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등대로 본 해양문명사

(15)서구 오리엔탈리즘 편견 바꾼 정화의 대항해와 중국 등탑…해양강국 영국 기술력 이식해 ‘아시아 맹주’ 꿈꿨던 일본

2018.06.01 20:41 입력 2018.06.01 20:46 수정

중국과 일본의 등대

중국 취안저우만 입구 진차이산에 있는 육승탑은 불탑 형태이긴 하지만, 14세기 동남아·인도·아랍 등과 교역하던 무역선을 위한 등대였다.

중국 취안저우만 입구 진차이산에 있는 육승탑은 불탑 형태이긴 하지만, 14세기 동남아·인도·아랍 등과 교역하던 무역선을 위한 등대였다.

■마호메트가 닻을 내린 곳

취안저우(泉州)는 오래전부터 ‘해양 실크로드 1번지’였다. 당시 취안저우는 세계의 ‘중심’으로, 외국인은 취안저우를 자이툰이라고 불렀다. 북송대인 1009년 지어진 청정사(淸淨寺)부터 찾았다. 문루부터 당대에 유행하던 중세 아랍의 건축 양식이다. 이곳에 아랍인이 몰려들었다는 증거다. 진장강(晋江) 강변에는 당나라 때의 개원사(開元寺) 쌍탑이 위엄을 뿜으며 서 있다. 개원사는 취안저우의 대표적인 절이다. 돌기둥에서 힌두 양식의 문양을 볼 수 있다. 개원사는 완전한 중국 절인데, 힌두 양식이 섞여 있다. 로마와 페르시아 문화가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왔듯 힌두 문명도 이 루트로 들어왔다.

서양인이 기술한 대양의 역사는 늘 서구 세계의 제패에 대해서만 기술해왔다. 유럽인이 주도한 대항해시대 이전에 이미 세계 체제는 아시아 중심으로 형성돼 있었다. 중국의 해양굴기 이후 다시 조망된 명대의 정화(鄭和)가 대표적이다. 정화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나 바스쿠 다가마보다 약 60년(혹은 80년) 앞서 아프리카 동북 해안에 도달했다. 대항해시대라는 유럽 중심의 사관을 뒤바꿀 엄청난 항해를 그가 이미 치러냈음을 중국 역사는 증언한다.

정화 정도의 해양력을 발휘하려면 항로 표지나 항해 기술 없이는 불가능하다. 항해 지도를 보면 그의 선단이 지형 등 자연 지표를 이용해 험한 물길을 헤쳐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바다로 흐르는 물길의 위험한 곳 근처 바위에 글씨를 써서 직접 항로를 표시한 중국의 고지도도 남아 있다.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 종교와 수도승은 뱃길 안전과 안내에 헌신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중국도 예외는 아니다. 남방항로가 이어진 광저우(廣州)나 푸젠성(福建省)의 바닷가 높은 산 정상에 세워진 불탑은 두말할 것 없이 종교 기능과 등탑 기능을 겸했다. 아예 항로 표지 자체만을 목적으로 한 등탑도 세워졌다.

1339년 취안저우만 입구의 진차이산(金釵山) 육승탑(六勝塔)은 탑이라고는 하지만 동남아시아는 물론이고 인도, 아랍 등과 교역하던 무역선을 위한 등대였다. 등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서구 중심적이었기에 육승탑이 등대로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동양에는 이 같은 불탑 형태의 등대가 곳곳에 있으며, 이는 이슬람 사원 미너렛의 등대 역할과 상통한다.

7세기에 세워진 광저우 회성사(이슬람 사원)에 있는 광탑이다. 이 광탑도 마찬가지로 불을 밝혀 무역선을 안내했다.

7세기에 세워진 광저우 회성사(이슬람 사원)에 있는 광탑이다. 이 광탑도 마찬가지로 불을 밝혀 무역선을 안내했다.

광저우의 광탑사(光塔寺)도 해양 실크로드의 무역선을 위한 등탑이다. 회성사(懷聖寺)는 7세기에 세워진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인데, 사원 내에 솟아 있는 약 37m의 흰색탑이 광탑이다. 이 지역은 아랍 상인이 집단 거주하던 곳으로, 무역선이 절 앞에까지 닿았다. 미너렛과 또 다른 전형적인 등탑 양식의 건축물이다. 광탑이야말로 ‘라이트’나 ‘파로스’에 해당할 것이다.

874년 상하이를 흐르는 마오허강 가운데 자리한 섬에 묘탑이 세워졌다. 송대인 1279년까지 불을 밝혔다. 전형적인 불탑으로, 등탑 기능을 더했다. 푸젠성 후이안현(惠安縣) 동쪽 끝에 위치한 숭무고성(崇武古城)은 온전하게 보존된 800년 역사를 간직한 명대의 성이다. 등대는 고성의 남동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산둥성 동북부의 옌타이에서 서쪽으로 가면 소도시 펑라이(蓬萊)가 나오는데, 이곳에 한국인 관광객도 자주 찾는 유명한 봉래각(蓬萊閣)이 있다. 봉래각은 예로부터 진과 한의 황제가 신선과 같은 삶을 찾기 위해 찾았던 인간선경(人間仙境)으로 불리던 명소다. 바로 이 봉래각에 보조(普照) 등대가 있다. 인근 해역에서 침몰 고려선이 다수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서 다수의 한국인 조상이 이 등대의 불빛을 바라보며 산둥반도에 당도했을 것이다.

■헨더슨, 런던에서 저우산군도까지

중국의 근대, 특히 바다에서의 근대는 해관(海關)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됐다. 해관은 나라의 관문으로 항구에 설치됐다. 해관에서 등대 기술자를 런던에서 초빙했는데, 첫 초빙 등대 기사는 데이비드 헨더슨(David Marr Henderson)이었다. 일군의 등대 기술자가 기술과 경험을 적용해 대영제국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1868년 중국에 온 헨더슨은 이듬해 상하이 남동쪽으로 16㎞ 떨어진 양쯔강변에 다치산(大奇山) 등대를 철제로 건축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중국 등대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된다. 근 29년에 걸쳐 헨더슨의 계획에 따라 중국 곳곳에 많은 등대가 건설됐다. 그가 감독한 등대가 34개이고, 그 외에 10개는 재건축한 것이다.

중국 근대 등대의 역사는 닝보, 상하이 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빈번한 항로인 저우산군도에서 시작된다. 1865년 세워진 저우산 칠리치(七里峙) 등대는 중국 본토에 건설된 근대 초기 등대 중의 하나다. 양무운동이 1861년 시작되고, 변법자강운동이 1898년에 일어났으니, 청 말의 이 같은 근대를 향한 열망 속에 서구식 등대가 도입되기에 이른다.

저우산군도에서 비교적 큰 섬이 저우산다오인데, 이곳에 중국에서는 유일하게 등대를 주제로 한 박물관(2005년 개관)이 있다. 그 옛날 실패했던 양무운동으로부터 무려 150여년이 지난 뒤 중국은 자신에 찬 모습으로 등대 분야에서의 등장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세계 등대로 본 해양문명사](15)서구 오리엔탈리즘 편견 바꾼 정화의 대항해와 중국 등탑…해양강국 영국 기술력 이식해 ‘아시아 맹주’ 꿈꿨던 일본

■타이완 해협서 쓰인 중국 등대의 첫 역사

본토의 19세기 등대와 달리, 타이완에서는 이미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근대 등대가 출현한다. 펑후제도의 어옹도(漁翁島) 등대가 그것이다. 청 정부는 선박 안전을 고려해 시위(西嶼)의 고대 요새에 석조 불탑을 세웠다. 타이완이 포모사(Formosa) 혹은 미려도(美麗島)로 독립적으로 남아 있는 조건하에 청 정부는 타이완 진출의 교두보로 펑후제도를 점령하고 1788년 첫 등대를 세운다. 18세기 건축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시아에서는 매우 빠른, 아니 가장 빠른 시점에 등대가 들어섰다.

타이완 등대의 2막은 일본의 점령과 더불어 시작됐다. 식민 통치 50년 동안 일본은 타이완에 무수한 등대를 세웠다. 일본에서 타이완의 지룽(基隆)항이나 타이베이(臺北)로 접근하자면 등대 없이는 불가능했다. 타이완의 등대는 일본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많은데, 대부분 지금도 제 기능을 하고 있다. 타이완의 첫 등대가 청에 의해 주체적으로 세워졌다면, 다수의 타이완 등대는 ‘제국의 불빛’으로 태어난 것이다.

일본 미야지마섬 해변에 있는 석등. 등대 역할을 했다.

일본 미야지마섬 해변에 있는 석등. 등대 역할을 했다.

■일본에 온 브런턴, 런던서 요코하마까지

히로시마에서 배를 타고 미야지마섬으로 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붉은 오토리(大鳥居, 신사 입구의 문)로 유명한 이쓰쿠시마(嚴島) 신사는 800만 신을 섬기는 ‘신들의 섬’에 떠 있다. 섬의 해변 길목에는 석등(石燈)이 즐비하다. 영락없는 전통 등대다. 이처럼 에도 시대나 그 이전 시대에도 각 항구나 포구마다 석등을 밝혀 배를 안내했다.

서양 등대가 도입되기 전 일본에 자체적으로 등대가 존대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오리엔탈리즘 극복이라는 과제는 일본 등대의 이해에서도 필수다.

메이지 정부는 등대 기술의 선도국이던 영국에 직접 지도받기를 원했다. 단시간 내에 해양강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당대 최고의 해양력을 갖춘 영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하여 영국으로부터 해양 용어를 시작으로 모든 해양 시스템을 이식받는 최단기, 초고속 전략을 채택했다. 동아시아 침략과 지배, 해양강국으로서의 위치 유지 등을 목적으로 하는 영국은 일본과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극동의 베이스캠프’로 일본을 설정해 집중적으로 산업기술을 지원했다.

이식 문화의 확산과 충돌이라는 세계사적 전환기에 그 선봉장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이 스코틀랜드 출신 리처드 헨리 브런턴(Richard Henry Brunton)이다. 당대의 엔지니어가 그랬던 것처럼 브런턴 역시 영국의 철도회사에서 경력을 쌓았다. 영국 무역위원회는 그를 일본 등대 건설 책임자로 선정했으며, 이로써 그는 메이지 시대에 선임된 일본 최초의 외국인 기술자가 됐다. 1876년 일본을 떠날 때까지 브런턴은 열세 개의 등대와 두 척의 표지선 건조를 추진했다. 단순히 등대 건설에 그치지 않고 등대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자신이 잘 알던 스코틀랜드 북부의 등대위원회를 벤치마킹했다.

브런턴은 등대는 물론이고 일본의 근대화 해양 전략이 추구해야 할 점을 실질적으로 가르치는 ‘바다의 교사’였으며, 통칭 ‘일본 등대의 아버지’가 됐다. 개항장 요코하마에서 브런턴의 존재는 각별했다. 그는 이 도시의 서구화에도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영국과 브런턴이 없었더라면 일본 근대 등대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양제국 영국의 글로벌적 확산 속에 아시아의 맹주를 꿈꿨던 일본의 비전과 야욕이 등대에서 겹쳐 보인다.

■바다로 퍼져나간 일본 제국의 빛

제국의 팽창에 따라 일본 등대는 바깥으로 확산을 거듭했다. 1898에는 타이완 식민지의 등대를 총괄하는 법을 제정했다. 1918년(다이쇼 7) 조선항로표지규칙을 발표해 조선 식민지의 등대도 법으로 총괄했다. 1925년에는 남양군도항로표지규칙을 정했으며, 남양청장관의 허락과 통제를 받도록 했다. 홋카이도, 타이완, 조선 그리고 남양군도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에 일본 등대국의 빛이 퍼져 나갔다. 조선총독부 관할의 등대국은 요코하마에 본부를 둔 대일본제국 등대국 산하의 홋카이도등대국, 오키나와등대국 그리고 남양군도등대국과 더불어 광대한 제국 등대에 속했다.

남양군도에 속하는 미크로네시아연방 추크(Chuuk)를 찾았다. 정글 안에 전형적인 영국식 등대, 바로 브런턴식 등대가 있다. 등탑에 오르니 수은회전식 등명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게 보인다. 그 위에 프레넬 렌즈가 놓여 있었을 것이다. 렌즈가 돌면서 추크 초호(환호초)로 들어오는 배를 향해 적어도 30㎞ 정도까지 나아가는 빛을 쏘았을 것이다. 이 등대도 ‘제국의 불빛’의 본령에 오른 것이다. 요코하마에 위치한 대일본제국 등대국에서 관할하던 남양군도등대국 소속 제국의 불빛이었다.

▶필자 주강현

[세계 등대로 본 해양문명사](15)서구 오리엔탈리즘 편견 바꾼 정화의 대항해와 중국 등탑…해양강국 영국 기술력 이식해 ‘아시아 맹주’ 꿈꿨던 일본


제주대학교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 해양사, 문화사, 생활사, 생태학, 민속학, 고고학 등 전방위로 연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해양문명사가. <독도강치 멸종사> <환동해문명사> <적도의 침묵>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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