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작게 더 좁게…불편함 속에서 양보와 겸손이 몸에 밸 수 있도록

2022.02.28 22:53 입력 2022.02.28 23:04 수정
박정현

더 낮은 곳의 건축을 위하여

자비의 침묵 수도원의 좁은 복도. 수도자들은 하루에도 수차례 이 복도를 오가며 부딪치지 않기 위해 서로를 배려한다. 작은 사각 안은 자비의 침묵 수도원 전경. ⓒ2010.진효숙.All right reserved

자비의 침묵 수도원의 좁은 복도. 수도자들은 하루에도 수차례 이 복도를 오가며 부딪치지 않기 위해 서로를 배려한다. 작은 사각 안은 자비의 침묵 수도원 전경. ⓒ2010.진효숙.All right reserved

자본이 없는 곳에 손길을 내민 건축가 이일훈, 그는 건물을 여러 채로 나눠 얇게 만드는 ‘채 나눔’을 기본으로 삼았다
대표작 ‘자비의 침묵 수도원’은 대지에 비해 협소한 면적, 서로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더 좁은 복도가 특징이다
‘커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작을수록 나누어야 한다’던 그의 주장은 수도자 같았던 그의 삶과 닮았다

건축의 역사에는 권력과 자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건축사는 지배 계급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동기와 열정이 만들어낸 기념비적 건축물 중심으로 서술된다. 건축이 다른 어떤 물건보다 돈과 노동이 들기 때문이고, 법과 제도에 의해 규정되는 산물인 것도 한 이유다. 장르를 구분하는 것이 이제 시대착오적이기는 하지만 문학, 음악, 미술 등에서는 대중음악, 장르문학처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구분하는 것이 통용되곤 한다. 그러나 건축은 고급건축과 대중건축의 구분선보다 합법건축과 불법건축, 건축과 건물을 가르는 기준이 더 선명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축’을 자신의 삶과 무관한 영역으로 생각한다. 평생을 건물 안에서 지내지만 말이다. 역으로 건축가들도 기존 질서의 힘이 닿지 않는 곳, 자본이 없는 곳에 좀처럼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건축’의 근본적인 한계다. 건축은 엘리트주의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몇몇 건축가의 예외적인 노력만이 여기에 균열을 내려고 시도할 뿐이다.

이일훈(1954~2021)은 이런 노력을 경주한 대표적인 건축가다. 그는 1978년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김중업건축연구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고 긴 군사독재가 저물기 시작하면서 한국 사회가 변화의 급물살을 타던 1980년대 말, 일군의 건축가들은 건축의 의미를 다시 묻기 위해 모임을 결성한다. 이 연재에서도 다룬 바 있는 4·3그룹이다. 4·3그룹은 당시 가장 뛰어난 설계사무소에서 활약하던 젊은 건축가들의 모임이었다. 김수근이 이끈 공간, 김중업의 김중업건축연구소, 엄덕문의 엄이건축을 비롯해 1980년대 주요 설계회사로 급부상한 정림건축, 원도시건축 등의 건축가들이 모였다.

이일훈도 4·3그룹의 멤버였다. 이들은 함께 해외로 건축 기행을 떠나고(해외여행 자유화가 1987년의 일이다), 세미나와 난상 토론을 벌이며 자신만의 ‘언어’를 벼려나갔다. 1992년 12월에 개최된 전시 ‘이 시대 우리의 건축’과 동명의 도록으로 몇 년간의 활동은 정리된다. 큰 화제를 모은 전시 못지않게 도록도 전설로 남았다. 당시 젊은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안상수가 디자인한 도록의 실험적인 서체와 본문 레이아웃, “4·3 Group”만 크게 배치한 푸른 골판지 종이는 파격적이었다. 또 인상적인 것은 건축가 14명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국가의 대형 프로젝트, 강남 개발로 무더기로 진행되던 상업 프로젝트 모두와 거리를 두고 ‘작가주의’ 건축을 추구하고자 한 이들은 자신들의 ‘에고’(자아)를 과시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각 건축가들에게 할당된 지면은 건축가들의 앞모습 전신사진으로 시작해 뒷모습 전신사진으로 마무리된다. 정면을 응시하고,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멀리 바라보고, 의자에 기대고 몸을 뒤로 젖히고, 물끄러미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는 등 자세는 제각각이었지만 건축가라는 자의식을 숨김없이 표출했다.

[콘크리트와 글로 빚은 20세기 한국 건축](12)작게 더 좁게…불편함 속에서 양보와 겸손이 몸에 밸 수 있도록

반면 이일훈은 둥근 거울을 들고 얼굴을 가린 채 카메라 앞에 섰다(사진). 그래서 독자들은 그의 얼굴 대신 거울에 비친 사진사의 모습만 볼 수 있다.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자의식을 가리고 세상의 시선을 회피하는 이일훈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를 다른 건축가들과 확연히 다르게 보이고 싶어 하는 과장된 제스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일훈의 이후 행보를 감안하면, 이 태도는 과장보다는 주저함에 가깝다. 4·3그룹 활동 직후 1990년대 초중반 이일훈은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건축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출신학교나 사무실 모두 그의 성공을 이끌어주기에 부족하지 않았고, 평론가로 등단했을 만큼 글 솜씨도 빼어났다. 엘리트 건축가의 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던 때, 그는 그 길에서 서서히 물러났다. 1990년대 중후반 그는 작업을 잡지에 발표하지 않았고, 깊은 애정을 기울인 평론동우회를 제외하고는 건축 단체나 모임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이일훈의 초기 작업인 인천시의회 의사당 건물(1990년 완공)은 전형적인 관공서 건물이다. 김중업의 프랑스대사관은 1961년 준공된 이래 숱한 변형을 낳으며 전국 각지에 들어섰는데, 인천시의회 의사당 건물도 그중 하나다. 이일훈의 손을 거쳐간 건물 가운데 규모가 큰 편이지만 이 건물은 주요 작업 목록에 오르지 못한다. 몇 년 뒤 그의 작업은 크게 달라진다. 이 몇 년의 시기가 이일훈에게 결정적인 분기점이 된다. 1992년 말 4·3그룹 전시회에서 그는 “성, 속, 도”라는 주제로 ‘자비의 침묵 수도원’과 주택 ‘운율재’ 계획안을 소개했다. 이후 그의 작업은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일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자비의 침묵 수도원에는 그가 일관되게 지속한 방법론이 온전히 녹아 있다.

그는 자신의 건축론을 ‘채 나눔’이라 불렀다. 건물을 하나의 덩어리로 두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채로 나누어 얇게 만드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모든 실과 방이 외기(外氣)와 면하게 되니 자연과 건축이 더 긴밀하게 접촉한다. 빛과 바람이 들기 쉽고 다른 방으로 건너가기 위해 때로는 눈과 비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가능하면 맞아야 한다고 이일훈은 권한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나뉜 전통 건축에 착안한 이 생각은 비움이나 마당을 강조한 4·3그룹 내 다른 건축가들의 입장과 공명한다. 이일훈만의 아이디어는 아니었지만 그는 이를 누구보다 더 철저히 관철하려 했다. 커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작을수록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채 나눔’은 자비의 침묵 수도원 전체를 관통한다. 비교적 여유로운 대지임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의 면적은 협소하다. 이 작은 수도원에서 복도는 더 좁다. 복도 끝에 위치한 샤워실과 화장실을 오가기 위해 수도자들은 이 복도를 수시로 다녀야 한다. 서로 마주치면 한 사람이 비켜서야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을 가진 복도에서 수도자들은 매번 양보하거나 양보받지 않으면 안 된다. 건축가는 이 복도에서 겸손의 미덕이 몸에 밸 것으로 믿었다. 불편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수도자들이 아침저녁으로 미사를 올리는 경당은 수도원 경내에서 가장 먼 곳에 있다. 해도 뜨지 않은 겨울, 경당에 가기 위해서는 더 일찍 일어나 많은 것들을 챙겨야 한다. 비와 눈을 맞고 자연의 변화를 매일 느끼며 오가는 불편함을 절감하게 만든다. 건축이 매 순간 몸을 깨운다. 이일훈은 이런 장치를 일련의 주택에서도 최대한 도입하려 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불편하게, 밖에서, (동선을) 늘려 살아야 한다. 이는 건축에 필요한 기능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20세기 초의 흐름에 반발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여유로운 프로젝트에서, 일상에서 벗어난 목가적인 주말 주택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을수록 나누고 더 불편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천 만석동에 위치한 ‘기찻길 옆 공부방’에서도 잘 드러난다.

무허가 판잣집에서 공부방을 운영해온 선생님들은 이일훈에게 새로운 공부방의 설계를 의뢰했다. 작고 낮은 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모여 있는 만석동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방과 후 함께 공부하고 생활하는 작은 장소를 새롭게 짓는 일이었다. 20평도 되지 않는 바닥 면적에 이일훈은 공부방과 회의실, 기도실 등을 포개 넣었다. 한 뼘이라도 더 큰 방을 만들 법한 곳에서 이웃과 친구와 선생과 학생이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불편하게 살아온 이들에게 예전보다는 편하겠지만 여전히 조금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축가는 드물다. 동선은 늘어나 외부 계단을 통해야 1층과 2층, 3층을 오갈 수 있다. 이웃의 옥상, 담과 면한 가파르고 좁은 계단, 거칠고 소박한 재료로 빚은 외관은 만석동의 풍경에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어울린다. 이일훈은 오랫동안 노숙인들을 위한 크고 작은 공간을 고치는 일을 돕고, 작은 공동체를 꾸리려는 이들을 자문하는 일 등을 마다하지 않았다.

가장 낮은 곳에서 조용히 이루어진 이 작업들은 건축주와 건축가의 법적이고 금전적인 관계, 설계의 독창성, 시공의 완성도, 재료의 접합 방식, 공간 체험, 예산 등 건축을 둘러싼 여러 쟁점들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건축가로 성장한 이일훈이 ‘채 나눔’을 방법론 삼고 윤리적 실천으로 나아간 동기와 이유를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 결정적 계기를 짐작할 수는 있다. 그는 1991년 동료 건축가들과 르코르뷔지에가 1961년 리옹 인근 산턱에 완성한 라투레트 수도원을 방문했다. 라투레트는 르코르뷔지에 후기의 대표적인 건물로 도미니크수도회 수도자 80명이 7년 동안 머물며 수양하는 곳으로 20세기 건축의 대표적인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1992년 잡지에 기고한 기행문에서 그는 이곳에서 전율했다고 토로했다.

엄격하고 청빈한 규율을 강조하는 좁은 개인실에서 그는 하룻밤을 뜬눈으로 보냈으며, 이 건물 앞에서 근대건축의 오류와 한계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고백했다. 재료를 직설적으로 사용하는 방식, 좁고 작은 복도, 구조체와 가벽을 구분하는 재료 사용법 등 이일훈은 이곳에서 건축의 ‘진리’를 발견했다. 그는 꾸밈과 덧댐이 없는 재료, 공간, 형태를 끝까지 지키려 노력했다. 물론 이 경험만으로 이일훈의 작업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일훈은 이후 30년 동안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는 점이고, 그 출발점에 수도원에서의 체험과 수도원 설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일훈은 2021년 7월 세상을 떠났다. 그가 묵묵히 낸 길을 따르는 또 다른 걸음을 기다리며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박정현

[콘크리트와 글로 빚은 20세기 한국 건축](12)작게 더 좁게…불편함 속에서 양보와 겸손이 몸에 밸 수 있도록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을 비롯해 <김정철과 정림건축>(편저),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공저) 등을 쓰고,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번역했다.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등의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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