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소주 입맛’에 죽비 내린 한 잔··· ‘돼지날’만 골라 빚는 서울의 술 ‘삼해소주’

2019.02.01 15:59 입력 2019.05.07 18:12 수정
김형규 기자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또 주당을 자처하면서도 대대로 내려온 서울의 전통술이 있다는 걸 까맣게 몰랐다. 안동의 소주, 서천의 소곡주, 전주의 이강주, 평양의 문배술처럼 서울 하면 삼해주(三亥酒)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조선시대 한양의 사대부 집에서 직접 빚은 삼해주로 손님 대접을 못하면 은근히 무시를 당했다니 그 맛에 더 관심이 갔다. 삼해주는 돼지날(亥日·해일)만 골라 빚는 술이다. 황금돼지해 설 명절을 맞아 가족과 함께 즐기기에도 더없이 제격인 술이 아닌가.

삼해소주는 구수한 곡물향과 부드러운 목넘김이 인상적인 서울 전통의 증류식 소주다. 삼해소주가 제공

삼해소주는 구수한 곡물향과 부드러운 목넘김이 인상적인 서울 전통의 증류식 소주다. 삼해소주가 제공

서울 북촌(원서동)의 삼해소주가(家)를 찾았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삼해소주 보유자인 이동복 여사의 뒤를 이어 아들 김택상 명인(68)이 쌀과 누룩, 물만 사용해 전통 방식으로 빚은 삼해주를 선보이는 공방이다. 삼해주는 탁주(막걸리)와 청주를 아우르는 말이다. 삼해탁주는 알코올 도수가 17도로 꽤 높다. 첫 모금에 쌉싸름한 자극과 새콤한 산미가 돋보인다. 처음부터 단맛이 치고나오면 하품으로 쳤던 조상들의 입맛이 반영된 술이다. 삼해청주를 증류해 만든 술이 삼해소주인데, 이 집을 대표하는 술이다.

조그만 잔에 담긴 삼해소주에선 맑은 향이 피어올랐다. 한 모금 머금자 은은한 단맛이 천천히 입안에 퍼졌다. 쌀밥 두세 공기를 압축한 것처럼 눅진한 단맛과 곡물향이 느껴졌다. 부드럽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는 알코올 도수가 45도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싸구려 희석식 소주에 길들여진 입에 ‘소주란 원래 이런 맛’이라며 한 대 후려쳐 깨우침을 주는 죽비 같은 한 잔이었다.

이어서 삼해소주를 두 번 더 재증류해 만든 알코올 도수 70도짜리 삼해귀주(三亥鬼酒)를 맛봤다. 고도주에서 흔한 독한 알코올 냄새 전혀 없이 묵직한 향이 올라왔다. 언제 삼켰는지 모르게 부드러운 목넘김은 최고급 위스키보다 낫게 느껴졌다. 입가를 오래 맴도는 맛은 복합적이어서 모자란 표현력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김 명인은 “깊고 단아한 맛에 빠져 삼해귀주를 찾는 마니아들이 계속 늘고 있다”고 말했다.

108일 발효시켜 만든 삼해탁주(왼쪽)와 삼해약주(오른쪽). 약주를 증류해 만든 것이 삼해소주다. 김형규 기자

108일 발효시켜 만든 삼해탁주(왼쪽)와 삼해약주(오른쪽). 약주를 증류해 만든 것이 삼해소주다. 김형규 기자

삼해주는 만드는 데 드는 공력과 정성이 각별한 술이다. 음력 정월 첫 돼지날을 기준으로 먼저 일주일 전쯤 ‘주모’(술의 어미란 뜻)라 부르는 밑술을 만든다. 밑술은 곱게 간 쌀과 누룩을 반죽해 만드는데 술을 잘 익게 해주는 촉진제 역할을 한다. 새해 첫 돼지날이 오면 밑술 위에 멥쌀과 누룩과 물을 더해 항아리의 3분의 1을 채운다. 36일 후 다시 돼지날이 오면 술을 걸러 찌꺼기를 빼내고 찹쌀과 누룩과 물을 더해 항아리의 3분의 2까지 채운다. 36일 후 세 번째 돼지날에도 찹쌀·누룩·물을 더해 항아리를 가득 채운 뒤 다시 36일을 더 기다려 네 번째 돼지날이 되면 비로소 108일간 세 번 덧술(삼양주)을 하며 발효를 거친 삼해주가 완성된다. 밥알이 위에 동동 떠 있는 맑은 술은 집안 어른께 먼저 맛보시라 권하고 조상께 제도 올린다. 이렇게 연초에 만든 삼해주를 한 해 동안 마시는데 시간이 가고 날이 따뜻해질수록 술이 쉬어버리니 일부를 증류해 만든 것이 바로 삼해소주다.

삼해주를 추운 겨울에 빚는 것은 술 익는 속도를 늦춰 술의 맛과 향을 깊게 하려는 의도였다. 지금은 온습도 조절이 용이해 사철 술을 만들 수 있지만 그래도 한겨울에 빚은 삼해주 맛이 확실히 더 낫다고 한다. 김 명인은 소주를 증류할 때 물을 타 희석하지 않는다. 오랜 노하우로 증류 시간을 조절해 정확히 도수를 맞춘다. 전통 방식을 고집하며 수작업으로 만든 삼해소주는 월 생산량이 300병 정도다. 삼해귀주는 많아야 30여병이 나온다. 김 명인은 “어란이나 과일, 채소 등 향이 진하지 않고 가벼운 음식을 곁들여야 술맛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삼해소주가는 탁주, 약주, 소주 등 다양한 삼해주를 시음하고 김 명인의 전통주 강의를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1만원에 진행한다. 비용을 더 내면 시음주 종류가 늘고 간단한 증류 체험도 할 수 있다. 김 명인과 함께 삼해주를 직접 만들고 빚은 술도 가져갈 수 있는 8~9회 수업(50만원)도 인기다. 삼해소주가는 아직 온라인 판매를 하지 않는다. 술을 사려면 북촌 공방(서울 종로구 원서동 4-9)을 직접 찾아야 한다. 삼해소주 4만9000원, 삼해귀주 20만원.

10여종의 탁주, 약주, 소주 등 다양한 술이 제공되는 삼해소주가의 시음 프로그램은 1만원부터 시작한다. 김형규 기자

10여종의 탁주, 약주, 소주 등 다양한 술이 제공되는 삼해소주가의 시음 프로그램은 1만원부터 시작한다. 김형규 기자

삼해소주가의 시음 프로그램에서 제공되는 이화주. 조선시대 양반가 부인들이 먹던 떠먹는 술이다. 김형규 기자

삼해소주가의 시음 프로그램에서 제공되는 이화주. 조선시대 양반가 부인들이 먹던 떠먹는 술이다. 김형규 기자
우리나라에 술을 빚는 양조장이 2000곳이 넘는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전통주인 막걸리와 청주·소주, 그리고 와인에 맥주까지 우리땅에서 난 신선한 재료로 특색 있는 술을 만드는 양조장들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이 전국 방방곡곡 흩어져 있는 매력적인 양조장들을 직접 찾아가 소개하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맛좋은 술은 물론 그 술을 만들며 고군분투한 사람들, 술과 어울리는 해당 지역의 음식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전할 예정입니다. 맛난 술을 나누기 위한 제보와 조언도 언제나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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