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귀국길에 오르다

2012.10.25 21:12
김재희 작·김정란 그림

만주 안동으로 이주한 상섭은 가족을 살뜰히 돌보면서 작품을 쓰지 않고 홍보관으로 주어진 일만 성실히 하는 직업인으로 살아갔다. 그의 나이 44세가 되었다. 1940년 경성에서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었다. 표면상으로는 용지를 통제한다고 하였지만, 대동아전쟁을 준비 중인 일제는 언론 통제를 비롯하여 주요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하는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다. 이듬해 12월8일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가 미국의 진주만을 습격하였다. 이로써 미국과 일본이 전면전에 나서게 되었다. 전 세계가 태평양 전쟁에 뒤얽혀서 무서운 기세로 돌아갈 때, 상섭은 재만주 조선인 창작집 ‘싹트는 대지’에 서문을 쓰고 장편 ‘이심’ 소설을 뒤늦게나마 박문서관 출판사에서 펴낸다고 하여 교정을 보고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의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상섭은 교정을 보다 말고 벅찬 가슴으로 마당으로 뛰어나가 새벽하늘을 보았다. 벌건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 임시정부가 서울로 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독립이라는 염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소설 횡보 염상섭](15) 귀국길에 오르다

낮에는 홍보관으로 밤에는 조선인 거류민단의 부회장으로 일하였다. 아울러 조선인들의 문집 발간을 도왔으며, 안수길의 창작집 ‘북원’에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아들 재현도 얻었다.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도 꾸준히 삶을 설계해나갔다. 1945년 8월15일 정오, 중대방송이 있다는 예고에 직장에서 집으로 일찍 퇴근하였다. 라디오방송을 틀어놓고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다. 이웃 몇몇과 뒷집의 일본 노인이 와서 방송을 같이 듣기를 청하였다.

“들어오십시오. 같이 들읍시다.”

일본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숨 죽이고 방송을 청취하였다.

“짐은 깊이 세계의 형세와 제국의 현상에 비추어보아 특단의 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려고 하여 이에 충성스러운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대해 공동성명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됐다.”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흐흑흑, 해방이 이제야 오다니.”

상섭의 무릎이 꿇렸다. 그토록 염원하던 광복이 35년 만에 이루어졌다. 일본 노인의 눈빛도 흔들리면서 굵은 눈물방울이 주름진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방송이 끝나자 다들 말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상섭은 감격에 겨워 한참 동안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조선은 남과 북으로 쪼개져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주둔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 중간에 38선이 생겨서 왕래가 힘겹게 되었다. 상섭은 신의주에 위치한 신문사에서 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귀국하였다. 당분간 가족들과 신의주에 머무르기로 결정하였다.

“탕! 탕!”

밤마다 새벽마다 총성에 잠을 깨는 일이 빈번하였다. 38선을 넘어 서울로 돌아가고자 하여도 갓난아이를 포함하여 어린 것들을 걸리고 들쳐 업고 떠나는 일이 걱정되었다. 장남 재용을 어찌어찌하여 서울로 보내놓고도 신의주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의거사건이 일어나 수십 인이 죽고 수백의 부상자가 나왔다.

“안되겠어요. 여보, 이쪽은 위험해요. 어서 서울 고향으로 돌아가요.”

아내가 상섭을 재촉하였다. 1946년 6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사리원을 거쳐 서울 돈암동에 정착하였다.

가을 즈음, 양기섭 신부와 정지용 주간의 제의를 받고 가톨릭 교단에서 창간하는 경향신문의 초대 편집국장이 되었다. 상섭의 나이 쉰이었다. 서울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소련에 동조하는 좌파와 미국에 동조하는 우파가 갈려서 사분오열의 상태였다. 문단도 전향자이냐, 비전향자이냐, 중립이냐, 민족주의자냐에 따라서 이리저리 흩어지고 다시 뭉쳤다. 일 년 후, 신문사를 사직하고, 성균관대학교에 출강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창작활동에 전념하였다.

추운 겨울날, 잡지사에 글을 넘기려고 분주하게 걷고 있었다. 가냘픈 체구의 한 여성이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두 손을 모으고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인은 인사동 화랑 앞에서 그림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핏 낯익은 얼굴이었다.

“혹시, 여보시오.”

상섭이 다급하게 걸어가니 여인은 화들짝 놀라 골목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여인이 들여다보던 그림을 보니, 우수에 찬 중년여인의 초상화였다. 상섭은 고개를 갸웃하고 바삐 가던 길을 갔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하였다. 전업작가로 돌아간 상섭은 그해 가을 ‘만세전’과 ‘삼대’를 출간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듬해에는 단편집 ‘해방의 아들’이 나왔다. 어느 날 신문을 펼쳐든 상섭은 나혜석이 사망하였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3월에 관보에 무연고자 시신 공고가 나서 신원이 불확실한 여자의 시신을 찾아가라 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녀가 나혜석이었다는 것이다. 혜석은 일찍이 남편을 두고 천도교 인사 최린과 염문을 일으켜 기어이 이혼을 하게 되었다. 이혼 후에도 자녀들을 만나지 못해 괴로워하였지만, 개인전을 열고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사회의 멸시와 냉대, 아들의 죽음을 겪고 나서는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절로, 여관으로 떠돌다가 실종되었다고 들었다.

“이럴 수가, 그렇게 지적이고 아름답고 용감하던 그녀가 행려병자가 되어 이름도 없이 가다니……. ” 상섭은 인사동에서 그림을 들여다보던 여인을 떠올렸다. 그녀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지만 외투라도 벗어주지 못한 게 못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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