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후라는 이데올로기 | 고영란·현실문화
“1994년 8월은 일본에서 보낸 첫 여름이다. 그해 8월의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오키나와전의 비참함, 원폭의 참상, 공습의 흔적 등이 텔레비전 화면에서 중계될 때마다 내게 일본에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상상력이 없었던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학습된 전쟁을 둘러싼 나의 기억은 착각이었던 것일까. 일본의 텔레비전, 영화, 신문 등 어디에도, ‘한국의 8월’을 떠올리게 하는 잔학무도한 일본 군인은 없었다. 가족을 전장으로 보내고 공습을 견디며, 소중한 혈육을 잃거나, 귀환의 체험을 했던 ‘일본 국민’의 슬픔에 가득 찬 소리만 흘러나왔다. 그 후 내내 8월을 도쿄에서 보냈는데, ‘일본인’이 얼마나 험난한 시대를 보냈는지 세심하게 공들여 묘사하는 드라마는 주인공과 음악만 바뀔 뿐 계속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우리-일본인’의 슬픔으로 가득 찬 공간일 뿐, 전쟁의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 타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 일본 정치가들은 왜 잊을 만하면 신사 참배나 ‘망언’ 문제로 주변국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까. 일본의 미디어들은 패전 직후 일본인들의 고생담을 다룬 스토리에 왜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이 책은 일본에 관해 누구나 한번쯤 가져봤을 법한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일본인들의 집단적인 심리 기제가 전후 시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꼼꼼하게 보여준다. 그 핵심에는 역시 미국에 의한 패배, 그중에서도 특히 원폭의 참담한 공포가 거대한 트라우마처럼 놓여 있다. ‘강한 미국’과 ‘약한 일본’이라는 이 고착된 심리 구도 안에, 일본이 승승장구했던 기억이나 과거 식민자로 군림했던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기억이 제대로 자리 잡기란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