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소설가 황석영

2014.09.19 20:43 입력 2014.09.19 20:55 수정
글 백가흠 | 소설가·사진 백다흠 | 은행나무 편집자

그는 천생 이야기꾼입니다

소설가 황석영 선생을 직접 처음 본 것은 장편소설 <바리데기>를 출간할 무렵이었습니다. 한 출간 행사의 사회를 제가 맡았습니다.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지요. 물론 먼발치에서 여러 번 본 적은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가까이에서 보고 얘기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떨었습니다. 저는 넉살도 나무랄 데 없고 염치도 만만치 않아서 어디든지 얼굴을 잘 내밀고 살갑게 관계를 푸는 데 나름대로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황 선생과 마주하니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이름 자체만으로도 위축감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몰래 사랑한 여자에게 마음을 들켜버린 것처럼 부끄럽고 설렜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 대해서 뭔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후-동생 다흠은 자기가 찍은 사진 중에서 그를 찍은 사진을 아주 좋아해서 끊임없이 내게 황 선생에 대해서 뭔가를 쓰기를 강요했고, 나는 부담스러워서 어떻게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이미 고통스러운 마음 가눌 길 없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뭔가를 말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어려운 분이니 그렇지요. 또 만년의 확장된 세계관에 대해서는 제가 감히 잘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너무 조심스럽기도 하고요. 이 남루한 글이 그에게 또 누가 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섭니다.

[백(白)형제의 문인보](23) 소설가 황석영

첫 대면을 한 지 얼마 후, 광주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낸 적이 있습니다. 무등산 근처 남루한 호텔 방, 침대에 걸터앉아 조촐한 술자리를 가지며 그의 젊은 시절 얘기를 들었습니다. 과거 막막한 정치현실과 절망적인 역사 앞에 작가로서의 숙명과 소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행해야만 했는지에 대해, 그래서 써 왔던 소설과 앞으로 써야만 하는 소설의 숙명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는 작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운명처럼 보였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일은 감동적이었습니다. 겨우 하룻밤이었지만 무수한 밤이 흘러간 것 같았습니다. 동이 트는 새벽이었던가요. 자리를 털며 일어서는 제게 그가 어깨를 툭 치며 말을 보냈습니다.

“작가로 살려면 어떻게든 써야만 해. 작가로 사는 시간이 흐르면 쓰는 것도 자연스럽게 나아질 것 같지만 전혀 아니야. 잔머리 굴려 봐도 소용없어. 다른 방법도 없고.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천하의 잘난 작가 누구라도 앉아서 엉덩이로 쓰는 거야.”

그의 말은 그 어떤 말보다 명징한 창작론이 분명했습니다. 제게는 어떤 화두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만한 작가 중엔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거야.”

우리는 그의 화려한 언변과 현실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 행동을 주로 목격했지만, 그가 원고지와 씨름하며 무수한 밤 앞에 숙연해지는 시간은 본 적이 없으니까요. 고요한 밤, 그가 뒤적이는 책의 운명을 함께 들여다본 적이 없으니까요. 우리는 그를 모르는 겁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는 그의 유일한 것은 그의 소설이라는 것뿐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의 이미지는 한국근대사를 바탕으로 그려온 굵직한 서사로, 또 역사와 사회, 노동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로 만들어진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그가 그런 완고함과는 거리가 먼 여린 감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압니다. 다만 그의 말이 유쾌하고, 젊고 넓은 사고가 직설적이고 사실적인 것뿐이지요. 그는 남의 얘기에 귀 기울이고 또 잘 듣습니다. 생각했던 이미지와 다르다면 그에 대한 하나의 편견이고 오해입니다. 그는 친절한 사람입니다.

그처럼 얘기를 재밌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모두 알다시피 그는 타고난 말꾼입니다. 그는 평소 말할 때도 소설처럼 이야기합니다. 반전과 유머가 뒤에 있습니다. 말에도 플롯이 존재합니다. 과정은 신명 나고 흥미롭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아마 스무 가지도 넘을 겁니다. 정말 신기한 것이 하나 있는데 했던 얘기를 또 해도 그가 하면 재미있다는 겁니다. 그가 어른이기 때문에 모두 경청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들어도 재미있기에 좌중은 그의 말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들어보면 지난번과 똑같지가 않습니다. 디테일이 조금씩 다릅니다. 팩트는 여전합니다. 두 번째 듣는 이야기를 진심 재미있어 못들은 척 하고 듣고 있습니다.

그는 천생 이야기꾼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시작해 철학, 세계사, 정치까지 방대하고 전문적입니다. 그의 시선은 한국이라는 지엽적인 데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전 지구적입니다. 언젠가 그가 ‘세계시민론’을 얘기한 것은 어떤 이슈나 문학적 과제를 수행하는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닐 겁니다. 그의 사고는 넓고 다채롭습니다. 우리 반도 안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협소하고 민족적인 관심 안에서 그를 이해하는 것은 조금 버거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거란 얘기이지요. 특히 그가 평생 관심 가져온 공동체에 관한 세계시민의 관점은 인문학적 수행의 한 축으로 보입니다.

[백(白)형제의 문인보](23) 소설가 황석영

최근 그는 베를린에서 열린 한 문학페스티벌에서 “세월호 사건은 탐욕과 비리의 합작이 낳은 한국적인 재난”이라고 비판하며 “공공성의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 국민 스스로가 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어쩌면 한반도의 지엽적인 문제로 남을 수 있는 사안을 세계시민과 공유할 수 있는 작가로서의 역할이 자랑스럽습니다. 20대부터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망설임 없었던 그가 칠십이 넘은 후에도 한반도의 나아지지 않은 상황을 마주보며 느꼈을 참혹함이 짐작됩니다. 공동체의 공공성 회복을 바라는 작가의 절실함이 보입니다.

그의 소설과 작가의 숙명에 관해선 말을 아낍니다. 문학과 작가가 역사 앞에 이행해야만 하는 숙명을 거스른 적 없는 그이니까요. 그는 당연히 한국 최고의 작가임이 분명하니까요. 그가 한 대담에서 밝힌 이야기는 그가 만년에 꿈꾸는 어떤 소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작가는 금기된 것을 깨서 일상화하는 사람들이다. 지금은 경계가 없는 것처럼 은폐된 시기이다. 서구 문학이 일반적으로 던져준 문학에서의 룰이 있는데 그것을 각자가 썼던 화법으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 각자의 목소리를 회복해서 자신의 삶에 맞는 형식과 테크닉으로 새로운 문학을 형성해야만 한다. 우리 안에 내면화된 경계를 뛰어넘고 서로를 인정하고 다원주의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나는 세계시민이다. 한반도와 나의 문제를 세계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작가는 국경, 민족, 국가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자유로워지고 싶다. 한국에서 그런 자유를 누리고 싶다.’

현실은 그의 상념보다 젊은 우리들도 암울하기만 합니다. 평생 공공의 가치를 위해 헌신한 그에게 존경을 보냅니다.

▲ 소설가 황석영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1962년 고등학교 재학 중 단편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1989년 방북해 귀국하지 못하고 베를린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 체류했다. 1993년 귀국 후 7년형을 선고받았다가 1998년 사면 석방됐다. 장편소설로 <장길산>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손님> <모랫말 아이들>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등이 있다. 소설집으로는 <객지> <삼포 가는 길> <몰개월의 시> 등이 있다. 산문집 <아들을 위하여>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황석영의 맛과 추억>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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