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는 디자인 없다…캠퍼스의 과거·미래 담는 ‘기획의 시간’

2022.05.31 20:39 입력 2022.05.31 22:30 수정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② 강미선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협곡을 닮은 ‘이화여대 캠퍼스 콤플렉스’(ECC)는 열린 공간이다. 지하 공간은 1930년대 세운 역사적 근대 건물의 기단부 역할을 한다. 지상은 학교 부지의 외부 경계와 매끄럽게 연결된다. 김용관 제공

협곡을 닮은 ‘이화여대 캠퍼스 콤플렉스’(ECC)는 열린 공간이다. 지하 공간은 1930년대 세운 역사적 근대 건물의 기단부 역할을 한다. 지상은 학교 부지의 외부 경계와 매끄럽게 연결된다. 김용관 제공

디올 패션쇼 무대로 화제 된 ECC
강 교수가 실무 총괄 ‘숨은 히어로’

■ 학교 건축, 패션쇼 무대가 되다

지난 4월30일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 콤플렉스(ECC)가 글로벌 패션 브랜드의 런웨이 무대로 변신했다. 협곡을 닮은 ECC의 열린 공간 ‘캠퍼스 밸리(Campus Valley)’에서 개최된 디올(Dior) 2022 가을 여성 컬렉션 쇼의 마지막은 이화여대 ‘학잠(학교 점퍼)’을 입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장식했다. “We Should All Be Feminists(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여야 한다)”라는 문구를 새긴 유명한 티셔츠의 디자이너인 그는 한국의 유서 깊은 여자 대학교에서 진행된 쇼에서도 특유의 정체성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철과 유리로 만든 차가운 캠퍼스 건축이 역동적인 스케이트보더들과 화려한 모델들이 거니는 열기의 장소가 됐다. 기존 건물이 새로운 설치·프로그램과 결합한 하이브리드 건축의 현장이었다.

지난 4월30일 ECC 밸리에서 열린 디올 2022 가을 여성 컬렉션 패션쇼 현장. 디올 공식 페이스북

지난 4월30일 ECC 밸리에서 열린 디올 2022 가을 여성 컬렉션 패션쇼 현장. 디올 공식 페이스북

한 달 만에 세계 236만명이 유튜브로 시청한 이 행사는 길이 250m 지하 공간인 ECC의 특성을 잘 활용했다. 설계자인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도 이런 ECC의 변화무쌍한 시도를 기대했을 것이다. ECC는 국제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국내 건축물 중에서도 독창적인 디자인에다 손꼽히는 완성도와 인지도를 가진 건물이다. 해외 유명 건축가가 그림만 넘겨주거나 건축주와의 소통 실패로 완전히 다른 건물이 되는 경우가 많은 현실에서 이례적인 결과다. ECC의 성공은 건축주인 이화여대가 건물 구상부터 완공까지 자체적으로 진행한 치밀한 건축 기획 과정의 역할이 컸다. 완공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동시대 건축’의 면모를 발휘하는 이유는 건물의 전체 생애 주기와 미래 가치를 건립 초기부터 염두에 둔 덕분이다.

건축가 공모·경제적 비용·상징성 등
설계 전 이뤄지는 모든 것 준비하고
‘어떻게 쓰일 것인가’ 미래 가치 고민

■ ECC 성공을 이끈 ‘건축 기획’ 과정

건축의 생애 주기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건축가가 안을 설계하고 물리적으로 실현하는 단계다. 주로 미디어에서 주목하는 건축의 시간이다. 설계안이 발표되고 화려한 완공식을 하기까지다. 하지만 건물을 지으려면 설계 이전에 주어진 사회·경제적 조건을 분석하고 구체적인 용도와 예산·일정 등을 도출하는 기획 단계가 필요하다. 디올 패션쇼가 열린 것처럼 건물 완공 이후 다양한 사용 방식을 고민·실행하는 운영 단계도 있다. 각 시간대에는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뿐만 아니라 다양한 건축 전문가가 협력한다. 이 긴 건축의 시간에서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 건축 기획이다. ECC에서는 그 과정을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인 강미선이 이끌었다.

강미선은 ECC 건립이 논의된 2003년부터 완공된 2008년까지 건축 실무를 총괄했다. 강미선과 실무위원회는 새로운 건물에 필요한 각종 공간 데이터를 찾고 이를 의사 결정 과정에 부쳐 설계 지침서에 반영했다. “건축 기획은 건축주의 학습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강미선은 건축주가 정확히 어떤 건축을 원하는지를 설명해야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고 강조한다. ECC의 경우 지형 분석, 공간 사용자인 학생 설문 조사뿐만 아니라 아카데믹 플랜과 캠퍼스 마스터플랜까지 수립했다. 그 과정에서 건물의 공공성뿐만 아니라 학교의 브랜드 가치와 수익성, 중장기 운영 방안을 검토했다. 건축주가 분명한 의견을 제시해야 건축가도 이에 대응한 창의적인 제안을 낼 수 있다. 하지만 보통 기획 과정은 생략되거나 간소화된다. 건축가에게 적절한 대가 없이 그 부담을 전가하는 경우도 많다. 모호한 지침과 불충분한 정보는 종종 어긋난 건축 결과로 이어진다.

2011년 ECC 밸리에서 열린 공연인 대음악회 현장. 이화여대 홈페이지

2011년 ECC 밸리에서 열린 공연인 대음악회 현장. 이화여대 홈페이지

2008년, 5년 만에 모습 드러낸 이곳
‘금남의 장소’와 바깥 자연스레 연결
전시·공연·집회…다양한 역할 소화
치밀하게 계획한 ‘현재진행형 공간’

■ 도시 공동체와 접속하는 지하 캠퍼스 건축

ECC는 새천년(2000년도)을 맞이한 대학의 공간 혁신 요구로 탄생했다. 경의선 복개가 사업 추진에 실질적인 힘을 실어줬다. 기찻길로 단절된 학교 진입부가 연결되면서 광장과 운동장이었던 공간을 지하 공간으로 바꾸는 사업이 추진됐다. 1935년 신촌 시대를 연 이화여대 캠퍼스는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학생들이 머물 수 있는 중심 공간이 없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ECC는 그 모든 학교 상황과 시대 요구를 해결해야 했다. 이 학교는 브랜드 효과를 극대화하려 국제 지명도가 높은 건축가를 초대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자하 하디드, FoA, 도미니크 페로를 설계 공모 건축가로 지명했다. 국제 설계 공모 경험이 거의 없던 시절 강미선 교수팀은 최선의 안을 뽑기 위한 절차를 마련했다. 이어 방대한 양의 지침서를 효과적인 형식으로 전달했다. 학교 공간위원회 주관으로 매주 진행한 총 32차례 회의 결과를 집약한 결과물이었다.

2004년 2월 도미니크 페로의 ‘캠퍼스 밸리’가 최종 당선됐다. 실용성과 상징성 모두 겸비한 수준 높은 제안이었다. 파이퍼홀(본관), 케이스홀(대학원관) 등 고딕 양식의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이 당선안의 현대적 면모와 대비되고, 지하로 파고드는 날카로운 형상이 권위적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강미선은 이런 문제에 적절히 대응하며 페로 팀과 국내 협력 설계사인 범건축, 시공사인 삼성물산 사이를 매개했다. 실시 설계와 시공 과정 중 건축주와 설계자 간의 조율도 계속됐다. 페로가 옥상에 제안한 프랑스 정원식 조경을 한국 수목과 조경 형식에 맞게 역제안한 게 일례다.

5년간의 기획-설계-시공 과정을 거쳐 모습을 드러낸 ECC는 국내 대학 캠퍼스의 새로운 전형이 됐다. 명실상부 캠퍼스 중심 공간이 된 이곳은 ‘지성의 금자탑’이나 ‘금남의 장소’라는 고정된 틀을 깨고 도시 공동체와 접속한다. 지하 공간은 1930년대 세운 역사적 근대 건물의 기단부가 되고, 학교 부지의 외부 경계와 매끄럽게 연결된다. 캠퍼스 밸리가 도시를 향해 열려 있다. 개장 초기 우려했던 건물의 지나친 상업화가 무색해 보인다. 예술 전용 영화관 아트하우스모모나 커피숍 같은 상업 공간들이 교육시설인 ECC의 완충 역할을 한다. 학생들이 밸리를 전시나 공연으로 채우고 시민들과 함께 집회의 장소로 만들기도 했다. 정원이 된 ECC 옥상면은 학생과 교직원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산책 장소로 인기다. 강미선은 기획 단계에 설정한 건축 예산·일정을 거의 맞춘 것도 자부한다.

강미선

강미선

■ 건축의 생애 주기 고려하는 기획가의 역할

ECC 이후 강미선은 건축 기획가로서 경험을 살려 2019년 서울 마곡지구에 신축한 이대서울병원 건립 사업의 건축 본부장을 지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병원인 ‘보구녀관’을 모태로 삼는 이곳은 ECC보다 규모가 크다. ‘의료’라는 더 전문적인 기능을 담고 있다. 그만큼 설계자인 정림건축과 건축주인 이화여대 사이를 조율하는 커뮤니케이터 역할이 필수였다. 이 임무를 완수한 그는 최근 국립중앙의료원 이전 사업 총괄 계획가로 임명돼 관련 작업을 진행 중이다. 건물의 경제적 가치가 강화되고 그것이 처한 사회적 환경과 이해 관계가 점점 더 복잡해지는 오늘날 건축 기획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강미선이 건축 기획에 집중하게 된 것은 설계사무소에서 실무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작은 규모의 건축 설계를 직접 진행하는 건축사이기도 한 그는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을 때도 설계보다 사업 타당성 분석 같은 기획 업무를 맡았다. 그는 당시 국내에 막 도입된 애플 컴퓨터의 엑셀로 분석 작업을 진행하곤 했다. 건축이 이루어지는 제반 조건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된 그는 건축의 피지빌리티(Feasibility, 사업성이나 경제성) 분석을 주제로 1997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돈 이야기를 터부시한 당시 건축계 분위기를 생각하면 도전적인 논문 주제다. 강미선은 “건축의 사업성과 경제성을 주제로 논문을 썼을 때 주변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고 회상했다.

강미선이 학위를 받았던 1990년대 말은 건축에서도 해외 자본 유입이 거세지고 부동산 개발이 본격화된 시기다. 건축의 상품 가치가 높아지면서 아파트도 브랜드명을 달기 시작한 때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강미선의 행보는 자본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자본에 차분히 대응하는 건축의 힘을 모색하는 일이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건축이 부르주아 예술 혹은 부동산 투기 양극단에 놓인 상황을 실리적으로 좁히는 역할을 계속해왔다.

수많은 이들의 협력으로 완성되는 건축은 건축가의 디자인 역량이 발휘되는 설계 행위뿐만 아니라 이를 받쳐주는 적법한 사회 제도가 필수다. 건축 기획 과정은 제도를 강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강미선은 국가건축정책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정책 기구 위원으로 활동하며 공공건축을 만들 때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에 명시된 ‘건축 기획’ 과정을 반드시 거치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데 힘썼다.

개인 삶의 공간을 기획하는 일에도 관심을 뒀다. 여러 세대가 함께 사용하는 공유 별장인 제주 ‘고산집’은 강미선이 함께 사는 대안적 방식을 고민한 작은 성과다. 여러 장소를 각자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장소를 시간을 매개로 점유하는 방식이다. 더 나아가 여성 조합원으로만 구성된 협동조합을 조직해 고령자 공동체 주거와 여성의 노후 돌봄 공간을 탐색하며 다양한 주거 생태계를 살핀다. 그는 거시적 관점에서 이뤄지는 제도 개선만큼 개인의 배움과 경험으로 사회를 바꿔가는 건축의 실천적 힘을 믿는다.

이화여대도 ECC를 중심으로 다양한 시간대에 세운 건물들이 동심원으로 배치된 체계적인 풍경의 장소가 되어간다. 그 자체가 강미선이 학생들에게 강조해온 사회 변화와 함께 나아가는 건축의 힘이다.

이화여대에서 건축 기획에다 주거학, 젠더와 공간 등을 강의하는 강미선은 자연스럽게 공간 소비자가 아닌 공간의 생산자로서 여성을 주목한다. 신촌 캠퍼스의 물리적 변화야말로 여성의 주체성을 담보한 역사적 학습 공간의 시공간적 확장을 보여준다. 세계를 향한 환대의 장소로 기획된 ECC는 주사용자인 여성의 급진적인 공간 의지를 상징한다. 강미선이 긴 시간 참여한 ECC는 공간 소비자인 이화여대 학생들이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공간 생산자가 될 기회를 열어준다.

디올 패션쇼처럼 그곳에서 열린 뜻밖의 사건은 학생들을 자극했다. ECC가 근본적으로 학교 시설이기에 보수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캠퍼스 밸리에서는 학생들이 주도할 활발한 공간 실천을 기대한다. 그것은 전시나 공연 같은 형식일 수 있고, 그간의 공간 사용법을 전복하는 비평적 형식일 수 있다. 이때 ECC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랜드마크가 아니라 사용자가 이끄는 공간 설계의 재료가 된다.

기획과 운영을 포함한 건축 설계 전후에 놓인 다양한 과정도 건축을 구성한다면, 건축 행위에 참여하는 이들을 건축가로만 한정할 수 없다. 건축을 물리적인 구축 전후를 포함한 긴 지속 시간으로 본다면 우리가 그간 생각했던 건축에 관한 정의도 바뀔 것이다. 건축주와 건축가, 사용자가 만드는 건축의 시간은 어떻게 균형을 잡고 흘러갈 수 있을까. 각자 전문성과 차이를 존중하면서 우리 모두가 공간 생산자로 참여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좋은 건축물 생산을 위해 필요하다.

■정다영

[공감의 건축-또 다른 건축을 향해] 이유 없는 디자인 없다…캠퍼스의 과거·미래 담는 ‘기획의 시간’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 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 <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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