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기획회의>가 휴간을 번복한 이유는요…"

2019.11.02 13:21

11월이면 500호를 내는 <기획회의>는 출판계 현장의 시각과 소식을 담는 전문지다. 출판시장이 어렵다는 얘기가 나온 지는 한참 됐지만 그래도 이 바닥에서 책·잡지를 펴내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새롭게 출판의 꿈을 꾸는 사람들을 생각해 격주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쭉 발행해 왔다. 1999년 2월부터 소식지 형태로 나온 <송인소식>을 전신으로 해 2004년 <기획회의>로 제호를 바꾼 지금까지도 ‘돈 안 되는’ 잡지라고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기획회의>를 내는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61)의 20년은 그렇게 출판계 한가운데서 흘러왔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소임은 다하지 않았을까,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슬슬 정리할 준비를 하게 됐다. 500호를 끝으로 다음 세대의 일로 넘겨주려는 뜻을 내비치자 출판계 안팎에서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500호 발행 후 휴간을 공언했던 한 소장은 어쩔 수 없이 <기획회의> 발행을 이어가겠다며 뜻을 바꿨다. 이 잡지로 출판을 공부했다는 생면부지의 젊은 출판사 사장이 찾아올 정도로 ‘잊혀가는’ 듯 보였던 잡지의 생명력은 남아있었던 것이다. 한 소장을 지난 10월 29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연구소에서 만나 <기획회의> 휴간을 비롯해 잡지·출판시장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      사진/ 김태훈 기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 사진/ 김태훈 기자

-먼저 최근 월간 <샘터>와 월간 <인물과 사상> 휴간 소식처럼 <기획회의>도 휴간하려 했던 현실을 묻지 않을 수 없다.

“500호를 맞아 마무리를 짓는 일에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연구소도 직원들이 이끌어가는 시기가 됐으니 하나라도 부담을 덜어주려고 그랬다. 그동안 구상만 했지만 착수는 못했던 오랜 꿈이 책을 통한 교육활동인데 본격적으로 해보려는 계획도 있었다. 그런데 출판계 인사들이 여기저기서 그만두지 말라고 얘기하고, <기획회의>로 도움을 받았다는 후배들이나 독자분들이 ‘말도 안 된다’며 찾아오니까….”

-잡지나 책 같은 인쇄매체의 위기가 발행 중단을 고려한 주된 이유 아니었나.

“잡지로는 <기획회의>와 함께 교육현장에서 일하는 기획위원들을 중심으로 발행하면서 현장의 경험과 이야기를 담는 <학교도서관저널>도 내고 있다. 어느 잡지건 남는 것 없이 발행해온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반대로 전부터 내가 얘기해온 것은 과연 진짜 ‘종이매체가 사라질까’ 하는 문제였다. 전자책 때문에 종이책은 사라진다는 말이 나온 게 이미 십수 년이 지났는데 지금 종이책이 다 사라졌느냐는 거다.”

-종이에 찍어 펴내는 인쇄매체가 계속 살아남는다는 얘긴가.

“종이책 대신 전자책, 이렇게 양단 간에 중간이 없다고 하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전자매체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분화되는 것이다. 종이책과 잡지는 나름대로 장점을 키워갈 것이다. 전자책이 보급되기 전부터 줄곧 ‘전자책 쓰는 사람도 적어도 라면은 먹고살지 않겠나’라고 말해온 것도 기술 결정론적으로 기술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식의 주장 대신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세태를 짚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이 빠르게 바뀌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태어난 지 갓 100일이 지난 손자에게 보내는 편지 식으로 30개 정도 글을 썼다. ‘너희 세대는 휴머노이드와 함께 살아야 한다’ 같은 내용도 담겨 있다. 미래가 아니라 당장의 현실만 봐도 출판계 안에서 주문·발송 자동화 프로그램이 다 개발돼 있어서 출판사 사장은 집에서 아침 먹고 스마트폰으로 주문 들어온 것 보고 승인만 하면 자동으로 물류회사에서 발송하게 돼 있다. 정산된 돈도 자동으로 들어온다. 회계·물류직원들 일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이렇게 현실이 바뀌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또 일하며 살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단순히 기술 발전 때문에 잡지나 책이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콘텐츠 자체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잡지가 당면한 문제 중 하나는 광고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향을 찾는 것이고, 그래서 단행본과 잡지의 특성을 섞은 ‘무크’나 ‘북커진’ 같은 시도도 나왔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살아남으려면 하나의 주제를 강화해 그 잡지 콘텐츠만 봐도 내용과 흐름을 알 수 있게 하는 게 하나의 방안이다. 보다 더 중독성 강한 잡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기획회의>도 특집 주제를 강화하고, 필자나 편집위원들을 이전까지 50대를 주축으로 해오던 것과는 변화를 줘서 30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상상력을 담을 수 있게 했다.”

-비교적 출판시장이 덜 위축된 다른 선진국에서 모델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잡지시장이 크다는 가까운 일본만 봐도 이름 있는 월간지들까지 상당히 사라졌다. 일본 역시 시사지의 위기는 마찬가지다. 특종을 해도 독자들이 잘 보지 않게 된 데다 다른 대형 언론사에서 그 주제로 후속보도 경쟁에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밀리기 때문이다. 비단 시사지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지, 여성지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독자들이 원하는 게 아니라 출판사가 팔고 싶은 책들만 판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 고단샤(講談社)나 쇼가쿠칸(小學館) 같은 곳은 매출 전반이 만화에서 나와서 그 돈으로 적자 나는 문학이나 예술 잡지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잡지의 생명력이 짧아지니까 필력 있는 작가들에게서 원고를 받아도 잡지에 싣는 대신 작고 읽기 편한 단행본으로 내버린다. 그러니까 잡지는 더 죽어간다. 악순환이다.”

-결국 미래를 위한 고민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 문제는 출판업계의 내부사정에도 적용된다. 잡지는 글 잘 쓰는 전문가를 키워야 하는 시스템인데 편집자들에게 스스로 연재할 글을 한 번 기획해보라고 하면 ‘남의 글만 다루다 보니 잘 못쓰겠다’고들 한다. 그런데 나는 경력 있는 편집자에게 그동안 만든 책들 중 딱 5권만 골라보라고 하고 그 책들을 만들 때 저자와 있었던 에피소드나 경험 같은 걸 정리해 보라고 한다. 그럼 자연스레 생각이 정리되고 일을 하며 쌓인 노하우가 어떤 건지 알게 된다. 그걸 바탕으로 잡지 연재를 하고 연재를 모으면 책이 나온다. 그런데 지금 출판계 안에서는 그렇게 새로운 인재들이 잘 나오지 못한다. 당장 돈이 안 되면 안 시키고 경험도 쌓이지 않으니까.”

-현실이 바뀌는 걸 따라잡지 못하니 다음 세대의 취향도 따라잡지 못하게 될 것 같다.

“요즘 청소년들이 주로 읽는 웹소설 같은 걸 보면 앞으로 더욱 고난 속에 살아갈 것이라고 보는 젊은 세대의 모습이 반영돼 있다. 현재의 스펙 경쟁을 넘어 미래까지 암울할 것으로 보고 있는데 기존 문학은 ‘거장’이니 ‘후일담’이니 기성세대에 익숙한 범주에만 머물러 있다. 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 지문도 읽기 버거워하는 청소년들도 웹상의 소설들은 쉽고 공감이 가니까 술술 읽는다. 이런 소설들 중에는 상상력을 자극해 토론할 만한 주제도 많이 있어 생각을 이야기해 보라 그러면 아이들도 술술 말이 나온다.”

-그럼 반대로 잡지의 미래는 기술 발달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 필요해지는 메타 정보나 교육적인 콘텐츠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인공지능이 필요한 정보를 다 취합하고 분석·계산까지 해서 정답을 내주는 시대가 오면 상상력과 창의력이 더 필요해지고 그곳에서 수요도 생길 것이다. 그런 시대가 오면 사람은 서로 다른 의견들을 바탕으로 협력해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콘텐츠를 읽고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그 역할을 책과 잡지가 해줄 수 있다고 보고 있어서 ‘독서모델 학교’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고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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