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미방에서 마주한 가미카제 병사의 유령···“끝나지 않은 과거는 미래에 돌아온다”

2024.06.25 17:40 입력 2024.06.27 13:45 수정

아트선재센터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

가미카제 병사들이 마지막 연회 별인 료칸 재현

입체적 사운드로 만나는 ‘얼굴없는 유령’

일본 제국주의와 아시아 근대성 탐구한 영상 작품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의 ‘호텔 아포리아’의 전시 전경. 이영경 기자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의 ‘호텔 아포리아’의 전시 전경. 이영경 기자

일본 아이치현 도요타시에 지어진 일본 전통 여관(료칸)인 기라쿠테이. ‘기’는 기쁨을, ‘라쿠’는 쾌락을, ‘테이’는 집을 의미한다. 기라쿠테이는 그저 운치있는 오래된 여관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쁨보다는 슬픔에 가까웠다. 일본 가미카제 특수공격부대 중 하나인 구사나기 부대가 출격 전 연회를 벌이던 곳이었다. 조종사들은 ‘자살 공격’을 위해 오키나와로 출발하기 전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구사나기 부대의 병사들은 총 네 차례 오키나와로 출격했다. 63명의 젊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한 병사는 출격 전 부모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저를 보러 와주십시오. 선물은 가져올 필요 없습니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싱가포르 미디어아티스트·영화감독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는 관람객들을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패전이 기운이 짙던 일본의 기라쿠테이 여관으로 데려간다. ‘호텔 아포리아’가 설치된 전시장 2층, 칠흙같이 어두운 공간에 설치된 6개의 다다미방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순간, 관람객들은 시공간을 이동해 과거의 유령과 마주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때이른 무더위에 달궈진 몸이 식다 못해 뒷골이 서늘해진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의 ‘호텔 아포리아’의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제공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의 ‘호텔 아포리아’의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제공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의 ‘호텔 아포리아’의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제공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의 ‘호텔 아포리아’의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제공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건 6개의 다다미방에서 상영되는 6채널 영상,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가는 거대한 팬, 등 뒤에서도 소리가 들리는 듯한 24채널 사운드다. 마치 4D로 작품을 체험하는 것과 같다. 호추니엔은 6개의 영상에서 가미카제 특수공격부대 병사들, 기라쿠테이 당시 여주인, 이들에게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교토학파 사상가들, 전쟁 선전물을 만들었던 일본의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와 만화가 요쿄야마 류이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의 ‘호텔 아포리아’의 전시 전경. 이영경 기자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의 ‘호텔 아포리아’의 전시 전경. 이영경 기자

영상 속 등장인물의 얼굴은 지워져 윤곽밖에 보이지 않는다. 유령을 보는 듯 섬뜩하다. 24채널을 통해 들려오는 겹겹의 사운드는 마치 공중을 부유하는 유령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천천히 돌아가는 거대한 팬에서 나오는 바람 역시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고 형체도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바람의 존재는 청산되지 못한 과거, 현재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은유와 같다.

‘호텔 아포리아’는 2019년 일본 아이치트리엔날레에서 선보인 작품으로 기라쿠테이 건물에서 상영됐다. 큐레이터 요코 노세로부터 기라쿠테이 공간에서 전시할 장소 특정적 작품을 제안받고선, 제2차 세계대전과 긴밀하게 연결된 기라쿠테이의 역사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을 만들었다. 호추니엔은 “끝나지 않은 역사는 미래에 돌아오기 때문에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의 ‘시간(타임)의 티’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제공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의 ‘시간(타임)의 티’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제공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의 ‘타임피스’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제공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의 ‘타임피스’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제공

호추니엔은 아시아의 근대성을 탐구하는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그가 특히 주목한 시간대는 1942~45년 일제패망기다. 이 시기에 일본이 자신이 점령하고 있던 식민지 국가의 시간대를 하나로 통일했다. 호추니엔은 일제의 시간대 통일이 동남아시아를 하나로 묶으며 ‘시간의 공간화’를 이룸과 동시에 새로운 시간을 창출했다고 봤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신작 ‘시간(타임)의 티’와 ‘타임 피스’에선 근대성과 시간에 대한 고찰을 선보인다. 1초, 24시간, 165년(해왕성의 공전 주기) 등 서로 다른 시간성을 43개 모티터를 통해 보여주는 ‘시간의 티’ 옆에 시간에 대한 다양한 고찰과 이야기를 엮은 영상 ‘타임피스’를 볼 수 있다. ‘타임피스’에선 남북의 이야기도 나온다. 북한은 2015년 “사악한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의 표준시간까지 빼앗는 천인공노할 범죄행위를 감행하였다”며 북한의 표준 시간대를 한국, 일본 등 이웃 국가보다 30분 늦게 맞춘다. 2년 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은 다시 남한과 같은 시간대로 돌린다.

흥미로운 것은 ‘호텔 아포리아’와 ‘시간의 티’ 두 작품에 모두 등장하는 일본의 전설적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이야기다. 카메라를 다다미에 앉은 사람의 키높이로 맞춘 ‘다다미 쇼트’로 유명한 야스지로는 전쟁 선전 영상을 만들었으며, 전후엔 전쟁의 상흔이 담긴 작품을 남겼다. ‘호텔 아포리아’엔 야스지로가 만든 제2차 세계대전 기록영화 <만춘>이 영상에 나온다. <만춘>의 마지막 장면을 애니메이션화 한 장면을 ‘시간의 티’에서도 볼 수 있다. 딸을 시집보낸 아버지가 홀로 앉아 사과를 깎는 장면 등이다. 전시는 8월4일까지.

싱가포르 미디어아티스트·영화감독 호추니엔. 아트선재센터 제공

싱가포르 미디어아티스트·영화감독 호추니엔. 아트선재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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