거농성에 참여한 김재호씨. 그는 4년간 수감생활하면서 딸에게 보낸 ‘그림편지’를 책으로 엮어냈다. 우철훈 선임기자

 김성천씨는 동작구 정금마을 철거대책위원장이었다. 경북 문경 출신인 그는 마흔이 다 돼 서울에 올라왔다. 여의도에서 장사를 하다 두 번 쫓겨났다. 두 번째로 쫓겨난 건물은 입주 당시 권리금 1억2000만원을 냈던 곳이다. 김씨는 “그때는 순진했다. 서울 집주인은 참 쌀쌀맞구나, 건물주가 나가라고 하면 권리금도 뭣도 없이 그냥 나가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당시 많지 않은 재산이지만 거의 날렸다”고 말했다.

 정금마을에서 세 번째 터를 잡았다. 정육점을 운영했다. 2007년 개발바람이 불었다. 주변 상가에 퇴거 도장을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는 ‘이거 뭐야, 여기서 또 나가야 되나’라고 생각했다. 여의도에서 겪은 일이 떠오르며 화가 났다. 철거민들과 연대했고 용산까지 갔다.

 10개월을 감옥에서 지냈다. 출소 후 1년을 방황했다. 편견이 무서웠다. “용산 철거민들은 떼 부리는 거지들이라는 인식이 싫었죠.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서 장사하고 중산층이라 생각하고 살았어요. 억울해서 망루에 간 것인데, 나중에 용산 경찰서에서 근무했던 친구가 ‘너도 거기 있었냐’며 놀라더라고요.”

 출소 1년 뒤 다시 정육식당을 차렸다. 건물주와의 싸움은 2015년부터 시작됐다. 그는 ‘맘 편히 장사하고 싶은 상인들의 모임’ 등 시민단체와 연대해 싸웠다. 지난해 당시 월세의 약 30%를 올리는 조건으로 합의를 봤다. 그는 “여기가 마지막이고 싶다. 이제 나이도 들고 더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장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용산은 끝나지 않았다”

 유치원 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던 천씨가 골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에서 아내가 용역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맞고 배를 발로 걷어차였어요.” 그가 이어 말했다. “무서웠어요. 그래서 연대했습니다. 아현동에서 죽은 세입자도 말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많이 외로웠을 것 같아요. 그 사람 고통을 이해합니다.”

 참사 10주기를 맞은 기분은 어떨까. 천씨는 “사람들이 죽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우리 살을 우리가 찢는 느낌”이라며 “그래도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도 정신이 번쩍번쩍 든다. 진상규명을 두고도 할 일이 많다”고 했다.

 김재호씨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 말한다. “길바닥에 나앉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는 재심을 청구하려고 한다. 그는 “살인죄 누명은 벗고 싶다. 그때 이후 삶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참 많다”고 했다. 망루 농성자들은 참사 원인을 제공한 ‘공동정범’ 신세다. 당시 검찰은 명확한 증거가 없는데도 화재 원인을 이들이 던진 화염병 때문으로 단정했다.

 김성천씨는 “2009년엔 정부 재개발, 재건축으로 사람들이 쫓겨났고, 지금은 건물주 횡포에 쫓겨 다닌다. 용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맘때가 되면 동지들이 생각난다.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이들을 우리끼리라도 보듬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들은 20일 참사 10주기를 맞아 사망자들이 묻힌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을 찾을 예정이다.

‘경찰 무죄, 철거민 유죄.’ 용산참사 유가족들과 농성에 참여한 철거민들은 아직도 참사 원인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지난해 경찰과 검찰에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져 경찰 과잉 진압에 대한 비판적 결론이 나왔지만, 특별한 조치를 내놓지는 않았다.

 지난 15일 국회를 찾은 용산참사 유가족과 144개 시민단체는 정부에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화재 원인이다. 검찰은 화재 발생 원인을 ‘농성자의 화염병 투척’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철거민들의 말은 다르다. 이충연 전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은 경찰이 사용하던 전기톱과 용접기 등에서 나온 불꽃이 발화의 원인이라고 했다.

 조사 당시 증거가 분실되는 일도 발생했다. 화재 원인 중 하나로 꼽혔던 발전기 스위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압수해갔다. 철거민 측 김형태 변호사가 발전기 스위치를 증거로 신청했지만 “잃어버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경찰이 충분한 소방 인원을 확보하지 않은 채 특공대 진입을 시도한 것도 논란거리다.

 지난해 9월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용산참사는 안전조치가 부실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입한 당시 경찰 지휘부에 책임이 있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3월 용산참사 사건 재조사를 위한 검찰 과거사위원회도 출범했지만, 현재까지 특별한 활동이 없다. 위원장을 맡았던 김갑배 변호사는 최근 법무부에 사의를 표명했다. 용산참사 조사를 맡았던 팀원 2명도 사퇴했다. 검찰의 재조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겠냐는 우려가 나온다.

 2009년 검찰 조사의 적정성에 대한 의심이 이어지자 당시 검찰 수사팀은 “사실관계의 토대 위에서 올바른 법적용을 했다”는 입장문을 지난 16일 냈다. 검찰은 “6명이 희생된 사건의 형사법적 책임은 불가피하게 농성자들에게 귀속될 수밖에 없었다”며 “경찰진압에 준비부족 등 문제점이 상당하였으나 ‘위법하다’는 점이 인정되지 않아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고 했다.

 유족들은 진압 작전을 최종 지휘한 김석기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충분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김 전 청장은 사건 이후 자진 사퇴했다. 한국공항공사 사장을 거쳐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 됐다.

■용산참사 일지

2006년 4월20일 서울시 ‘용산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 지정

2007년 10월 삼성물산, 포스코 등 건설사 용산4구역 공사 수주

11월 재개발지구 철거작업 개시

2009년 1월19일 오전 3~5시 철거세입자 32명 남일당 건물 진입 및 망루농성 시작

오전 7시30분 김석기 서울경찰청장, 농성 상황 보고받음

낮 12시30분~오후 1시10분 경찰 지휘부 회의에서 경찰특공대 투입 결정

오후 7시 경찰, 다음날 오전 6시30분 진압 결정

11시30분 김석기, 진압작전계획 승인

1월20일 오전 6시30분 남일당 빌딩 경찰특공대 진입작전 개시

6시58분 특공대 옥상진입조 망루 1차 진입

7시5분 망루 내 1차 화재 발생

7시18분 특공대 옥상진입조 망루 2차 진입

7시21분 망루 내 2차 화재 발생

7시25분 망루 붕괴

8시 진압작전 종료

9시30분~10시30분 서울중앙지검 주재 현장검증

9시38분~낮 12시50분 망루에서 시신 6구 발견. 병원 이송

11시 김석기 현장방문

2월4일 유족, 김석기 등 경찰지휘부 6명 업무상과실치사상 등 고발

2월9일 검찰 특별수사본부 ‘화재는 농성자 화염병 투척으로 발화’ 발표

2월10일 김석기 사과, 사퇴 의사 발표

8월11일 서울중앙지검, 경찰지휘부 불기소 처분

10월28일 서울중앙지법, 망루 생존 철거민 전원 유죄 판결. 철거민 9명에게 징역 2~6년 선고(경찰관 처벌은 없음)

2013년 1월31일 철거민 이충연, 김주환, 천주석, 김성환 등 특별사면으로 출소

2016년 4월 서울시, 용산4구역 정비계획 변경안 통과

2015년 9월 효성 용산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수주

2016년 11월 용산4구역 주상복합아파트 착공

2018년 3월 검찰 과거사위원회 용산참사 사건 재조사 방침 밝혀(현재 특별한 활동 결과 없음)

2018년 9월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용산참사는 안전조치가 부실한 상태에서 무리한 진입한 당시 경찰 지휘부에 책임 있다”고 결론

2019년 1월20일 용산참사 1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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