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소설가 전성태

2014.09.12 21:19 입력 2014.09.12 21:30 수정
글 백가흠 | 소설가·사진 백다흠 | 은행나무 편집자

그는 귀하게 소설을 써왔다

그는 나의 롤모델이다. 물론 부리부리한 눈의 얼굴을 닮고 싶다는 말은 아니고 그가 소설을 대하는 문학적 순도를 닮고 싶었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그의 순정한 시선을 배우고 싶었다. 내가 갓 등단했을 때 그는 작가회의에서 사무총장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그가 데뷔를 했으니 그가 선생님처럼 보였던 것은 당연했다. 나는 그에게 선배라고 부르는 것이 어렵고 부끄러웠다. 그에게 작가회의 가입원서를 냈다. 언젠가도 말했듯이 나는 작가회의 날라리 회원이다. 세상 무엇보다도 내 개인의 영화와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남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이는 속물이다. 그는 작가들을 위해 헌신하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 그가 좀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으며, 한편으론 그렇게 훌륭한 작가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좀 존경스럽기도 했다.

[백(白)형제의 문인보](22) 소설가 전성태

나는 당시 가난했다. 한 달 수입이 겨우 30만~40만원이어서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어 거의 굶다시피 할 때였다. 이상하게도 소설가가 되고난 뒤로 더 가난해졌다. 혼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체면을 차리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예로 주말이면 가끔 인력사무소에 나가 군대에서 배운 목수보조-데모도, 일본말이 훨씬 의미가 쉬울 때가 있는-일을 하거나 이삿짐을 나르는 일당 5만원의 잡부 일을 하곤 했는데, 작가 체면에 노가다는 뛸 수 없다며 방안에 틀어박혀 소설이나 쓰고 있었으니, 가난했다. 굶어야 했다.

들리는 소문에 작가회의에 나가 얼쩡거리면 밥이니 술이니 먹여준다는 소문이 돌 때여서, 나는 큰맘 먹고 작가회의 문턱을 기웃거린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좀 달랐다. 이미 한 자리-밥, 술을 먹는 자리임, 오해 마시길-를 이미 손홍규 같은 동갑내기 작가가 차지하고 있어 나는 문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굶고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낙담하여 집에서 뭐 먹을 것 없나 맥없이 빈 쌀 포대를 털어보고 있는데, 소설가 전성태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나의 구세주였다. 그가 내 이름을 기억해주고 내 사정을 훤히 아는 것같이 챙겨주어서 나는 감동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호의라는 것을 처음 받아보았다. 서울이 괜히 서울인가 말이다. 나는 순간 얍삽하게 이것도 무슨 더 큰 일을 시키기 위한 낚시가 아닐까 의심했지만, 정말 궁핍한 내 사정을 미뤄 짐작한 전성태 형의 호의였다. 나는 그의 소개로 파주의 한 여고 특활시간에 글쓰기를 지도하는 선생으로 나가게 되었다. 두 계절을 그의 덕으로 굶지 않고 살았다. 그에 대한 호감은 물론이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굶을 때 내게 밥을 줬다. 그에게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그와 쉽게 친해질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첫 소설집 <매향>(실천문학)을 어렵게 읽었던 터라 그가 좀 어렵고 대단하게 보인 것은 물론이다. 작가가 작가를 어려워한다는 말은 딱 한 경우뿐이다. 소설은 결코 상대적인 것이 아니어서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소설에 대한 존경과 작가가 가진 재능이 남부러울 때이다. 그의 첫 소설집을 읽은 사람들은 모두 느끼는 것이었겠지만 아, 어렵다. 사회나 농촌의 현실적인 관점에서 서사가 진행되는 것임에도 불구, 그의 미문은 자꾸 서사를 가리고 숨겨진 상징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후 <국경을 넘는 일>과 <늑대>에 와서는 훨씬 덜 하지만-그는 정말 위트 넘치는 재밌는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첫 책이 주었던 작가의 이미지는 간단치가 않았다.

전성태는 과작의 작가이다. 그는 귀하게 소설을 써왔다. 그가 쓴 소설은 귀하게 자리 잡았다. 현실의 상황에서 풀어나가는 그의 재담은 아직도 우리 문학이 가지고 있는 미적인 우월성을 자랑스럽게 만들곤 했다. 특히나 1990년대 이후 소설의 방향이 사회 구성원의 개인사로 향하고 있을 때에도 그의 더듬이는 사회와 현실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의 소설이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만 하는 당연한 이유이다. 리얼리즘이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현실을 사는 소시민들의 저잣거리 안에서 펼칠 수밖에 없는 소소한 것임을, 그 현실의 풍경을 통해서밖에는 말할 수 없는 장르임을 감안하면 그의 소설은 대단한 것이었다.

[백(白)형제의 문인보](22) 소설가 전성태

그와 친해진 것은 여행을 통해서였다. 동남아시아 크루즈 여행-우리에겐 너무 과분한 여행을 후배들을 아끼는 은희경 선배의 소개로 하게 되었다-과 몽골여행을 함께했다. 그의 입담은 우리 할머니를 닮았다. 그의 이야기는 어떤 경우에도 악의가 없고 선하다. 유머는 기본이다. 내가 아는 한 가장 이야기를 재밌게 푸는 작가이다. 우스갯소리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다. 그 이야기 안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고수해온 해학과 풍자가 숨어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소설에 서사 하나를 담아내지만 추측건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서사는 그가 가진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그와의 여행은 그리하여 순식간이다. 그의 얘기에 빠져들다 보면 여행에서 보았던 무수한 풍경들은 어느새 뒤로 밀려나 있기 일쑤다.

그는 소설가들이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을 다하는 드문 작가이다. 소설가는 소설만 쓰는 사람이 아니다. 사회를 관찰하고 보는 사람들이다. 본 것을 소설로 옮기는 사람들이다. 보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도 소설가들의 소명이다. 소설가가 뒤로 물러앉아 소설만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주의적이고 방관자적인 시선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는 정치에 민감하지만 정치적이지 않고, 소설에 그리는 현실 안에서의 소시민들이 처한 문제에 대해 행동하는 작가이다. 수많은 현안과 문제에 대해 그의 양심은 가만히 방에 머물러 있는 법이 없다. 후배들이 그의 작품과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독자들에겐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리스트가 있기 마련이다. 야구를 예로 들면 좋아하는 작가가 매번 소설로 홈런을 때려주길 바란다. 한두 번의 삼진이나 잘 맞은 플라이아웃은 눈 감고 다음 타석을 기대할 수도 있겠으나 삼연타석 아웃을 당한다면 그건 곤란하다. 이럴 때 독자는 순전히 감독의 입장에 서게 된다. 여전히 다른 3할 타자는 존재하기 마련, 독자들은 미련이 없다.

야구광인 내게도 마음속에 변치 않는 소설 3할 타자들이 여럿 있다. 그들의 책을 읽으며 실망해 본 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슬러거들이다. 그중 하나, 4번 타자 전성태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우리의 풍경에 화 나다, 눈물 짓다, 코웃음 치다, 웃는다. 그의 소설은 독자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절한다. 아직 전성태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 믿음직한 소설 3할 타자 한 명 트레이드해 보시길.

▲ 소설가 전성태

1969년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을 공부했으며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신동엽창작상, 채만식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집으로 <늑대> <국경을 넘는 일> <매향(埋香)>, 장편소설로 <여자 이발사>가 있다. 산문집 <성태 망태 부리 붕태>, 인권 르포집 <길에서 만난 세상>을 펴냈다. 어린이를 위한 책 <구텐베르크> <장화홍련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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