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너에게 우린, 우리에게 넌

2021.08.28 14:17 입력 2021.08.28 14:19 수정

아프가니스탄 파르완주 바그람기지 안에 있었던 한국병원(정면 흰색 건물)과 직업훈련원(오른쪽 갈색 건물). 권희석 ‘한국 지방재건팀’ 초대 대표가 쓴 <아프가니스탄, 왜?>에 실린 사진이다.  / 청아출판사 제공

아프가니스탄 파르완주 바그람기지 안에 있었던 한국병원(정면 흰색 건물)과 직업훈련원(오른쪽 갈색 건물). 권희석 ‘한국 지방재건팀’ 초대 대표가 쓴 <아프가니스탄, 왜?>에 실린 사진이다. / 청아출판사 제공

한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직접 인연을 맺은 것은 2001년부터다.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인 아프가니스탄전쟁에 한국도 5개의 비전투부대를 파병했다. 2010년부터는 파르완주에 지방재건팀을 파견해 학교, 보건소 등을 짓고 각종 물품을 지원했으며 병원, 직업훈련원을 운영했다. 지난 20년간 한국이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한 인원은 군인과 민간인을 합해 5210명(연인원)에 이른다.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된 한국이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국가 중 한곳이 바로 아프가니스탄이었다.

“테러는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인류 공동의 적입니다. 우리는 테러에 대한 반대입장을 단호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김대중 전 대통령, 2001년 10월 8일)

2001년 10월 7일, 미국과 영국은 탈레반 정권의 핵심군사시설 공습을 개시했다. 30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9·11테러가 일어난 지 26일 만의 일이었다. 공습이 시작되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하겠다는 내용의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한국군의 파병은 그해 12월부터 이뤄졌다. 테러라는 반인륜 범죄 퇴치, 국제평화 기여 등의 이유도 있었지만 한미동맹 영향이 가장 컸다. 당시 해군과 공군은 각각 ‘해성부대’와 ‘청마부대’를 파병해 2003년까지 군수물자, 건축자재, 병력 등의 수송을 맡았다. 의료지원 부대인 ‘동의부대’, 건설공사 지원을 위한 ‘다산부대’는 각각 2002년 2월, 2003년 2월에 추가 파병돼 2007년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아프가니스탄 한국 PRT 경호 임무를 맡은 오쉬노 부대의 5진 파병 환송식(2012년 5월)에서 장병들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아프가니스탄 한국 PRT 경호 임무를 맡은 오쉬노 부대의 5진 파병 환송식(2012년 5월)에서 장병들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5개의 비전투부대 파병

카르자이 정부 탄생 이후 주로 활동한 한국의 동의·다산부대는 인도주의적 활동도 함께 펼쳤다. 동의부대는 바그람기지 내 한국병원에서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도 진료했다. 다산부대는 기지 주변 유치원·고등학교를 보수하기도 했다.

한국사회에 아프가니스탄과 탈레반이 가장 선명하게 각인된 시점은 2007년일 것이다. 다산부대의 고 윤장호 하사가 탈레반의 자살폭탄테러로 그해 2월 전사했다. 통역병이었던 그는 현지인 기술교육을 위해 바그람기지 정문 앞에 나가 있다가 사고를 당했다. 같은해 7월에는 분당 샘물교회 교인 23명이 선교·봉사활동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갔다가 탈레반에 납치됐고, 2명이 살해당했다. 이후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을 허가받아야만 갈 수 있는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했다.

동의부대와 다산부대는 그해 12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샘물교회 사건 여파로 군 철수가 이뤄졌다는 시선이 있었지만, 국방부는 철수 계획은 이전부터 예정돼 있었다고 밝혔다.

인기 높았던 병원·직업훈련원

미국은 탈레반 축출 후 아프간 재건 과정에서 한국에 지방재건팀(PRT) 참여를 요청했다. 초기에는 파병된 군인들이 재건에 참여했지만, 2007년 군 철수 이후엔 민간 주도의 ‘한국 지방재건팀’이 꾸려져 파견됐다(2010~2014년). 한국 지방재건팀의 호송과 경호, 경비를 위한 ‘오쉬노 부대’도 이때 함께 파병된다. 오쉬노는 현지어로 ‘도와주는 친구’, ‘동료’를 뜻한다.

한국 지방재건팀은 학교, 보건소 등을 건설하고 교육문화센터와 시범농장, 경찰훈련센터 등을 세웠으며 병원과 직업훈련원을 운영했다. 특히 병원과 직업훈련원이 큰 호응을 얻었다. 병원에선 16만여명을 진료했고, 직업훈련원에서는 439명이 졸업했는데 92%가 취업에 성공했다고 한다.

한국병원에서 진료받기 위해 오랜 시간 기다려 온 현지인 환자들이 몸수색을 받는 모습. 권희석 ‘한국 지방재건팀’ 초대 대표가 쓴 <아프가니스탄, 왜?>에 실린 사진이다. / 청아출판사 제공

한국병원에서 진료받기 위해 오랜 시간 기다려 온 현지인 환자들이 몸수색을 받는 모습. 권희석 ‘한국 지방재건팀’ 초대 대표가 쓴 <아프가니스탄, 왜?>에 실린 사진이다. / 청아출판사 제공

“우리 병원의 인기가 높다 보니 한가지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 병원에서 반드시 진료를 받으려고 전날 저녁 8시경부터 줄을 서기 시작한 것이다. (중략) 이나야툴라라는 이가 텐트를 몇개 세우고 대기자들, 특히 여성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잠도 재우고 차도 팔면서 돈을 갈취한다고 한다.”

한국 지방재건팀의 초대 대표를 지낸 권희석 대사의 책(<아프가니스탄, 왜?>·청아출판사)에는 한국병원의 인기가 좋아 발생한 해프닝이 기록돼 있다. 한국병원 진료를 받으려고 전날 저녁부터 기다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돈을 갈취하는 민간인이 생겨난 것이다. ‘한국병원은 돈 내야 갈 수 있다’는 오해까지 퍼져, 권 대사는 바그람군수와 바그람경찰서장, 주정부 관계자들을 여러차례 만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권 대사의 기록에 따르면, 한국 직업훈련원 역시 훈련생들이 졸업 전 채용될 정도로 신뢰받았다. 아울러 한국 지방재건팀은 각 지역에 필요한 물자를 어떻게든 전달해 “한국 PRT는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킨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8월 26일 입국한 377명의 아프간인은 한국 PRT에서 함께 일한 현지인 의사, 간호사, IT·통역 전문가들과 그 가족들이다.

지난 20년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 규모도 확대돼왔다. 외교부에 따르면 1991년부터 2019년까지의 양자 무상원조 금액은 2억7600만달러 수준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엔 등을 통한 아프간 경제사회개발사업엔 7억2800만달러(2011~2020년)를 지원했다. 원조액을 모두 합하면 1조1700억원에 이른다.

아프가니스탄에 한국은 전후 사회 재건에 도움을 준 국가지만, 한국에게도 아프가니스탄은 인도주의적 실천의 의미를 새겨준 나라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사실 한국은 동맹국의 책무로 아프가니스탄에 발을 들였지만, 분쟁국가에서의 PKO(평화유지) 활동 경험이 일천했던 우리에게 아프간에서의 지난 20여년은 인도주의 활동과 재건사업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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