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이야기도 누군가에겐 읽힐 만하다

2017.05.01 20:30 입력 2017.05.01 20:34 수정

첫 장편 ‘디어 랄프 로렌’ 펴낸 소설가 손보미

첫 장편 <디어 랄프 로렌>을 들고 돌아온 소설가 손보미씨는 “다른 장르와 달리 독자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이 소설의 가장 큰 힘”이라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첫 장편 <디어 랄프 로렌>을 들고 돌아온 소설가 손보미씨는 “다른 장르와 달리 독자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이 소설의 가장 큰 힘”이라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랄프 로렌은 왜 시계를 만들지 않았을까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인물들을 한국인으로 바꾸어서는 이야기가 진행이 안되고 내적인 필연성 때문에 브랜드를 바꿀 수도 없었죠.”

2009년 등단 후 2012년부터 4년 연속 젊은 작가에게 주는 상을 수상한 소설가 손보미씨(37)가 첫 장편 <디어 랄프 로렌>(문학동네·사진)으로 돌아왔다. 지난달 24일 만난 작가는 “이번 소설의 배경은 외국이어야만 했다”고 말했는데, 외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이미 2009년 출간한 첫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을 통해 그가 한국적 현실이라는 한국 소설의 오랜 관행에 개의치 않는 작가라는 점을 유려하게 입증한 바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이야기도 누군가에겐 읽힐 만하다

평론가 신수정은 <그들에게 린디합을> 작품 해설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적어도 손보미, 혹은 손보미로 대표되는 어떤 작가군들에 의해 한국 소설이 우리만의 특수한 현실적 조건, 그 영원한 로컬리티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소설과 소설의 결합에 의해 또 다른 소설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흥미로운 현장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국 작가의 소설이 왜 미국 패션 디자이너 랄프 로렌의 행적을 복원하는 과정을 다뤄야 하는지를 추궁하는 것은 손보미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안된다. 중요한 것은 손보미 소설의 우주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보편적 공감대를 획득하고 있느냐의 문제다.

뉴욕대학교 물리학과 대학원에 유학 중인 종수는 물리학 공부를 그만두라는 지도교수의 권고를 받는다. 절망에 빠진 그는 방 안을 정리하던 중 고등학생 시절 첫사랑 수영이 보낸 청첩장을 발견하는데, 종수는 랄프 로렌 브랜드를 사랑했던 수영의 부탁으로 랄프 로렌에게 시계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는 영어 편지를 쓴 적이 있다. 이 기억을 떠올린 그는 거의 맹목적이라고 할 정도로 랄프 로렌에 대한 자료들을 섭렵하고 랄프 로렌을 기억하는 이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녹음한다.

종수가 추적하는 것은 어린 시절 티모시 스펜서로 불렸던 랄프 로렌과 그를 자식처럼 키운 시계수리공 조셉 프랭클의 관계다. 그러나 소설은 둘의 관계를 명쾌하게 해명하는 대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소중한 기억이 모두 지워지는 줄도 모른 채 앞을 보고 달려왔지만 결국 실패하고야 말았다는 자괴감에 빠진 종수를 위로하는 것은 로렌과 프랭클의 진짜 관계가 무엇이냐 같은 문제가 아니다. 종수에게 위로를 주는 동시에 소설의 서사에 풍부하고 섬세한 감정의 굴곡을 제공하는 것은, 매일 아침 종수의 아파트 현관문을 두드려 생사를 확인해준 대학원 동료, 로렌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해준 잭슨 여사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처음에는 랄프 로렌과 조셉 프랭클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완성하고 보니 그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어서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우리에게는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고 그건 누군가에게 읽힐 만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소설 속 랄프 로렌은 실존 인물과 같으면서도 다른 인물이다. 소설 속 랄프 로렌은 2002년 사망했지만 실존 인물은 살아 있다. 종수의 지도교수 미츠오 기쿠 또한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물리학자로 유명한 미치오 가쿠 뉴욕대 교수를 모델로 한 것이다. 일종의 평행우주론적 설계다. 작가는 “소설의 경우 작가의 의도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오독할 여지도 많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이 작가의 의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며 “독자들이 저보다 더 깊이 소설 속 등장인물의 마음에 공감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