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문학의 심층 탐구

2014.01.01 00:09
설흔 | 작가

김명호·돌베개

‘도강논도(渡江論道)’ 대목 중 마지막 명제(그 경계에 잘 대처하는 것은 도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나니, 정나라의 자산이 바로 그런 사람이지.)에서 연암은 정나라의 자산을 거론하는 것으로 발언을 마무리하고 있다.

[오늘의 사색]연암 문학의 심층 탐구

주지하다시피, 자산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인 관중과 더불어 법가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봉혁’과 같은 토지제도 정비, ‘구부’와 같은 조세제도 신설 등 내정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을 뿐 아니라 형서를 주조하여 최초로 형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법치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자산은 후대의 법가들처럼 가혹한 법치주의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법치와 예치, 형정과 덕정을 절충하고자 했으므로, 공자도 그를 백성에게 자혜를 베푼 정치가라고 칭송했다. 이 점은 자산의 최후를 서술한 ‘좌전’ 소공 20년조의 기사에 특히 잘 드러나 있다. 좌전에 의하면, 자산은 병사하기 전에 태숙에게 “덕이 있는 사람만이 관대한 정치로 백성을 복종시킬 수 있으니, 차선책으로는 가혹한 정치가 낫다”고 했다. 그런데도 후임 재상이 된 태숙은 자산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관정을 베풀다가 도적떼가 날뛰자 이를 후회하고 도적들을 대대적으로 소탕했다. 이에 대해 공자는 “잘했도다! 정치가 관대하면 백성이 방자해지니, 방자해지면 가혹하게 규제해야 한다. 정치가 가혹하면 백성이 쇠잔해지니, 쇠잔해지면 관대함을 베풀어야 한다. 관정(寬政)으로써 맹정(猛政)을 보완하고 맹정으로써 관정을 보완해야 정치가 조화를 이룬다”고 논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의 하나로, ‘시경’에서 “조이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으며, 억세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아, 정사를 조화롭게 펴시니 온갖 복이 모이도다”라고 하여 탕 임금의 통치를 예찬한 구절을 인용했다.

연암의 철학은 ‘경계’와 ‘사이’의 철학이다. 연암은 그 모범을 법가의 선구자 자산에게서 찾았다. 경계도 사이도 없이 냉혹한 원칙만 난무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연암이 봤으면 도대체 뭐라 했을까? 몹시 궁금하다.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