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0년대 영페미, 성별 규범을 깨지 않고는 그 무엇도 깰 수 없어"

2018.10.26 12:25 입력 2018.10.26 12:53 수정

생각할수록 해괴하다. 여성이 여성 역할을 하고, 여성이 남성 역할도 한다. 무대 위에서 남자가 된 여배우들은 일상에서도 남자인 척 행동하곤 했다. 거친 말투로 말하고 보폭을 넓게 해 걸으며 바지를 입었다. 전통 공연에 기반한 것 같지만, 완전한 전통 공연은 또 아니다. 트랜스젠더, 레즈비언이란 말이 없을 때였지만, 사실상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이상한 공연엔 열렬한 여성 팬덤이 형성됐다. 남역 배우들을 만나기 위해 가출하고 패물을 바치고 아예 극단에 들어와 뒷바라지하는 팬들도 있었다고 한다. 어떤 남역 배우는 자기 결혼 사진은 다 잃어버렸어도, 팬과의 가상 결혼 사진은 간직했다. 본격적인 무대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배우들은 언제 입을지 모르는 무대 의상을 꺼내 손질하고 있다.

여성국극은 1950~60년대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나 이제는 명맥이 거의 끊긴 공연 장르다. 여성국극의 인기가 예상외로 높아지자, 남성 예술가, 평론가들은 “여성국극이 아니라 (혼성)창극을 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정부에서 지원하지 않고, 예술 제도권에서 공격을 가하자 여성국극은 서서히 인기를 잃었다.

최근 ‘올해의 작가상 2018’을 받은 정은영 작가(44)는 2009년부터 여성국극과 관련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무대가 사라지고 연구자도 거의 없는 여성국극 배우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그에 바탕해 ‘퀴어한 예술 실천의 정치적 힘’을 말해왔다. 영상, 아카이브, 설치 등 여성국극과 관련한 정은영의 작품 11점이 전시 중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작가를 만났다.

국립현대미술관, SBS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정은영씨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3일 만났다.전시장 입구에는 극장의 무대를 재현한 듯한 푸른 커튼이 쳐있고, 그 뒤로 옛 여성국극 배우들의 흐릿한 흑백 사진이 보인다.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국립현대미술관, SBS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정은영씨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3일 만났다.전시장 입구에는 극장의 무대를 재현한 듯한 푸른 커튼이 쳐있고, 그 뒤로 옛 여성국극 배우들의 흐릿한 흑백 사진이 보인다.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 특히 ‘남역을 연기한 여성’이 흥미롭습니다.

“성별이 자연스럽게 구별되고, 남녀가 이분법적으로 존재하고, 남녀의 역할이 따로 있고, 두 성이 만나 하모니를 이뤄야 한다는 관념. 전 이 관념을 깨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이 무엇도 깨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진보적인 커뮤니티에서조차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은 좀처럼 깨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로 젠더는 패러디됩니다. 남자 개그맨들이 여성 연기 하는 건 얼마나 흔한가요. 이런 일이 무대 위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성을 연기합니다. 여성은 여성적으로, 남성은 남성적으로 보이려고 행동하곤 하죠. 제 작업의 핵심 목표는 한국 사회의 견고한 성별 규범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여성국극 배우들은 이미 오래전 몸으로 성별 구분을 깨면서 인생을 살아온 분들이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정권이 잘사는 국가,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배제한 여성, 소수자의 목소리를 어떤 방식으로 되살려야 하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 한때 그토록 인기있는 장르였는데 지금 여성국극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10여년간 여성학, 국문학쪽 연구자들이 꽤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연구자도 줄고, 관련 작업도 거의 없어요. 여성국극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보니 80대가 된 배우들의 구술에 의존해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노인의 기억이라서 그런지 어제와 오늘의 말씀이 다르거든요. 이게 학자들에게는 진실성 측면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해요. 하지만 예술언어로서는 다르죠. 오히려 그런 점이 제겐 영감이 됐습니다. 한 사람의 기억이 각색되고, 같은 사진을 두고도 다른 말들이 나온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역사가들에게는 볼품없는 아카이브일지 모르지만, 예술가에겐 상상력을 끌어낼 수 있는 아카이브죠. 하나의 역사로 소환되지 않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 이제는 찾는 이가 드문 폐쇄적인 여성국극 커뮤니티니, 접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처음 1년은 과일 깎고, 커피 내리고, 선생님들 뒷바라지를 했어요. 작품 얘기는 전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꾸준히 찾아가니 어느 순간 저를 자신들 그룹의 일원으로 반겨주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물어봤어요. ‘저를 왜 믿으시냐’고. 그랬더니 ‘너도 예인이잖아’라고 말해주셨어요. 엄청 감동받았죠. 친척 할머니를 만나도 ‘왜 결혼 안 하느냐’는 질문 받잖아요. 노인들에게 지혜로운 말을 듣기가 굉장히 어려운 시대인데, 이분들이 예술을 인정해주고 제게 우정어린 대우를 해주는 순간 ‘작업은 잘 못해도 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 당신의 작업은 때로 미술작가라기보다는 민속지학자, 사학자, 인류학자의 작업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현대미술의 포용력 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다만 예술가들에게는 실증적 권위가 필요 없을 뿐입니다. 현대 예술가가 생산하는 예술지식은 허구에 가깝지만, 그 때문에 더 많은 복잡성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현대미술가 정은영 작가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현대미술가 정은영 작가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여성연희의 전통은 동아시아 다른 국가에도 있었다. 일본의 다카라즈카 극단은 지금도 인기를 끌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현재 활동하는 유명 일본 여배우들 중에서도 이곳 출신이 많다. 홍콩, 대만에도 비슷한 여성공연이 있었다. 정은영은 “현실에는 억압적인 남성들이 다수였으니, 여성들은 여성국극 공연장에서 오히려 이상적인 남성상을 만날 수 있었다”며 “여성국극 극장은 동성애적 욕망이 잠시 허용되는 곳이었다”고 했다.

정은영의 영문 예명은 ‘siren eun young jung’이다. 가장 앞의 ‘세이렌’은 그리스 신화에서 남성 선원들을 암초 쪽으로 유혹해 죽음에 빠트리는 존재다. 정은영은 “제도를 무화시키고 중심성을 해체하는 존재”라고 해석했다. 뒤의 성명을 모두 소문자로 쓴 것은 무엇이 성인지 이름인지 헷갈리게 하려는 의도다. 1990년대 초반 대학의 페미니스트들이 부모 성을 같이 쓰거나, 성을 떼거나, 별명으로 자신들을 부른 데서 유래한 작명이다. 정은영은 “별명, 아이디로 서로를 부르다보니 본명을 잘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면서 “당시 친구 중에 ‘호빵’이 있었는데, 지금은 유명한 ‘선생님’이라 조심해 부르곤 한다”며 웃었다.

- 최근에야 페미니즘의 역할이 재조명되고 있지만, 당신은 이미 20년 이상 페미니즘의 가치를 내세우고 살아오셨군요.

“요즘 페미니즘의 흐름을 두고 영페미, 넷페미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미 1990년대의 우리들도 그렇게 불렸어요. 그때 막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거든요. 1990년대 페미니즘은 자신의 언어가 있는 지식인, 대학생을 중심으로 세력화했는데, 요즘은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다양한 목소리들이 인터넷,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결집하는 걸 느낍니다. 흥미롭고 재미있고 존경스럽습니다. 학교에서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오히려 배우기도 합니다. 진짜 센 목소리를 낸다는 측면에서 부럽기도 하고요. 다만 센 목소리를 내기 위해 타자들을 양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제된 경험은 또 다른 소수자와 만나야 합니다. 제가 여성국극 무대에 게이 코러스를 초대한 것도 그런 맥락이고요. 지금의 고통받는 목소리들이 또 다른 고통의 소리를 들었으면 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전시중인 정은영 작가의 ‘보류된 아카이브’. 사진, 영상 등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나이든 배우들의 희미한 기억에 의존했기에 ‘보류’라는 표현을 썼다.<br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전시중인 정은영 작가의 ‘보류된 아카이브’. 사진, 영상 등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나이든 배우들의 희미한 기억에 의존했기에 ‘보류’라는 표현을 썼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정은영 작가의 신작 영상 ‘유예극장’과 관련 퍼포먼스. 여성국극의 전통과 교차해 젊은 여성 예술가들의 삶을 그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정은영 작가의 신작 영상 ‘유예극장’과 관련 퍼포먼스. 여성국극의 전통과 교차해 젊은 여성 예술가들의 삶을 그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서양화과를 나온 뒤 영상작업으로 전환한 계기가 있나요.

“1990년대 당시 진보적인 영페미니스트로서 ‘이렇게 컨벤셔널한 작업(회화)을 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때는 회화가 너무나 보수적인 매체로 느껴졌고, 회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많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학제에 묶여 있으니 계속 그림을 그리긴 했고요. 그러다가 영국 유학을 가 매우 작은 방에 살기 시작했는데, 회화를 그리거나 보관할 공간도 부족하니 작은 노트북 컴퓨터 하나로 영상작업을 시작했어요. 미디어 활용법을 정통적으로 배운 건 아니고, 해상도 낮은 카메라와 노트북으로 소소하게 작업해 나갔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뒤 본격적으로 비디오 작업을 했고요.”

- 여성국극 프로젝트에 돌입하면서는 공연기획까지 아우르고 있는데요. 이 역시 낯선 분야 아닌가요.

“2012년쯤 여성국극 관련한 작업이 너무 진척 안된다고 느꼈어요. 배우들이 노인이시라, 카메라 앞에 선다는 데 대한 이해가 없고 불편해하시더라고요. 결국 ‘무대를 마련해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2012년 ‘플레이타임’이라는 퍼포먼스 중심의 전시에 참여하면서 무대 경험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피를 말렸는데 여성국극 선생님들은 완전히 날아다니시더라고요. 이후 정식으로 극장에서 공연도 했습니다. 극장이 배우에겐 정말 마법같은 공간이 된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 다른 작가들의 작업에 대한 비평작업도 간간이 하고 계시네요.

“작업을 하면 할수록 제가 작업을 하기보단, 작업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사람의 작품 보기를 좋아하고, 학생들 가르치는 것도 즐겁습니다. 주변의 동료들이 보는 세계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언젠가 여성 작가들의 언어를 조금 더 비평적인 관점에서 들여다보려는 계획도 있습니다.”

23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만난 정은영 작가.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23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만난 정은영 작가.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 한국에서 상업성 없는 미술작가로 살기 위해선 공공 창작기금에 의존하거나, 텀블벅같이 민간 후원에 의지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살아갑니까.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합니다. 학교에서는 철저히 교육인으로 살고, 제 작업을 할 때는 철저히 작업자로 존재합니다. 물론 물리적으로 시간이 적고, 두 가지 모드를 오락가락하는 것이 힘들긴 합니다. 많은 작가들이 현실에 불평하곤 하지만, 한국의 예술 창작지원기금은 아시아권 국가 중에선 월등히 좋은 제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제 작업에도 공적기금이 사용되곤 하는데, 작업할 때 철저히 그 예산 안에서 운용합니다. 주머니돈 빼서 작업할 수도 있지만, 제 작업이 팔릴 수 있는 시장은 제한적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가치를 생산하는 순환과정에 순응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고요.”

정은영은 내달 열리는 상하이비엔날레에 <소상팔경>을 출품한다. ‘소상팔경’은 원래 동북아시아의 고전적 이상향을 8개의 풍경으로 그린 화제(畵題)인데, 정은영은 이를 비틀어 팽목항, 광화문 등 한국 사회의 뜨거운 장소들을 8채널 비디오로 재해석했다. 다만 중국 당국의 검열 때문에 ‘소상’이란 어휘는 빼고 ‘팔경’으로만 내보낸다. 정은영은 또 내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 남화연, 제인 진 카이젠과 함께 ‘여성서사’를 주제로 삼아 참여한다. 1990년대 ‘영페미’의 활력과 20여년 쌓은 실력, 첨단의 이론과 왕성한 실천을 두루 갖춘 정은영은 지금 뜨거운 작가다.

- 언제 가장 행복하십니까.

“그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 두 마리 고양이(삼동, 그래)를 데리고 집밥 만들어 먹을 때요. 하루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 오직 나만을 위해 요리하고 밥을 먹는 나만의 절대적인 시간입니다. 어쩌면 그 시간이 있어야 일을 해낼 수 있고, 하루를 마감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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