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 문제는 나중에? 있을 수 없는 일

2023.02.24 11:34 입력 2023.02.24 19:20 수정

하종오의 40번째 시집…전시 성폭력 피해 등 우크라이나 관련 시 담겨

단속 쫓기다 추락해 뇌사 상태 빠진 후 ‘장기 기증’ 이주노동자 얘기도

한국 무기·원전 수출 비판도…국경 너머 세계 성찰 ‘날’ 벼린 리얼리즘

하종오 시인. 하문영 촬영. 도서출판b

하종오 시인. 하문영 촬영. 도서출판b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얘기하자?”

하종오 지음 | 도서출판b | 143쪽 | 1만2000원

하종오의 40번째 시집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얘기하자?”> 표제작은 우크라이나 여성 의원 인나 소우선의 증언(한국일보 2022년 7월1일자, “ ‘러시아군, 눈앞서 딸을’…전시 강간은 우크라 여성을 짓밟았다”)을 “그대로 한 편의 시”라며 옮겨 적는다.

전시 강간을 운 없는 개인이 겪은
안타까운 작은 일 정도로 치부해선 안 된다.(…)
러시아가 훼손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점이다.
전쟁은 추상적인 그 무언가가 아니다.
인간과 세계를 바꾸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개개인이 겪는 전쟁 피해를 규명하는 작업도 구체적인
사건이다.
정치외교적 담론으로 전쟁을 중계해선 안 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알려야 한다.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얘기하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얘기하자?” 중

이 시는 2002년 개혁당 내 성폭력 사건 처리를 두고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는 유시민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 이 발언이 지금도 회자하는 건 소수자와 피해자에게 중요한 일이 ‘국익’ ‘선거’ ‘대의’ ‘큰일’의 뒷전에 놓이는 일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여성, 난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LGBTQ 등 소수자 문제는 지금도 진보와 인권을 내세운 세력 안에서도 사소한 일로 치부되곤 한다. 문재인 정권은 약속했던 차별금지법 제정을 ‘나중’ 일로 미뤘다.

하종오의 시들은 외국에서 벌어지는 일과 한국의 외국인들이 겪는 일로 지금 한국 문제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시 ‘무기 수출국’은 2020년 6월 예멘 후티 반군이 공개한 유튜브 영상 중 ‘한화 세열 수류탄’이라 적힌 무기 사진과 관련 보도를 보고 쓴 것이다.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을 피해
한국으로 피난한 예멘인들은
한국에서 만든 수류탄이 예멘에서 터져
사상자가 생긴 걸 모르고,
예멘인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국인들은
예멘에서 터진 수류탄으로
한국이 돈 번 걸 모르는 무관심에 나는 비탄한다
(…)
육이오 전쟁으로 초토화된 국가에서 살아남은 한국인들이
(…)
폴란드에 새로운 무기를 판매하여
한국이 부강해지는 문제에 대하여
의문하고 고민하지 않는 사실을 나는 통탄한다

- ‘무기 수출국’ 중

하종오는 원자력발전소 기술 수출을 두고는 시 ‘원자력발전소’를 썼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체르노빌을 점령한 군인들에게
방사능에 오염된 원자력발전소 지역을 통과하게 한 러시아 권력자들,
오로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면
노후한 원자력발전소를 연장하여 가동하고
원자력발전소 기술을 타국에 수출하겠다는 한국 권력자들,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 ‘원자력발전소’ 중

시 ‘원자력발전소’와 ‘무기 수출국’에선 방산 무기와 원자력발전소 기술 수출을 두고 전·현 정권 사람들과 각 진영 지지자들이 공을 다투는 일을 떠올린다.

하종오는 ‘작가의 말’에서 “공공 전체가 아니라 강자인 일부를 위해 공무를 하면서/ 사익을 편취하는 사악한 권력, 부도덕하고 불의한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전쟁하는 권력이 전멸한 세계는 존재할 수/ 없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거대권력을 비판하면서 피해자 고통을 아우른다.

시집 1부는 우크라이나에 관한 시들을 묶었다. 하종오는 해바라기씨유 품귀 소식에 그 씨를 뿌리지 못하는 농부를 생각했다. 텃밭에 심은 옥수수를 돌보면서도 우크라이나 주요 농작물 중 하나가 옥수수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시인의 상념은 ‘인간과 밥’의 문제로 이어진다.

오후 6시30분 저녁 먹을 시간 “점심으로 밥을 많이 먹은 탓에/ 너무 배가 불러서/ 식탁에 앉아 몇 숟갈 뜨고는” “아침으로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너무 배가 고픈데도/ 피난민촌에서 빵을 실컷 먹지 못할” 얼굴도 모르는 우크라이나 사람을 떠올린다. “한국에서 저녁 먹는 나의 처지와/ 우크라이나에서 점심 먹을 당신의 처지를/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인데도/ 아무도 비교하여 마음 쓰지 않는다, 슬프게도.”(‘현재 시간’ 중)

이주노동자에 관한 시들에서도 ‘마음 쓰지’ 않는 한국인들을 상기한다.

“2018년 2월, 미얀마인 공장노동자 윈톳쏘 씨가/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추락하여/ 뇌사 상태에 빠졌다/ 그의 가족은 윈톳쏘 씨의 심장과 간과 좌우 신장을 기증하여/ 한국인 네 명을 살리고/ 미얀마로 돌아갔다// 2018년 9월, 미얀마인 건설노동자 소티 씨가,/ 점심을 먹던 식당에서/ 불법 체류자 단속반이 들이닥치자,/ 창문으로 뛰어내리다가 낭떠러지로 추락하여/ 뇌사 상태에 빠졌다/ 그의 가족은 소티 씨의 눈과 간과 좌우 신장을 기증하여/ 한국인 네 명을 살리고/ 미얀마로 돌아갔다”(‘장기(臟器)’ 중)

차별과 혐오에 시달리는 한국 안 이주노동자와 난민에서 전쟁과 내전, 쿠데타로 삶과 죽음 문제에 직면한 한국 밖 피해자까지 걸친 하종오의 시 세계를 두고 문학평론가 고명철은 ‘세계시민으로서 정치윤리적 성찰’로 규정한다. 한국 안팎의 문제가 결국 권력과 돈, 혐오 등에서 나온 같은 문제라는 걸 시로 외친다.

하종오는 기자와 통화하며 “국경이라는 게 정치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지 보통 사람들이 만든 게 아니다. 우리 생활만 해도 과거처럼 한 국가 안에서만 살 수 없다. 이번 시집에서 문학적 시야를 (세계로) 넓혔다고 봐주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민중시로 출발해 시력 40여년에 이른 그는 지금도 리얼리즘 문학을 굳게 지켜나간다. 하종오는 “리얼리즘 문학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문학이다. 저만의 문학을 고수할 것”이라고 했다. 그 리얼리즘 문학 핵심은 “늘 있는 일인데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일을 할(쓸) 뿐”이라는 하종오의 말과도 이어졌다.

하종오 시인. 박후기 촬영. 도서출판b 제공

하종오 시인. 박후기 촬영. 도서출판b 제공

[책과 삶]소수자 문제는 나중에? 있을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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