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만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구술생애사

2018.04.29 14:48 입력 2018.04.29 14:53 수정

그동안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위안부’들의 삶은 여러 편의 소설이나 영화, 연극, 방송으로 만들어졌다. 고통과 슬픔의 역사를 문화예술의 형태로 재해석한 작품들은 대중에게 새로운 각도에서 문제 의식을 환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이해하려 한다면, 결국 당사자 육성을 듣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난달 출간된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푸른역사)는 위안부들의 증언을 모은 사례집이다. 2권으로 구성된 책에는 위안부 할머니 16명의 삶을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한 생애구술사와 함께 이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공식 문건과 사진 자료들이 가득 담겼다. 책을 집필한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사회학) 연구팀은 2015년부터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등에서 위안부 관련 자료들을 발굴하며 역사적 진실 규명 작업에 매진했다.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라는 책 제목은 어린 나이에 온갖 고초를 겪고 수십년 동안 고국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한 여성들의 삶을 명징하게 요약한다. 이들 중에는 이미 고인이 된 분들도, 여전히 진실을 알리는 데 마지막 남은 힘을 보태고 있는 분들도 있다. 책은 위안부 동원 이전과 이후의 삶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한편, 아시아·태평양 전 지역에 걸쳐 퍼져있던 일본군 위안소에서 저질러진 만행을 폭로한다.

■끌려가다

군대를 따라 트럭을 타고 이동하는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 중국 전선에 참전했던 무라세 모리야스가 찍은 사진이다. 푸른역사 제공

군대를 따라 트럭을 타고 이동하는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 중국 전선에 참전했던 무라세 모리야스가 찍은 사진이다. 푸른역사 제공

문옥주(1924~1996)는 1991년 8월14일 공개 증언에 나선 위안부 생존자 김학순에 이어 그해 12월2일 두번째로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식적으로 드러냈다. 대구에서 태어난 문옥주는 16살 때인 1940년 가을 헌병들에 의해 강제로 기차에 태워져,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지역인 북만주 동안성에 끌려갔다. 문옥주는 위안소에서 끔찍한 일년여를 보낸 뒤 도망쳐 귀환했지만, 1942년 일본군 식당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말에 속아 다시 미얀마로 끌려갔다.

“밤중까지 쉬지 않고 달린 트럭이 멈춘 곳은 정원이 있는 커다란 민가 앞이었다. … 그중 조선인인 군인이 우리에게 목소리를 낮춰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속아서 왔구나, 불쌍하게도. 너희들은 잘못 안 거야. 여기는 삐야(위안소)야.”

문옥주는 1942년 7월10일 부산항을 출발해 버마에 도착한 제4차 위안단으로 끌려간 700여명 여성들 중 한 명이었다. 문옥주는 버마 타테 8400부대에 소속되어 전선이 이동할 때마다 군인들과 함께 산을 넘었다. 공습이 계속되는 지옥같은 섬 아캬브에서 지옥같은 생활을 했고, 도중에 숨진 여성들을 직접 화장하기도 했다.

문옥주의 이동경로를 지도로 나타낸 그림. 1940년 북만주 동안의 한 위안소로 끌려갔던 그는 1년만에 귀환했으나, 다시 1942년 부산을 거쳐 미얀마로 끌려갔다. 푸른역사 제공

문옥주의 이동경로를 지도로 나타낸 그림. 1940년 북만주 동안의 한 위안소로 끌려갔던 그는 1년만에 귀환했으나, 다시 1942년 부산을 거쳐 미얀마로 끌려갔다. 푸른역사 제공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는 각 장의 서두에 여성들의 이동 경로를 나타내는 지도를 실었다. 한반도에서 시작해 필리핀, 내몽고, 중국 남경·운남·해남도·무한·한구·광동·아성·동녕·상해·미얀마, 라바울, 싱가포르, 태국, 대만,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팔라우 등 아시아·태평양 곳곳이 등장하는 지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범위와 만행을 여실히 보여준다.

서울대 인권센터는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NARA를 비롯해 영국 국립기록청(TNA), 일본 국회도서관 등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를 수집해왔다. 지난해 7월 연구팀은 당시 미중연합군으로 활동했던 미군 164통신대 사진대 배속 사진병이 중국 송산에서 1944년 9월 촬영한 한국인 위안부 관련 영상을 최초로 공개했다. 이 영상에는 송산에서 발견된 위안부 2명을 포함해 여성 7명의 모습이 담겼다.

연합군이 송산 위안소에서 살아남은 ‘위안부’들을 찍은 사진. 오른쪽 만삭 상태의 여성이 박영심으로, 함께 송산에서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군이 송산 위안소에서 살아남은 ‘위안부’들을 찍은 사진. 오른쪽 만삭 상태의 여성이 박영심으로, 함께 송산에서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군이 송산 위안소에서 살아남은 ‘위안부’들을 찍은 위 사진의 캡션으로, 햇필드 이병이 촬영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푸른역사 제공

연합군이 송산 위안소에서 살아남은 ‘위안부’들을 찍은 위 사진의 캡션으로, 햇필드 이병이 촬영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푸른역사 제공

■버려지다

해방을 맞은 후에도 상당수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해방 후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죄인 아닌 죄인’으로 숨죽여 살아야 했던 이들이지만, 삶에 대한 의지만큼은 누구보다 치열했다. 책에는 해방 이후에 이들이 겪은 여정이 담담하게 구술되어 있다.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김순악(1928~2010)은 대구 ‘실 푸는 공장’에 취직을 시켜준다는 말을 믿고 떠났다가, 내몽고 장가구로 끌려갔다. 해방 후의 삶에 관해 김순악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어느 날 해방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짐을 싸서 나왔다. 하얼빈역을 거쳐 북경으로 나왔다. 북경 시내에서 태극기를 걸어놓고 한국인을 모으고 있는 광복군을 만났다. 이들을 따라 기차를 타고 돌아오다가 중국 땅 어디쯤에서 내려 평양으로 걸어왔다. 한 달쯤 걸린 것 같다. 기차를 타고 오다가 기차가 끊기면 걸어서 평양까지 오고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역까지 왔다. 서울에서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돈을 벌어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후 서울역 부근, 전북 군산, 전남 여수를 전전하면서 ‘색싯집’과 ‘요릿집’에서 일을 했다.”

1984년 5월26일 노수복의 한국 방문과 형제 상봉을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

1984년 5월26일 노수복의 한국 방문과 형제 상봉을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

태국 칸차나부리 콰이강 주변의 수용소에서 생활했던 노수복(1921~2011)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태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뛰다보니 내가 지금까지 있던 수용소가 멀리 보였다.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왠지 모르게 눈물이 솟구쳤다. 주체할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나는 ‘24세의 자유인’이었다. 나는 한참 넋을 놓고 엉엉 울었다. 말레이반도의 동쪽 해안을 따라 며칠 동안 걷기만 하였다. 점차 방향이 남쪽으로 잡히면서 말레이시아의 이포시에 닿았다. 두 달 동안 집집을 돌며 걸식했다. 나는 어느새 거지가 되어 몰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위안부’ 시절보다는 좋았다. 자유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내가 선택한 고통을 참기로 했다.”

태국의 화교와 결혼한 노수복은 10년이 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지만, 남편의 후처를 통해 얻은 아이 셋을 자신의 자식처럼 키웠다. 1984년에는 KBS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고향의 동생들을 만났다.

1946년 1월17일 ‘두블론섬’을 출발한 호위함 ‘이키노호’ 승선자 중 조선인 여성 명부. 푸른역사 제공

1946년 1월17일 ‘두블론섬’을 출발한 호위함 ‘이키노호’ 승선자 중 조선인 여성 명부. 푸른역사 제공

■우리 앞에 서다

오래도록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위안부 피해자들은 반세기 가까이 흐른 후에야 서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이 우리 앞에 서기 시작하면서, 위안부 강제동원의 진실도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위안소로 끌려간 김복동(1926~)은 1946년 귀국한 뒤 가족들에게조차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살다가 1992년 방송에서 위안부 피해 신고를 받는다는 사실을 보고 결단했다. 이후 1993년 세계인권대회,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증언을 한 것을 시작으로 전시 성폭력, 미군 기지촌 여성, 노동운동, 통일운동, 평화운동 현장에 두루 참여해왔다. 2015년 12월에는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을 받았다. 올해 92세인 김복동은 현재까지도 위안부 진상규명과 인권 운동에서 커다란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1942년 1워르 일본 외무대신이 ‘위안부;를 이동시키라고 명령한 공식 전문. 푸른역사 제공

1942년 1워르 일본 외무대신이 ‘위안부;를 이동시키라고 명령한 공식 전문. 푸른역사 제공

문옥주는 1991년 12월 ‘위안부’ 피해 신고를 한 후로, 친구들을 잃었다고 회고한다. “친구들은 ‘위안부’ 였음을 밝힌 나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그걸로 됐다. ‘위안부’ 일을 알면서도 친구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친구라고 생각한다.” 이후 버마 군사우편저금 반환 소송,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 요구 활동 등을 활발하게 벌인 그는 친구보다 더 끈끈한 새로운 동지들을 사귀었다.

1942년 중국 무창 지역에 위안소 ‘세계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인명록. 푸른역사 제공

1942년 중국 무창 지역에 위안소 ‘세계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인명록. 푸른역사 제공

송신도(1922~2017)는 1993년 1월 일본에서 “사죄를 받고 싶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충남 논산 태생인 그는 중국 호북성 무창의 ‘세계관’이라는 곳에 끌려가 제11군 사령부를 따라 한구·악주·장안·응산·포기 등으로 이동했다. 함녕의 위안소에서 해방 소식을 들은 그는 결혼하자는 일본 군인의 말을 믿고 같이 우가라항에 왔지만 버림받았다.

송신도는 ‘재일조선인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과 함께 1억2000만엔(약 12억원)의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재소 7년만인 1999년 도쿄지방재판소는 피해 사실은 인정하지만 청구는 기각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송신도는 상고했지만, 도쿄고등재판소는 2000년 11월30일 피해 사실은 있지만 일본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률의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다시 기각했다. 송신도는 다시 상고했지만, 2003년 3월28일 최고재판소가 상고 기각 판결을 내리면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최종 판결이 나고 보고집회에서 송신도는 자신을 지지하는 시민들 앞에서 “재판에는 졌지만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10년에 걸친 재판 과정에서 인생의 동지를 만났고, 많은 시민들을 만나 평화와 인권을 얘기했으며,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3년3월 일본 최고재판소로 향하는 송신도(가운데 밝은 색 옷을 입은 여성). 푸른역사 제공

2003년3월 일본 최고재판소로 향하는 송신도(가운데 밝은 색 옷을 입은 여성). 푸른역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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