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열림과 내외부 연결을 지향한 공간…돌봄 시설의 진화

2022.05.03 22:28 입력 2022.05.31 20:30 수정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① 서혜림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

한국 현대건축 역사에 주로 남겨진 것은 크고 빠르게 지은 건물과 남성 건축가 중심의 이야기다. 이제 건물을 지을 땅과 기회조차 많지 않은 지금 건축가는 건물을 짓는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다. 건축이 다루는 영역은 건물을 넘어 도시와 사물, 무형의 디지털로 확장되고 건축가의 직능은 교육자, 기획자, 기록자, 운동가 등을 포함한다. 건축 의의·가치도 다양해졌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우리가 사는 환경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힘이 필요한 지금 연재는 동시대 한국 건축이 풀어가는 ‘관계 확장’ ‘상생 가치’ ‘돌봄·배려 공간 실천’을 조망한다. 그러한 또 다른 건축을 지향해온 오늘날 한국 여성 건축가들을 호명해 건축가의 다양한 사회적 역할도 생각해본다. 한국 건축을 무겁게 속박한 거대 담론보다 지금 여기서 가능한 배움을 탐색하고 실천하는 이들과 대화하며 새로운 연결과 비평의 재분배를 상상해보려고 한다.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은 열림과 연결을 중시하는 서혜림의 건축관을 드러낸다. 한국 돌봄·교육 공공건축의 대표작으로 꼽히기도 한다.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 정면부 입면 드로잉(위 사진)과 2000년 완공 당시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 정면 모습. 어린이집 사진 조명환, 힘마건축 제공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은 열림과 연결을 중시하는 서혜림의 건축관을 드러낸다. 한국 돌봄·교육 공공건축의 대표작으로 꼽히기도 한다.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 정면부 입면 드로잉(위 사진)과 2000년 완공 당시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 정면 모습. 어린이집 사진 조명환, 힘마건축 제공

30대 후반 양육자의 입장에서 설계
건물 상징성 적은 ‘어린이집’이어서
현상설계 과정에선 주목받지 못해

서혜림

서혜림

■ 한국 현대건축 전환기의 여성 건축가

한국 사회의 급속한 성장이 이뤄진 1990년대는 건축계에도 전환의 시기였다. 김수근, 김중업 타계 이후 건축가의 세대교체가 모색됐다. 해외 설계 시장 개방 등 새로운 위기를 함께 극복하려는 소모임들도 조직됐다. 이들 모임의 활동이 비록 오래가진 않았지만 그 운동의 결과 젊은 건축가들의 제도권 유입과 건축 교육의 변화가 진행됐다. 기성 건축학교 대안으로 1995년 설립된 서울건축학교(SA)와 한국 최초로 건축학 석사학위(March, Master of Architecture)를 수여하며 같은 해 개원한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이 건축 교육의 새 흐름을 상징했다. 이 학교들은 선진화된 해외 교육 시스템을 연구하고 우리 상황에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디자인 중심의 설계 교육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기성 건축가뿐만 아니라 막 유학하고 돌아온 이른바 유학 1세대 건축가들의 참여가 활발해졌다. 해외여행 자유화(1989년) 시행 전 다년간 해외 경험을 쌓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건축계에 신선한 자극과 에너지를 전달했다. 그 중심에 건축가 서혜림이 있었다.

서혜림은 당시 젊은 건축가들 사이에서도 낯선 존재였다. 대체로 한국에서 건축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떠난 이들과 달리 그는 중등 교육부터 미국에서 시작했다. 컬럼비아대학, 하버드 디자인대학원(GSD·Graduate School of Design), 쿠퍼유니온에서 미국 건축학교의 다양한 학풍을 섭렵했다. 1994년 한국에 돌아와 힘마건축을 열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가 서울에 오자마자 에디터로 참여했던 ‘공간’ 1994년 11월호 ‘미국의 젊은 건축 교육자들(Young American Educator in Architecture)’ 특집은 새로운 지식이 필요했던 한국 건축계와 또 다른 세계의 지성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건축 이론과 실무 경험을 두루 겸비한 그는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해 서울건축학교와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이 체계를 갖추는 데 기여했다. 이렇듯 새로운 세기로 넘어가던 한국 건축계는 1997년 외환위기라는 복병을 만났으나 지리적, 세대별 접속을 이루며 긴장감 넘치는 활력도 보여줬다. 그때 건축계에 다양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손꼽힐 정도로 적은 여성 건축가 중에서 서혜림은 늘 여성 건축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호출됐다.

퍼즐처럼 조합되는 다양한 공간
비정형 실내, 아이들 탐색 유도해

■ 다양한 탐색과 공간 연결이 이루어지는 곳

가르치는 일과 설계 작업을 병행하던 서혜림에게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한 것은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이다. 2000년 개원해 서울특별시건축상 은상과 한국건축가협회상 본상을 받았으나 현상설계 과정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어린이집’이었기 때문이다. 박물관, 미술관과 달리 건물 상징성이 작아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 힘들었다.

1991년 직장어린이집 설치 의무화 제도가 시행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제대로 된 어린이집 건축물은 없던 때였다. 서혜림의 건축 전까지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도 서울시청 별실에 마련되어 있었다. 30대 후반의 서혜림은 양육자 입장에서 어린이집 건축에 도전해보고 싶어했다. 그간 숙고가 드물었던 보육시설에 관한 생각을 풀어볼 기회이기도 했다.

서울 정동 일대는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이 지어질 때만 해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어린이집 옆, 대법원 건물이었던 서울시립미술관이 개조 공사를 진행했다. 정동길도 지금처럼 보행자 중심이 아니라 차량 중심 도로였다. 이런 곳에 서혜림은 아연 강판, 콘크리트 등 다양한 재료로 개별 공간을 겹치고 외부로 뻗어내는, 묵직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외관을 갖춘 건물을 지었다. 단정하거나 경쾌해야 할 어린이집에 맞지 않다는 비판도 나왔다.

지금은 그 말이 무색하게 도시의 시간과 함께 나이를 먹으며 차분히 거리와 조응한다. 겉에서 볼 때 모든 공간의 생김새가 다른 만큼 실내 공간도 비정형이다. 아이들은 이 공간에서 다양한 탐색을 할 수 있다. 아이와 교사가 눈을 맞추는 공간, 퍼즐처럼 다양하게 조합되는 연결 공간에다 거리 사람들과 대화를 요청하는 나무 외관의 문자 패턴까지 어린이를 위한 열린 공간을 꿈꾼 건축가의 소망이 담긴 건축이다.

지금보다 부족했던 당시 어린이 안전 인식을 고려하면 아이들 출입 공간과 학부모나 외부인의 출입을 분리하는 동선 구성은 획기적이다. 건물 정면은 아이들의 출입 공간, 측면은 외부인의 입장·대기 공간이다. 소란스러운 외부와 면한 정면과는 달리 놀이터와 정원을 둔 후면은 독립적이다. 그 열린 공간을 건물이 ㄱ자로 감싼다. 아이들은 복잡한 도시 상황에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자유롭게 놀이를 즐길 수 있다. 직장인을 포함해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심 어린이집을 고려한 기획이다. 안전에 대한 지지와 독립적 공간을 확보받은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리에서 고립·배제당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일원으로 함께 성장한다.

한편으로 이 건축은 한국 영·유아 시설의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다. 현상설계 당선 후 구상부터 실현까지 수많은 협의와 조정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당선 원안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건물에 많은 수정이 이루어진 이유에는 당시 부재한 돌봄·교육 시설 건축 행위에 대한 제도적 기반, 선례가 되는 영·유아 보육시설의 사례 부족 등 여러 사회적·시대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다. 층과 층을 직접 연결하는 창과 같은 역동적인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의 구상은 공간 운영과 관리 문제, 예산 삭감 등 현실적인 이유로 일부 실현되지 못했다. 감시 사각지대에 놓인 보수적인 선택이 건축을 주춤하게 했다.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사용자 의도에 따라 실내 공간도 많이 개조된 듯 보인다. 이런 개조 과정을 두고 “건축이 사용자들의 더 나은 삶의 형식을 이끌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 상황에 따라 달랐다. 건축을 여러 이해 관계자의 입장에서 되새기는 기회가 됐다”고 서혜림은 말한다. 따라서 그에게 건축은 결과에 집착하기보다 과정에서 비롯된 다양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일이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모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사이의 불완전함을 배우는 것이다.

건축은 다시 건물과 사람을 이어주며 또 다른 연대의 씨앗을 품는다. 이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며 공동의 배움을 일군 힘마건축의 일원들은 박기수(현 매스스터디스 공동대표), 김정임(현 서로아키텍츠 대표), 문훈(현 문훈발전소 대표) 등이다. 이들은 현재 한국 건축계를 이끄는 주요 인물로 활동 중이다. 2017년부터 3년간 서울시 교육청이 주관하는 학교 공간 디자인 혁신 사업을 총괄한 김정임이 이끌었던 ‘꿈담프로젝트(꿈을 담은 교실 프로젝트)’에서 20여년 사이 달라진 돌봄·교육 공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지원, 건축가의 작업 접근성을 확인한다. 어린이를 위한 공공공간의 사회적 인식이 불발된 이상으로만 남지 않고 물리적 실천을 겨냥한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꿈담프로젝트’ 같은 최근의 성취에서 서혜림이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에 담으려 한 소망이 가시화되어가는 걸 본다. 다양한 돌봄 공간, 모두가 누리는 질 좋은 교육 공간을 향해 우리 사회가 전진한다고 믿게 된다.

서혜림이 문훈과 공동 작업한 현대고등학교 별관(현정관)은 학교와 도시 경계를 뭉개지 않고 학생들에게 열린 외부 공간을 제공하려 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김종오 제공

서혜림이 문훈과 공동 작업한 현대고등학교 별관(현정관)은 학교와 도시 경계를 뭉개지 않고 학생들에게 열린 외부 공간을 제공하려 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김종오 제공

아이들과 외부인의 출입 동선 분리
안전 의식 부족했던 당시엔 ‘획기적’

■ 생동하는 것들로부터 배우다

힘마건축에 대한 세간의 비평은 주로 강렬한 형태를 두고 나온다. 서혜림은 그 형태가 공간의 다양한 열림과 내외부 연결을 추구하는 건축가 의지를 반영한 결과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 이후 진행한 현대고등학교 별관(현정관) 설계도 교육 공간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열림과 연결을 중시하는 그의 건축관을 반영한다.

건축가 문훈과 공동 작업한 이 건물은 학교와 도시의 경계를 뭉개지 않고서도 학생들에게 필요한 시설에다 열린 외부 공간을 제공하려 한 고민의 해법이다.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고등학교 건물 옥상정원의 녹지와 학생들이 자유롭게 접속하여 도시의 새로운 지대를 만드는 이 작업은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에 담으려 한 생동의 가치와 연결된다.

이후 파주출판단지 등에서 크고 작은 작업을 진행한 서혜림은 2000년대 중반 미국으로 돌아가 작업을 이어갔다. 10년 넘는 한국 공백기 끝에 작년 서울에 ‘힘마모바일아키텍처’를 개소했다. 힘마건축에서 힘마모바일아키텍처에 이르는 그 여정에는 어떤 마음의 변화가 담겼을까.

서혜림은 자연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 건축의 근본적인 행위에 의문을 품는다. 자연의 상황 혹은 도시가 처한 그때마다의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절하고 반응하는 유목하는 건축을 꿈꾼다.

이때 건축은 그가 배우고 실천해온 건물 형식만은 아니다. 사물이나 사용자 경험 디자인(User Experience Design) 등으로 번역한 건축이 될 수도 있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고 실험을 진행해가는 그의 건축은 여전히 젊고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하다.

거칠게 말해 1990년대부터 일련의 한국 건축을 견인해온 윤리성, 공공성과 같은 가치와 그것을 반영했던 비움의 공간 혹은 보이드(Void)는 서혜림의 작업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단정하고 규범적인 공간보다 틈과 구석으로 확장되는 불안정한 공간, 기 혹은 에너지가 넘쳐 흐르는 불온한 공간을 지향했던 그의 건축은 사색하는 정적인 공간에 손을 들어줬던 과거의 비평 혹은 비평의 관습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어린이 공간에 담으려 했으나, 그때는 잘 실현되지 못한 연결의 방식을 이제 이 사회는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서울에서 재출발하는 서혜림 건축가의 사무실 이름에 붙은 ‘모바일’은 안주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들, 땅으로부터 자유로운 건축을 계속 떠올리게 한다.

■정다영

[공감의 건축-또 다른 건축을 향해] 다양한 열림과 내외부 연결을 지향한 공간…돌봄 시설의 진화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 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 <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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