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환

2012.11.01 22:20 입력 2012.11.01 23:56 수정
김숨 | 소설가

▲ 겨울의 환 | 김채원·문학사상

[오늘의 사색]겨울의 환

“앞부분이 파르스름한, 너무 크지도 않고 맛있어 보이는 무들은 동치미감으로 따로 골라 내놓았지요. 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와 계실 때면 할머니도 함께하셨습니다.

마당과 마루에는 김장거리로 즐비합니다. 그런 날은 창호지 문을 닫아도 방문이 열린 듯 휑하니 스산스럽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 스산스러움이 끝나지 않던 것입니다. 이윽고 어머니가 발을 구르며 들어와 아랫목에 버선발을 파묻고, 시뻘겋게 얼고 불어터진 손을 녹이며 가려워하던 것, 손이 매워 뜨거운 물에 담그던 것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어둠이 찾아왔는데 다시 밖으로 나가 주섬주섬 그릇들을 챙기고 뒷마무리를 하던 것, 곡괭이라는 말이 오가고 김칫독을 파묻는 일이 남아 있던 것, 그리고 김치 속을 해서 밥을 먹고 나면 깜깜한 한밤중이었어요. 며칠 후 어머니는 쇠고기를 몇 근 사다가 푹 고아서 그 국물을 식힌 다음 김칫독에 부어넣습니다. 바로 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우리 집 김치가 장안의 어느 김치보다 맛이 있다고 하던 것은.

쇠고기 국물이 김칫국물이 되고, 청각과 동태·굴이 시원한 바다의 맛을 더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참, 여름에 담가놓았던 오이지도 함께 김치 속에 통으로 집어넣습니다. 김치포기를 꺼낼 때 가끔씩 오이도 딸려 나오고, 그 오이의 아삭아삭한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 먼 기억 속 장면이 아니면서, 불투명 유리 너머의 얼굴처럼 흐릿해 먹먹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있다. 혹은 물감이 날리거나 들뜨고, 실핏줄보다 가는 금이 그물처럼 어지럽게 번져 숨은 그림이라도 찾듯 들여다보아야 하는 명화 같은 장면이…. 10년, 20년 한 그림에 매달려 훼손되고 유실된 부분을 몇 밀리리터 단위로 복원해내는 복원사처럼, 사라질 운명에 처한 생활 풍속의 한 장면을 살려내는 글이 있다. 내게는 <겨울의 환(幻)>이 그렇다. 마트마다 배추와 청각이 즐비하게 등장하는 김장철이 되면, 잔물결처럼 고요한 듯 쉬 멎지 않는 떨림이 느껴지는 김채원 소설가의 환(幻)으로 가득한 문장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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