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질 공간을 디지털로 다시 짓다

2022.07.26 22:13 입력 2022.07.27 18:45 수정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④ 황지은 테크캡슐 대표, 반포주공아파트 3D공간기록 프로젝트

청계천 일대 공장 디지털 복원 과정 이미지. 청계천 일대 도심제조업 기록화 사업. 테크캡슐 제공

청계천 일대 공장 디지털 복원 과정 이미지. 청계천 일대 도심제조업 기록화 사업. 테크캡슐 제공

도시의 사회적 이슈를 기술과 엮어
가상현실 영상 제작과 연구에 집중

2022년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는 색다른 시점에서 촬영한 장소들이 등장한다. 개미처럼 인간보다 작은 생물의 시선이나 드론같이 인간 눈보다 높고 넓은 시야로 촬영한 다양한 시점숏은 영화 속 공간을 새롭게 보게 한다. 특히 영화 말미의 바다 드론숏은 이야기의 절정을 이끈다. 이때 바다라는 공간은 우리가 실제 바라보던 익숙한 모습과는 다르다. 조감의 시선에서 포착해 평평해진 바다 이미지는 정보화된 구성물이 된다. 아이폰, 애플워치와 같은 디지털 기기는 두 주인공을 잇는 교감의 매개체이자 그들의 궤적을 기록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차가운 기술이 이야기의 그물을 치고 관객의 감성을 뜨겁게 흔든다.

이처럼 디지털 기술은 우리 일상환경을 새롭게 인지시킨다. 도시·건축 분야에서 디지털 기술은 물리적 환경을 다양한 형식으로 가공해 연구나 설계를 위한 지식을 제공한다. 점점 상용화되는 공간정보 기술은 국토지리 단위와 건축 단위를 통합하고 정보 간극을 좁히고 있다.

황지은

황지은

■ 컴퓨터 신동, 디지털 건축연구자가 되다

테크캡슐 대표이자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인 황지은은 디지털 건축 정보 분야의 중요한 연구자다. CAD(Computer-Aided Design)와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 등 건축설계 분야의 디지털 연구와 실천은 나름 역사가 깊다. 하지만 황지은처럼 디지털 기술을 우리 도시 환경을 둘러싼 사회적 이슈와 엮어서 활용하는 이는 많지 않다. 건축과 실내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1997년 간삼건축에서 실무를 시작했다. ‘컴퓨터 신동’이란 별명을 얻은 신입사원이었다.

컴퓨터를 이용한 건축설계(CAD)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지 10년도 되지 않은 때다. 제도판 위에서 손으로 도면을 그리던 건축가들이 컴퓨터를 익혀 디자인을 시작하던 시기다. 사내에서 그는 국내 1호 여성 건축사였던 간삼건축 공동대표 지순에게 CAD를 알려주기도 했다. 실무 후 대학원에서 건축설계의 컴퓨터 활용을 넘어선 디지털 건축 연구로 관심을 확장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머신러닝 접근으로 도시 형태를 해석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 서울시립대학교 교수가 된 후 지금까지 건축과 디지털을 주제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부임 초기만 해도 디지털보다 ‘건축과 컴퓨터’처럼 컴퓨터라는 이름이 강의명으로 흔히 사용되던 때였다. 소프트웨어 사용 방식과 활용에 집중된 교육이었다. 사회인식 변화와 기술발전에 따라 지금은 디지털 패브리케이션, 디지털 미디어 등으로 수업 주제도 확장되었다.

■ 학교를 넘어 도시 현장 속 실천으로

황지은의 연구가 학교뿐만 아니라 도시 현장으로 본격 펼쳐진 계기는 2017년 세운상가에서 열린 ‘생산도시’ 전시다. 서울시가 주최한 제1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일환으로 건축가 강예린과 공동기획한 프로그램이다. 황지은은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신제조업 무대로 세운상가를 새롭게 선보였다. 비슷한 시기 세운상가 안에 지역 공동체와 상생하는 혁신적 교육 공간으로 기획된 서울시립대 ‘세운캠퍼스’의 교장도 맡았다.

도심제조업의 메카였던 세운상가 일대를 거점 삼아 기계가 구동하는 과거 기술과 디지털 기반의 새로운 기술을 접목해 도시건축 환경을 탐색하고 재창안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했다. 이런 실천들을 토대로 2018년 대학의 벤처창업 지원을 받아 테크캡슐을 설립했다. “사회적 가치를 담은 공간 기반 콘텐츠 미디어 창작 그룹”을 표방한 테크캡슐은 디지털 패브리케이션, 도시·건축 공간 정보화, VR 영상제작 등의 작업을 하고 있다. 작가와 미술관, 정부기관과 연구소 등 다양한 주체와 협력해 연구·전시 활동을 진행 중이다.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 건물 3D스캔 이미지. 반포주공아파트 3D공간기록 프로젝트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 건물 3D스캔 이미지. 반포주공아파트 3D공간기록 프로젝트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청계천 일대
재건축·개발로 사라지게 될 실체를
축적된 시공간 정보 토대로 입체화
가상 플랫폼 무대 위에 ‘재건축’

■ 사라지는 삶의 공간을 디지털로 재건하다

최근 테크캡슐은 가상현실(VR) 영상 제작과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업이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1·2·4 주구) 3D공간기록화 프로젝트다. 지난 약 6개월 동안 진행한 프로젝트는 재건축으로 철거될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를 다양한 디지털 기술로 기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대중과 건축 전문가 등 여러 층위의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를 준비 중이다.

이 프로젝트는 사라지는 현대건축 유산에 대한 건축정보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남서울아파트’라는 이름으로 분양된 반포주공아파트는 한국 현대 주거사의 한 시대를 증거하는 중요한 장소다. 부지 규모만 48만4000여평, 3590가구에 이르는 서울 강남 개발의 효시가 된 상징적인 곳이다. 대한주택공사가 지은 주공 아파트가 대부분 사라지는 가운데 얼마 남지 않은 대규모 단지다. 부동산이나 도시사회학적으로는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건축적으로 깊이 탐구할 기회는 적었다. 철거 이후라도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한 재건축조합과 시공사인 현대건설의 협조를 통해 작업이 성사됐다.

또한 저층 판상형 아파트라는 획일적이면서 반복적인 유닛은 역설적으로 디지털 공간정보 생성능력을 시험하고 구동해볼 수 있는 좋은 무대다. 이 프로젝트에 드론레이서 등 기술친화적인 협력자들이 선뜻 함께한 것도 이런 매력 때문이다. 건축사적 의미뿐 아니라 건축을 매체화하는 기술적 측면 양쪽에서 이 작업의 가치가 있다. 테크캡슐은 중산층 대단지 아파트의 기폭제가 된 이곳에 축적된 시공간 정보들을 마치 유전자 정보를 취합하듯 이끌어냈다. 다양한 자료도 참고하고 인터뷰로도 보완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발행한 서울생활문화 자료조사 보고서 <반포본동>은 훌륭한 사전 자료였다. 그 연구에 나온 아파트 평형별 대표 유형들을 추출하고 초기 원형을 간직한 집을 섭외해 촬영했다. 3590가구 중 단 60가구만 있는 60평대 복층형이 독특한 사례였다. 드론과 3D레이저 스캐너를 활용한 3D공간정보, 자율주행 자동차 개발 시 활용되는 SLAM(동시 위치추적 및 지도작성 기술)과 같은 기술을 통해 기록된 데이터는 VR플랫폼 위에 병합됐다. 섬세한 기술장치로 정밀하게 기록된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 VR은 도면과 사진으로는 보기 힘든 입체적 장면들을 시각화한다. 여기에 위치와 형상정보도 남겨진다.

테크캡슐은 향후 추가 작업을 통해 도시계획적 관점부터 원주민의 이야기도 함께 담아 반포주공아파트를 더 풍부하게 정보화하고자 한다. 데이터들은 건축적 연구가치는 물론 게임과 영화, 전시 등 다양한 매체로 재탄생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데이터는 반포주공아파트가 고향인 ‘아파트 키즈’에게 고향의 생전 모습을 담은 소중한 기록이다. 세상을 떠난 그리운 이들을 디지털로 재현했던 VR 다큐멘터리 TV프로그램처럼, 누군가에게 평생 거주지였던 장소를 VR플랫폼을 통해 생생하게 만날 수 있게 할 것이다. 연고가 없는 사람이라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한국 주거의 중요 단면을 간접 경험·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감성적 측면 외에도 이 프로젝트는 아파트 하부 배수관 등 이른바 건축의 동맥과 같은 연결 부위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건축 인프라를 시각화해 주거 공간의 유기적 체계를 짐작할 수 있다. 마치 <헤어질 결심>의 다양한 시점숏처럼 우리가 그간 보지 못한 시선의 층을 열어 도시건축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일깨운다. 이 시선의 경험은 분명 실제 건물을 짓는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정밀한 배치 정보는 미래 주거 공간 설계를 위해 참조하는 공유 정보가 될 것이다.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 드론 3D스캔 이미지. 반포주공아파트 3D공간기록 프로젝트. 테크캡슐 제공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 드론 3D스캔 이미지. 반포주공아파트 3D공간기록 프로젝트. 테크캡슐 제공

■ 상호협력 통해 구축되는 디지털 도시공간

반포주공아파트 프로젝트가 테크캡슐의 자발적인 장기 프로젝트라면 최근 마무리된 청계천 일대 도심제조업 기록화 사업은 서울시 의뢰를 받은 연구사업이다. 이 두 작업은 대상지가 다르지만 속성이나 방법론은 공명하는 지점이 많다. 두 장소 모두 재건축과 재개발로 곧 사라진다. 또 대상지 탄생 시점과 조사 규모도 비슷하다. 반포주공아파트가 1970년대 서울의 대규모 신생 주거지라면, 청계천·을지로 일대는 대표적 도심제조업 지구다. 두 작업 모두 ‘근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동체 규모다. 건축이 주변 도시 조건과 관계 맺는 방식을 잘 살필 수 있는 적정 크기다.

테크캡슐은 기존 연구에서 잘 포착하지 못한 기계상가 속 골목을 3D스캔하고 영상으로 만들었다. 인문조사(장소기억프로젝트)와 건물 실측조사(구가도시건축) 전문가들과 협력했다. 디지털 기술은 그 자체보다 누구와 함께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테크캡슐은 디지털 기술로 다양한 레벨과 체계의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보자기 같은 네트워크 판을 만들었다. 상호협력 과정을 통해 세운상가 일대가 디지털 정보로 재구축된 것이다.

역사가 될 한국 주거의 주요한 단면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이 될 공간들
VR 새 옷 입은 영원한 건축물로 남겨

■ 허무는 집을 다시 짓는 건축가

반포주공아파트, 청계천 일대 기록화 작업에서 황지은은 사라지는 물리적 실체를 가상무대에 디지털로 짓는다. 그는 ‘허무는 집’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건축가다. 건축에서 VR은 대체로 지어질 공간을 미리 보여주는 매체로 활용됐다. 하지만 황지은의 작업은 반대다. 그에게 VR은 사라질 공간을 전과 다르게 보기 위한 것이다. 그의 건축 여정은 건물이 땅을 벗어나면서 시작된다. 디지털이라는 새 옷을 입은 건축은 다른 활용과 접속을 기다리는 독립된 정보로 남는다.

건축 분야의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며 건축가들도 설계 과정에서 도면·모형과 같은 물리적 매체 대신 무수히 많은 디지털 파일을 생산·전송한다. 건축주와는 디지털 렌더링을 보며 협의한다. 대중들도 유튜브 영상이나 온라인 전시를 통해 건축물을 감상한다. 무겁고 단단했던 건축이라는 사물이 디지털 세상 속을 유영하는 비물질적인 것이 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더 가속화되는 이런 추세 속에서 건축을 디지털로 번역하고 매개하는 전문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황지은은 디지털이라는 영토에서 건물을 짓기 위해 고속도로와 같은 인프라를 먼저 닦는, 가상공간에서 건축의 자리를 확장해가는 또 다른 건축가다. 그가 펼칠 디지털 그물망이 어떤 모습일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 밀도가 더욱 촘촘해지리란 믿음이 있다. 디지털 렌즈를 장착한 건축이 만들어낼 또렷한 해상도의 미래가 궁금하다.

■정다영

[공감의 건축-또 다른 건축을 향해] 허물어질 공간을 디지털로 다시 짓다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 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 <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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