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아이돌, 거부당하지 않는 순수한 사랑

2019.11.01 15:00

[책과 삶] 아이돌, 거부당하지 않는 순수한 사랑

라스트 러브

조우리 지음

창비|195쪽|1만4000원

“행복의 원형을 본 듯했다.” 방탄소년단 콘서트에 가기 직전 들뜬 딸의 모습을 본 회사 선배의 말이다. 사춘기의 파고가 덮쳐와 우울감에 시달리던 딸은 방탄소년단 팬이 된 뒤 ‘생의 기쁨’을 되찾았다고 하더니 급기야 ‘행복의 원형’에 가까워졌다. ‘행복의 원형’이라니! ‘그런 것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와 같은 생각부터 ‘그런 순수한 사랑은 어디서 오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맴돌았다.

소설가 조우리(32·사진)의 소설 <라스트 러브>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돌을 향한 커다란 사랑과 순수한 기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소설 발문을 쓴 천희란 작가는 “거부당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말했다.

“‘거부당하지 않는 사랑의 경험’이란 말이 맞는 것 같아요. 10대를 돌이켜보면 나의 세계가 상당히 좁고, 내 안에 감정에 대한 재료들이 많이 없는 상황에서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이 멀리서 빛나고 있다는 게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라스트 러브>는 아이돌과 그들을 사랑한 팬들 이야기다. 해체를 앞두고 처음이자 마지막 콘서트를 준비하는 여성 아이돌그룹 제로캐럿과 그의 팬 파인캐럿이 쓴 팬픽이 교차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인터뷰를 위해 조우리에게 전화를 걸자 통화연결음으로 익숙한 노래가 울려퍼졌다. 걸그룹 f(x)의 노래 ‘4walls’다.

제로캐럿은 톱클래스도 아닌, 인기가 없지도 않은 5년차 걸그룹이다. 평범한 걸그룹들이 그렇듯 계약기간이 끝난 멤버는 탈퇴하고 새로운 멤버가 들어오기도 한다. 다인·루비나·지유·재키·준의 5인조 그룹 제로캐럿은 지유와 재키가 탈퇴하고 마린이 새 멤버로 들어오면서 4인조 그룹으로 변신한다. 춤을 좋아하고 잘 췄던 다인, 작곡 등 재능이 뛰어난 준, 스물다섯나이에 늦게 데뷔한 루비나, 중간에 들어온 마린 등 저마다의 고유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오디션에서 단추를 풀 것을 요구받고, 조언을 할 때면 어깨를 쓰다듬는 매니저 등 여성 아이돌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적 상황, 기성품을 생산하듯 멤버를 고르고 교체하고 그룹을 해체하는 소속사 등 냉혹한 아이돌 산업의 면모와 함께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열등감, 대중의 사랑과 동시에 위협에 노출되는 불안감 등 각 인물이 처한 내면 풍경이 드러난다.

소설 <라스트 러브>를 펴낸 소설가 조우리. 창비 제공

소설 <라스트 러브>를 펴낸 소설가 조우리. 창비 제공

아이돌을 빛나게 해주는 팬들도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멤버들이 제각각의 욕망과 이유로 아이돌이 됐듯, 팬들 역시 저마다 다른 이유와 형태의 사랑을 보여준다. 그룹 멤버 전체의 조합을 좋아해 자신이 특히 좋아했던 멤버의 탈퇴를 아쉬워하면서도 그룹을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는 파인캐럿, 스타를 향한 공격적이고 왜곡된 사랑을 보여주는 온리마린 등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다.

이야기 가운데엔 각 멤버를 주인공으로 한 팬픽이 교차된다. 팬픽의 특성상 각 멤버의 매력이 극대화된 캐릭터 사이의 사랑 이야기는 끝을 앞둔 제로캐럿의 불안한 현실과 대비돼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팬픽 앞엔 f(x)의 ‘종이 심장’, 트와이스의 ‘FANCY’, 아이유의 ‘팔레트’ 등 노래가 소개됐다. 소설은 창비의 문학웹진 ‘문학3’에 연재됐는데, 연재 당시엔 유튜브로 해당 노래를 보고 들을 수 있게 했다.

조우리 역시 아이돌그룹의 팬이었다. SES, f(x) 등 여성 아이돌이 그를 사로잡았다. “남성 아이돌이 노래하는 사랑이나 사회적 문제에는 많이 공감하지 못했어요. 여성 아이돌의 서사에 이입하고 공감했죠.” 그는 “프로듀스 101을 봐도 여성 아이돌은 ‘픽미’를 부르고, 남성 아이돌은 ‘나야나’란 노래를 부른다. 여성 아이돌의 노래가 수동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비틀어 보면 여성 아이돌은 무대 밖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고 궁금해진다”고 말했다.

조우리는 최근 f(x)의 전 멤버 설리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아직도 아픔이 가시지 않아 말하기 힘들다”면서도 “여성 아이돌이 유독 ‘굴곡의 서사’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사회적·정치적 불행에 휩쓸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근 Mnet <퀸덤>은 여성 아이돌 그룹을 전면에 등장시켜 화제가 됐다. AOA가 수트를 입고 성역할을 바꾼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등 여성 아이돌의 스타일이 다양하고 자유로워지고 있다. 조우리는 “오랜 기간 활동하는 그룹이 늘어나서 자신의 색깔을 뚜렷이 드러내는 그룹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하지만 규모가 작은 회사 소속 아이돌이나 신인은 여전히 성적대상화와 같은 문제에 노출되는 모습을 보여서 쓸쓸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지난 추석 연휴 뜨거운 이슈가 된 Mnet <퀸덤>에서의 걸그룹 AOA ‘너나 해’ 무대. Mnet 제공

지난 추석 연휴 뜨거운 이슈가 된 Mnet <퀸덤>에서의 걸그룹 AOA ‘너나 해’ 무대. Mnet 제공

아이돌 팬덤은 그동안 ‘빠순이’로 폄하돼 왔다. 하지만 최근 김세희가 <항구의 사랑>에서 그 시절 여학생들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조우리가 <라스트 러브>에서아이돌그룹과 팬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아이돌 문화는 문학에서 새로운 영역을 차지하고 재조명되고 있다.

“우리 세대에 공통되는 가장 강렬한 문화적 경험이 아닐까요. 팬덤 문화는 또래 여성과 가장 강하게 정서적으로 소통했던 기억이기 때문에 소설의 재료가 되고 한번은 쓰고 싶은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요.”

오래 전 조우리가 쓴 ‘최초의 소설’은 팬픽이었다. 그는 팬픽에 대해 “내가 본 스타의 빛나는 부분에 대해서 더 크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라며 “순간적인 표정, 짧은 말 한 마디, 제스처가 팬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누군가는 발견 못한 것일 수 있지만 내가 발견한 매력을 극대화해 보여주고픈 것”이라고 말했다.

조우리는 창작을 배우던 시절 “여자 냄새 나는 소설을 쓰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첫 책은 여성 아이돌그룹, 여성 팬이 등장하는 온통 ‘여성 판’이다. 조우리는 “선생님은 여성 이야기는 ‘사사로운 소설’이고 위대한 문학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쓰고 싶은 문학은 그들이 말하는 ‘위대한 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성들과 아이돌 문화를 공유하는 독자들이 함께 재미있게 읽고 싶은 마음으로 쓰게 됐다”고 말했다.

조우리는 소설가 천희란·차현지와 함께 여성소설가팀 ‘왓에버’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페미니즘 비평집 <문학은 위험하다>를 읽고 “여성 작가들이 서로를 응원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북토크, 릴레이 리뷰 등 활동을 하고 있다.

f(x)의 팬인 조우리는 “‘첫 사랑니’ 노래에서 ‘넌 쉽게 날 잊지 못할 걸’이라며 첫사랑의 아픔을 이야기하는데, 그런 성격으로 노래하는 여성 화자는 없었다. 가사도 강렬하고 노래를 소화하는 멤버들 조합이 완벽해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돌은 재능 있는 사람이 무대에서 재능과 매력을 보여주고, 그 빛남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열광하는 문화”라며 “재능 있는 사람이 불행한 서사를 겪지 않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라스트 러브>는 인터넷 연재 당시 아이돌을 좋아하는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댓글은 아이돌에 문외한이었던 독자가 남긴 글이다.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그룹을 좋아하고 싶어진다.” <라스트 러브>는 그렇게 순수하고 거대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와 갈망을 들려준다.

[책과 삶] 아이돌, 거부당하지 않는 순수한 사랑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