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한중일 노동자의 연대 기록

2019.10.01 10:43 입력 2019.10.01 11:51 수정

이우봉의 증언록에 실린 1953년 일본 도쿄 우에노공원 인근에서 한·중·일 시민들이 연대 행진을 벌이는 모습. 플래카드에는 ‘중국인 포로 순난자(희생자) 영위’라고 쓰여있다. 일본 동북지방에서 수습한 중국인 피해자 유골 600구를 본국에 송환하기에 앞서 절에 안치하러 가는 모습이다.   | 김정훈 교수 제공

이우봉의 증언록에 실린 1953년 일본 도쿄 우에노공원 인근에서 한·중·일 시민들이 연대 행진을 벌이는 모습. 플래카드에는 ‘중국인 포로 순난자(희생자) 영위’라고 쓰여있다. 일본 동북지방에서 수습한 중국인 피해자 유골 600구를 본국에 송환하기에 앞서 절에 안치하러 가는 모습이다. | 김정훈 교수 제공

해방 직후 일본의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한중일 노동자들이 연대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이들의 연대 투쟁은 삼국 노동자들이 함께 연대 행진하는 사진으로 확인됐다.

1일 김정훈 전남과학대 일문학전공 교수는 해방 직후 ‘한·중·일 서민의 연대 투쟁’을 보여주는 사진과 기록을 경향신문에 처음 공개했다. 김 교수가 입수한 조선인 징용자 출신 이우봉의 증언록 <재일 1세가 증언한다>라는 책에는 1953년 도쿄에서 촬영된 사진 한 장이 실렸다.

“3월26일 아침 우에노역에 도착한 유골은 중국인, 조선인, 일본인들이 합세하여 아사쿠사에 있는 히가시혼간지까지 전원이 행진하여 유골을 안치했다.”

사진의 사연은 ‘하나오카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5월29일, 아키타현 하나오카에선 굴을 마구 파헤치다가 강 밑바닥이 허물어지면서 갱내 조선인 노동자 11명과 일본인 노동자 11명이 숨진 ‘나나쓰다테 사건’이 벌어졌다. 1944년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중국인 포로 986명이 하나오카 광산에 강제 연행돼 수로변경과 댐 공사에 동원됐는데 상당수는 아사했고, 집단봉기를 일으키다 절반 가량인 420여명이 숨졌다. 일본의 양심적 작가 마쓰다 도키코의 기록으로 드러난 ‘하나오카 사건’이다. 이들 사건을 계기로 조선인과 일본인, 중국인은 ‘노동자 연대’를 맺게 된다.

이우봉의 증언록에 따르면, 일제 패망으로 실업에 허덕이던 조선인과 일본인 260여명은 1947년 하나오카 자유노동조합을 설립한다. 당시 노조위원장은 김일수라는 조선인이었고, 이우봉이 서기장이었다. 증언록에는 김일수가 하나오카 사건의 진상규명과 지원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중국인들은 물론 일본인들에게도 신뢰를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1949년 김일수는 100여명이 넘는 조합원들과 하나오카 관청을 찾아가 중국인 피해자 유골 수습을 요청하는 투쟁을 사흘간 전개한다. 그 결과로 중국인 피해자 유골수습과 본국 유골 송환 운동이 이어진다. 이우봉은 “하나오카의 조선인들은 자유노조 등을 기반으로 생활방어 투쟁의 선두에 서서 싸웠다. 하나오카의 중국인 순난자(殉難者) 유골수습·송환 운동은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이 일체가 된 거대한 운동으로 확대되었다”고 증언했다.

김일수는 1950년 마쓰다 도키코가 하나오카 피해 현장을 돌아볼 때도 직접 안내하면서 관련 집회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1953년에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본격적인 유골 송환이 시작됐다. 하지만 요시다 시게루 자유당 정부가 경찰을 동원해 위령제를 방해하는 등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사진은 전후 연대 투쟁을 시각적으로 증언하는 기록인 셈이다. <재일 1세가 증언한다>의 편집자 이국소는 후기에 “하나오카 강제연행 중국인 희생자의 유골 발굴과 송환 운동이 전후사에 획을 긋는 한·중·일 서민의 연대 투쟁”이었다고 밝혔다.

1960년대 초반 김일수는 월북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인이 일본 노동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는 내용을 담은 이우봉의 증언록은 출판사를 찾지 못해 2002년 자비 출판으로 세상에 빛을 본다. 2010년 이우봉이 숨진 뒤 최근 그의 아들이 일본의 연구자에게 책을 전해오면서 관련 내용이 새롭게 알려졌다.

김 교수는 “해방 직후 일본 지식인과 한·중·일 노동자의 연대가 있었고, 조선인이 노동운동의 리더가 되어 한·중·일 노동자의 피해 지원과 진상규명에 나선 사건”이라며 “한·일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 ‘풀뿌리 교류’가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재일 1세가 증언한다>에 실린 이우봉의 사진.    | 김정훈 교수 제공

<재일 1세가 증언한다>에 실린 이우봉의 사진. | 김정훈 교수 제공

1950년 당시의 김일수.   | 김정훈 교수 제공

1950년 당시의 김일수. | 김정훈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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