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소란에서 완전히 해방…섬세하게 조율된 ‘단절의 세계’

2022.08.23 22:35 입력 2022.08.25 11:07 수정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⑤ 정수진 에스아이 건축사사무소 대표, 판교 단독주택

정수진 건축가가 2011년 선보인 판교 ‘하늘집’ 외관. 외부 벽면은 창 없이 단호한 모습이다. 남궁선 제공

정수진 건축가가 2011년 선보인 판교 ‘하늘집’ 외관. 외부 벽면은 창 없이 단호한 모습이다. 남궁선 제공

‘21세기판 주택전람회 단지’ 서판교서
2011년 정 대표가 설계한 ‘하늘집’
창 없이 무표정한 외벽은 생경했지만
규격화된 필지들 속 대세로 자리잡아

1993년 3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한국 건축사에 획을 그은 주택 전시 ‘한국의 주거문화 1994년’이 열렸다. 국내 대표 건축가 21인이 참여해 ‘새로운 주거문화의 창조’를 주제로 진행됐다. 1기 신도시 분당 건설을 맞아 토지개발공사(현 LH)가 주관하고 국토개발연구원이 기획해 선보인 야심찬 시범 사업이었다.

‘주택전람회단지’ ‘작품타운’이라 불린 이 집들은 몇 년 후 분양됐다. 설계안이 실제 건물이 되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건축주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건축가가 다가오는 21세기 라이프스타일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기획의 난점이 있었다. 건축가의 이상과 이를 뒷받침하는 자본과 기술의 간극도 컸다. 시간의 힘 때문일까. 20여년이 흐른 지금 주택전람회단지는 아파트 일색인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안에서 이색적인 주거 단지로 평온하게 자리하고 있다.

하늘집 중정과 내부 공간. 남궁선 제공

하늘집 중정과 내부 공간. 남궁선 제공

땅 한가운데 마당 있는 ‘중정형 주택’
단정한 외관과 달리 역동적 내부 반전
건축물 맞춤 인테리어까지 구획 정리
부엌 가구·수납장 등 붙박이로 일체감

■ 중정형 주택, 판교를 사로잡다

분당에 이어 2기 신도시로 조성된 판교의 단독주택지구도 초기 날선 모습에서 보통의 사람 사는 동네처럼 느슨해졌다.

판교 서쪽 2000여개의 대규모 단독주택필지는 집 짓는 이라면 가봐야 할 주택전람회단지의 21세기 확장판 같은 곳이었다. 세계 금융위기가 일어나고 아파트 시장이 다소 축소되었던 2010년 초 이곳은 건축가들의 작품 발표장처럼 보였다.

건축사무소 에스아이 대표인 정수진은 서판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다수의 주택 작업을 지속해온 몇 안 되는 건축가다. 이곳의 집짓기 열풍 속에서 건축주의 신뢰와 지지를 계속 받기란 쉽지 않다. 정수진은 판교에서 2011년 ‘하늘집’을 시작으로 2022년 ‘동굴집’까지 총 10채를 설계했다. 하늘집은 서판교에서 처음 선보인 중정형 단독주택이다. 그는 땅 한가운데 마당을 둔 하늘집의 형식을 조금씩 변주하며 이후 주택 작업에도 적용했다.

올해 선보인 동굴집 1층(위)과 외관. 남궁선 제공

올해 선보인 동굴집 1층(위)과 외관. 남궁선 제공

초기 그가 설계한 중정형 집들은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대부분 비어 있던 택지지구 안에서 창 없이 놓인 무표정한 외부 벽면은 생경했다. 하지만 지금 중정형 주택은 대세가 됐다. 80여평으로 규격화된 필지가 바둑판처럼 맞댄 상황에서 선택한 최적의 해법이었다. 외부 담장을 설치하지 말라는 지구단위계획 지침을 비튼 전략이었다. 판교에는 이웃과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담장 설치를 금지했다. 하지만 전원이 아닌 개인 생활을 중시하는 40대 젊은 건축주가 많은 판교에서 이 지침은 실효성이 없었다. 멋진 앞마당과 가로변의 넓은 창은 때때로 외부 시선에 시달렸다.

정수진은 이러한 도시 생활의 어려움을 잘 이해했다. 단호한 외관이지만 내부는 마당을 향해 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집은 안팎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사암과 벽돌 등 한두 가지 재료로만 마감한 외부 벽면을 따라 단정한 건물 볼륨이 강조된다. 반면 내부는 역동적인 기운이 가득하다. 중정이 복도를 따라 움직이는 흐름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전은 외부와 내부를 매끄럽게 단절시키며 집 안에 들어온 순간 깊은 해방감을 선사한다.

매일이 연결된 ‘피로사회’ 속 현대인
차분히 숨 고르기 할 수 있게 도와줘

■ 치밀하게 계획된 은신처

정수진은 현관, 복도, 화장실처럼 집에서 덜 주목받는 곳에 관심 있다. 물론 거실·안방과 같은 집의 기능적 중심이 되는 곳들을 충실히 조직한 이후에 고려한다. 이 부차적 공간들을 드러내기 위해 벽, 기둥, 바닥, 천장과 같은 건축의 기본 뼈대를 잘 짜고 인테리어도 직접 한다. 건축 디테일과 생활감을 끼워 맞춘다. 부엌 가구나 옷장, 책장을 비롯, 각종 수납장은 붙박이로 제작한다. 다종다양한 사물들을 숨기고 건축 구조와 일체화하기 위해서다. 식탁처럼 공간 분위기를 장악하는 중요한 가구도 경우에 따라 직접 제작한다. 그는 집에 맞춰 본인이 만든 가구들을 “건축적 가구”라 부른다. 그가 디자인회사 디.에스아이를 별도 설립한 것도 적극적으로 가구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다. 건축가가 가구도 직접 다루다보니 건축과 인테리어가 충돌하지 않고 부드럽게 정리된다. 그 결과 공간을 구획하는 선들은 또렷하고 깔끔하다. 그런 선이 만나는 벽면은 정갈한 스크린 같다. 작품을 집중해서 볼 수 있도록 미술관이 고안한 현대적 장치가 ‘화이트 큐브’인 것처럼 정돈된 흰 벽면 위에 빛과 그림자가 차분히 스며든다. 자연이 선사한 이러한 미디어 작품들은 현관에서 숨을 고를 때, 주방일을 하다 고개를 잠시 들 때,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는 무용의 순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집이 다양한 종류의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은신처가 되길 바란다. 집 바깥에서 업무를 보고 들어온 사람, 집 안에서 돌봄 노동을 한 이들 모두가 그가 치밀하게 설계한 무용한 장소에서 안식을 얻길 바란다. 이 집은 매일이 지나치게 연결된 현대인들에게 의도적인 단절의 감각을 선사한다. 낯설어 보였던 그의 배치 방식은 피로사회에 잠긴 도시인의 행태를 고민한 섬세한 제스처였다.

■ 작가주택이 처한 딜레마

집은 건축의 기본 단위로 불리지만 건축사 연구의 진지한 대상이 되기 쉽지 않다. 작년에 발간된 박철수 교수의 <한국주택 유전자>가 한국 주거사를 집대성했지만 민간 단독주택은 아직 공백이 많다. 아파트가 지금처럼 유행하기 전 이른바 ‘작가주택’들이 잡지에 자주 실렸지만 그것이 우리 주택의 담론과 지식을 체계적으로 쌓아준 것도 아니다. 2021년 기준 주택건설 실적에서 단독주택은 10% 정도로 실천이 미약한 만큼 연구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웃한 일본이 단독주택으로 국제 건축계를 휩쓴 것과는 다르다. 건축을 독학한 안도 다다오는 ‘스미요시 주택’으로 세계를 사로잡았다. 일본 도쿄근대미술관, 영국 바비칸센터, 이탈리아 국립21세기미술관과 공동 주최한 기념비적 전시 ‘일본의 집: 1945년 이후 일본의 건축과 삶’(The Japanese House: Architecture and Life after 1945)은 유럽과 일본을 순회하고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웃 나라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도 시대별 삶의 형식을 수집하고 조망하기 위해 단독주택을 공동 연구 대상으로 놓아야 한다. 주택에 담긴 삶의 내용은 사생활로 보호하되 집이라는 형식이 개인 자산과 소비 대상으로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현대건축의 선언과 같은 르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는 이러한 집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빌라 사보아는 수평창과 필로티 등 ‘현대 건축의 5원칙’을 반영한 상징적 건물이다. 하지만 동시에 비가 끊임없이 새는 불편한 집으로 건축주의 혹독한 비난에 시달렸다. ‘건축’으로서의 집과 개인 삶을 반영하는 집은 이렇듯 간혹 불화한다. 르코르뷔지에조차 이 두 개를 동시에 만족시키지 못했다. 한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건축가의 열망이 앞선 일부 작가주택들은 사용자의 생활 양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2010년 이후 주택이 대면하는 사회적 양상이 달라졌다. 건축평론가 박정현은 ‘집의 가능성을 열다’라는 글에서 “취향과 욕망의 전시가 펼쳐지는 라이프스타일의 실제 현장에 관한 관심, 아파트와 다른 주거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에 관한 관심, 이를 가능케 하는 금융 모델에 대한 호기심이 전면에 나서면 건축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게 마련”이라고 썼다. 오늘날 집은 소셜미디어에서 취향을 견인하는 이미지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택의 프로그램, 배치, 구조, 공간, 질감과 같은 건축적 문제를 논하기가 쉽지 않게 됐다. 과거의 작가주택이 어쩔 수 없이 부족한 물적 토대와 타협했다면, 지금 건축가의 집은 디지털 플랫폼에 제 목소리를 뺏기고 있다. 예비 건축주들도 디지털 정보를 수집하는 데 탁월하다. 그들이 모은 집짓기 정보들은 의뢰한 건축가에게 부단히 제시된다. 이러한 건축주의 정보 습득력이야말로 정수진이 지난 10년 동안 판교에서 집을 지으며 느낀 가장 큰 변화다. 이제 건축가는 건축주와의 직접적인 불화보다 집을 둘러싼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제 길을 잃지 않는 법을 찾아야 한다.

정수진

정수진

■ 좋은 주택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다

집 짓는 일은 건축가, 건축주, 시공사라는 삼각 체계를 단단하게 유지하는 일이다. 이 구도에서 정수진의 집은 건축의 기본 화두를 놓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가 판교주택과 같은 도심형 주택을 설계할 때 우선 고려하는 것이 건축주의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말한 만큼 그는 작가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확신하는 집의 어떤 건축적 순간을 만들기 위해 쉽게 타협하지 않는 꼿꼿함이 있다. 때로 건축주에게 낯설지만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공간 형식들을 과감히 제시하기도 한다. 건축주도 건축가의 뜻에 따라 그 공간들을 차근차근 소화해 나간다.

본인이 설계한 집들이 공동체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냐는 질문에 정수진은 “좋은 건축”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그는 좋은 집을 만드는 노력 안에 공공건축에 버금가는 가치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좋은 건축은 잘 지은 집이다. 지금 같은 기후위기 시대에 쉽게 낡지 않고 오래 남는 집이다. 디지털 환경에 포위당하더라도 잘 지은 물리적 장소를 대체할 수 없다. 그는 건축 본연의 구축적 가치를 탐구하고, 잘 짓는 방식을 실험하며, 삶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공간을 창조하는 데 힘쓴다. 이런 행위가 자연스레 건축 전반의 격을 높인다.

지금 그의 관심은 집의 다른 유형들로 향해 있다. 4인 가구가 계속 줄어들고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 해체되는 오늘날 판교주택은 분명 멀지 않은 과거와 오늘과 같은 특정 시기를 반영하는 삶의 형식이다. 최근 정수진은 전원주택, 상가주택, 주택 리노베이션뿐 아니라 집의 변종이라고 할 수 있는 숙박업소(스테이)를 작업하는 중이다. 또 다른 그의 바람은 예술 작품의 집인 미술관 설계다.

■ 삶의 여지를 되찾는 단절의 시간

비록 누추한 집이지만 판교주택에서 그가 강조한 공간감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정수진은 이렇게 답했다. “버려라, 집어넣어라, 유지하라.” 합리성과 감수성을 모두 겸비한 이 건축가는 집을 비우고 유지하며 돌보는 힘이 삶의 여지를 되찾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집에 돌아와 팔을 걷어붙였다.

집에는 혼자 울 곳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건축가 김중업은 계단 밑의 쓸모없는 그늘진 공간을 아꼈다고 전해진다. 김중업이 말한 계단 아래 공간은 정수진이 말한 복도나 현관과 다름없다. 집에 계단이나 복도라고 할 만한 공간이 없는 나는 서재와 붙은 베란다에 쌓아둔 잡동사니를 내다버리고 벽면 색깔과 길이와 딱 맞는 벤치를 찾아 놓았다. 집 안에 가족과 함께 있었지만 그 자리에 앉아보니 일상의 소란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정수진과 나눈 집의 대화 덕분에 끊임없이 연결되어 내 관심을 빼앗는 친밀한 적들로부터 잠시 해방되었다. 홀로 자유로운 단절의 시간이 여기에 있다.

■정다영

[공감의 건축-또 다른 건축을 향해] 일상의 소란에서 완전히 해방…섬세하게 조율된 ‘단절의 세계’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 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 <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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