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노동예술

2015.05.01 20:58 입력 2015.05.01 21:37 수정
김준기 | 미술평론가

노동의 가치를 사유하는 예술

예술은 일이면서 놀이다. 흔히 예술을 일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노동요나 동굴벽화 등 예술의 기원이 노동 과정 속에 들어있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예술과 노동은 불가분의 관계다.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예술노동이야말로 인간의 노동 가운데 최고도로 발달한 기술적 숙련과 지적 능력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예술노동은 인간 노동의 핵심이다. 하지만 역사 속의 예술은 노동을 배제해왔다. 예술(이라는) 노동은 노동을 주제로 다루지 않았다. 노동이 본격적으로 예술 속에 등장한 것은 산업사회의 노동자들을 다룬 회화, 조각이 등장한 근대 이후의 일이다.

특히 공공예술에서 노동 의제가 등장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몇몇 기념비적인 공공미술 작품들이 노동자의 모습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산업역군으로 치켜세우며 근로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역할을 할 뿐, 노동가치의 본질과 노동현실을 다루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다수의 공공예술 작품들은 영웅을 다룰 뿐 노동하는 사람을 기리는 일을 꺼려 했다. 오늘날 도심 속에서 노동자의 모습을 다룬 작품들을 만나는 일은 단순하게 노동자가 작품 소재로 등장했다는 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노동을 사유하는 노동예술이다.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맨’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맨’

■ 보로프스키의 ‘해머링맨’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

광화문 네거리에서 신문로 쪽 가까운 곳, 흥국생명 빌딩 앞에는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사람’(2008)이 있다. ‘해머링맨’이라는 원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도쿄, 프랑크푸르트 등 세계 유명도시에 총 9점이 서 있는데, 서울의 이 작품이 나이로는 막내지만 규모는 제일 크다. 22m에 이르는 거대한 인물상이 망치질을 하는 모습을 통해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측면에서 포착한 인체의 실루엣을 패널 형식에 담고 있는 작품은 거대한 팔이 전기장치에 의해 움직이면서 망치질하는 모습을 연상하도록 고안됐다.

기술적으로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 움직임을 공공예술 작품에 도입하는 것이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닌데, 이 작품은 크기와 더불어 움직임으로 주목받는다. 처음에는 망치질 한번 하는 데 1분40초 걸렸지만, 망치질하는 동작을 확연히 알아볼 수 있도록 1분으로 줄였다. 또 건물에 바짝 붙어있던 작품을 앞 도로 쪽으로 옮긴 후, 곡선형태의 스트리트 퍼니처를 배치하고, 주변에 조경을 보탬으로써 작품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주변을 ‘해머링맨 문화광장’으로 새로 조성해 랜드마크 기능을 강화한 이 작품은 서울 도심의 명물로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대다수의 건물주들이 법제도가 규정한 규모만큼의 재원을 투여해 의무를 수행하고 넘어가는 데 비해 흥국생명은 유명 작가의 대작을 설치하고 나중에 재배치하는 데까지 적극성을 보여 공공미술 작품을 통해서 건물의 가치를 높이는 문화전략의 사례를 남겼다. 노동의 가치에 경의를 표하는 이 작품은 군주나 장군 등과 같은 영웅이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일하는 사람을 담고 있다. 서울 도심의 빌딩 숲에서 노동자의 모습을 예술 작품으로 대면하는 일은 낯설면서도 친근하다. ‘대기업 건물 앞에서 망치질하는 노동자의 모습’이라는 역설과 함께 ‘노동의 가치를 공유하는 공공예술’이라는 긍정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본주의 ‘세기를 위한 기념비’

구본주의 ‘세기를 위한 기념비’

■ 구본주의 ‘세기를 위한 기념비’
노동자들의 위태로운 삶의 현실

노동의 한 유형인 예술노동은 노동을 사유하는 추상적인 노동이다. 구본주의 작품은 자본주의 체제가 규정하는 노동의 개념을 넘어서 노동의 본질을 사유하는 노동예술이다. 홈플러스 영등포점에 있는 구본주의 ‘세기를 위한 기념비’(2001)는 위기에 처한 임금노동자의 위태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12m 길이의 아치 위에 보드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샐러리맨의 모습이다. 그는 동판을 두드려 인체조각을 만드는 독특한 기법으로 다수의 명작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 또한 특유의 유려한 동판작업으로 만든 인물상을 스테인리스스틸 아치 위에 올려 두었다.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구본주는 1980년대 후반부터 2003년까지 활동하면서 눈부신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한국사회의 팍팍한 현실을 살아나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 계급성 문제를 주로 다뤘다. 그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나무를 깎아서 만든 ‘노동자’라는 작품을 남겼고, 형광폴리코트로 떠낸 1000개의 작은 샐러리맨 조각을 천장에 매달아 하늘의 별처럼 우러러보게 만든 조각설치 ‘별이 되다’를 유작으로 남겼다. 탄탄한 구상조각에 과장과 생략을 더한 그의 작품들은 블루칼라에서 화이트칼라에 이르기까지 일하는 사람의 삶을 담고 있다.

구본주는 노동자를 사랑했다. 그가 세상에 눈을 뜨던 시기는 87년 6월항쟁을 거쳐 노동자대투쟁이 번지던 시기다. 그는 예술가의 삶과 노동자의 삶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로서 노동이라는 인간의 존엄한 본성에 족쇄를 채우는 자본의 힘에 맞서고자 했다. 그는 지속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절망과 희망, 고뇌와 환희를 다뤘다. 소조작업을 주로 한 초기작에서부터 동판을 두드려 만든 연작들과 쇠철판 용접조각과 나뭇조각을 이어붙인 목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자유자재로 다룬 그는 탁월한 예술노동으로 노동예술을 일궜다.

임옥상의 ‘전태일 기념상’

임옥상의 ‘전태일 기념상’

[김준기의 사회예술 비평](10) 노동예술

■ 임옥상의 ‘전태일기념상’
노동의제를 일깨우는 공론장

청계천 6가 평화시장은 산업화시대부터 봉제시장이 활발한 곳으로 오늘날까지도 의류 도소매상이 집결해 있다. 동대문 일대의 패션과 청계천의 산책 코드가 공존하는 평화시장 입구는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가진 곳이다.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전태일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분신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 평화시장 앞에 있는 전태일다리 위에는 ‘전태일기념상’(2005)이 있다. 전태일 반신상과 시민들의 염원을 담은 동판 문구들은 20세기 후반 한국사회를 뒤흔든 고통스러운 장소의 기억을 추념한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을알리고자 했던 청년 전태일은 한국 사회운동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그는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암흑 같은 70년대에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이라는 두 축에 변혁의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자본의 힘은 인간 본연의 존재방식인 노동을 유린한다. 전태일 서거 이후 45년이 지난 지금, 전태일 시대의 고통은 또 다른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이른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 비율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기념상’은 산업화의 독주를 민주화로 바꾼 전환의 장소를 기억하는 공공예술이다. 임옥상은 ‘동판 새기기 운동’을 벌이며 시민과 소통하는 참여형 공공예술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는 인물상을 흙으로 빚어 알루미늄 주물을 떴다. 흙을 매끈하게 다듬기보다는 거친 흔적을 남겼다. 전태일 열사가 봉제사였다는 것을 토시를 착용한 작업복장으로 표현했다. 왼손은 땅을 딛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언가를 움켜쥐기 전의 모습이다. 반신상은 좌대에 올리지 않고 바닥에 놓여있다. 다리 위에 서 있는 반신상의 전태일은 분신을 앞두고 명상하고 있다. 그의 명상은 1970년 여름의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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