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에 빛바랜 영화의 영광…이젠 ‘극장 울타리’ 벗어나야”

2021.06.22 22:03 입력 2021.06.23 09:20 수정

신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신철 신씨네 대표 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지난 21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영화계의 미래, 다음달 8일 개막하는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프로그램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신철 신씨네 대표 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지난 21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영화계의 미래, 다음달 8일 개막하는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프로그램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한국영화 중흥을 이끈 1세대 프로듀서다.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했으며, 김수용 감독의 연출부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88년 영화 기획사 ‘신씨네’를 설립,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 <결혼이야기>(1992), <은행나무 침대>(1996), <엽기적인 그녀>(2001) 등 화제작들을 제작했다. 다음달 8일 개막하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영화산업이 입은 피해는 막심하다. 영화 애호가들마저 밀폐된 공간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를 두려워하면서 극장으로 가는 발걸음을 끊었다. 대작들조차 흥행에 실패하면서 일부 영화는 극장 개봉을 아예 포기하고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직행했다. 백신 접종으로 팬데믹의 끝을 조심스럽게 전망하는 요즘 영화계의 관심사는 극장가가 과연 이전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느냐다.

신철 ‘신씨네’ 대표 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63)은 “극장으로 돌아오는 관객이 (코로나19 이전의) 40%가 될지 60%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손실을 입는 것은 어쩔 수 없다. OTT가 극영화 시장을 잠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 위원장은 또 “영화를 예술적으로, 산업적으로 다시 정의해야 한다. 음악의 영역을 보면 로큰롤 뒤에 랩이 나왔을 때 처음에 얼마나 이상했느냐. 영화도 그런 시대의 초입에 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극장 상영작만 영화의 범주에 넣어야 하며, 영화 생태계를 교란하는 넷플릭스 영화 등에 반대한다는 일각의 입장과 사뭇 다르다. “욕먹을 각오하고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국내 영화계 ‘1세대 프로듀서’인 신 위원장은 시나리오 완성, 스태프 선정, 제작·홍보 등을 총괄하는 프리프로덕션 시스템을 도입, 전근대적 제작환경을 바꿨다. 올해로 25돌을 맞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3년째 맡고 있다. “숭고하는 척하는 예술은 질색”이라며 영화 인생을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종식 후 영화계는

넷플릭스 등에 친숙해진 사람들
스마트폰으로 보는 영화도 익숙해
큰 화면용 구분하는 추세 심해질 것
스트리밍 글로벌 기업의 독점 우려

- 팬데믹이 끝나도 영화계가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있다.

“코로나19로 극장 영화는 제왕의 위치, 귀족의 위치를 잃었다. 넷플릭스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극장에 다시 가기는 어렵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절대 영화를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보게 되더라. 영화 하는 사람도 그런데 일반 관객들이야 훨씬 더할 것이다. 코로나19가 끝나면 극장 대형화면에서 볼 영화와 안 볼 영화가 갈릴 것 같다. <아이언맨> 정도가 되어야 극장에서 볼 것이다. 나머지 드라마 중심의 영화를 굳이 대형화면에서 봐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추세가 더 심해질 것이다. 영화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가진 글로벌 거대기업이 독점하는 게임이 될 거다. 국내에서 웨이브 등 토종 OTT를 키우겠다고 하는데, 그것으로 게임이 되겠느냐는 우려들이 나온다.”

- 플랫폼의 다변화가 불가피하다면 영화의 개념을 재정의해야 하나.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드라마 수준이 높아지면서 영화와 드라마를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코로나19로 드라마·영화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이 가속화됐다. 이제 동영상으로 만들어진 비주얼 스토리텔링은 전부 영화의 영역에 넣어야 한다. (넷플릭스로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옥자> 같은 경우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았다고 2017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시사회 도중 상영이 중단되는 등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칸도 넷플릭스 영화를 수용한다. 유튜브에는 사용자들이 VR(가상현실)로 들어가 역할극을 하는 영화들이 있고, 쌍방향 스토리텔링도 나왔다. (새로운 시도들이) 물밀듯이 쏟아지는데 (영화를) 극장 영화 울타리에 가둬서는 안 될 거 같다.”

“극장 영화만 퀄리티 높다?”

욕먹을 각오하고 말하자면 ‘아니다’
‘왕좌의 게임’ 왜 영화라고 못하나
한국에 5500억 쏟는 넷플릭스 따라
영화 하는 후배들 드라마 찍고 있어

- 영화산업의 재구성을 언급했는데, 영화계에서 좋아하지 않는다.

“욕먹을 각오하고 말하는 것이다. 극장 영화가 퀄리티가 높다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보면서 ‘이걸 왜 영화라고 못 부르지’라고 생각했다. 넷플릭스가 올 한 해 5500억원을 한국 콘텐츠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슬픈 현실이지만, 넷플릭스 사무실이 있는 종각에서 광화문까지 영화인들이 줄을 섰다는 소문이 돌았다. 영화 하는 후배들이 전부 넷플릭스 드라마 찍는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을 3년째 맡고 있는데 이유가 있나.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했지만 숭고한 척하는 예술은 질색이었다. 제작자 때도 영화제는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감독들은 왜 상 받는 것 밀어주지 않느냐고 서운해했다. 판타스틱영화제는 예술 하는 영화제가 아니다. 나는 ‘흥행사’니까 여기 오면 맞겠다고 생각했다.”

- 이번 부천영화제에서는 어떤 영화가 상영되나.

“47개국 258편이 상영된다. ‘이상해도 괜찮아’가 슬로건이다. 영화든 문화든 이상한 데서 창의력이 나오고 새로운 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적으로도 영화의 진화에 앞장서는 영화제가 될 수 있도록 바탕을 깔고 싶다. 3분짜리 세로영화 10편, VR XR3 80여편을 튼다. 전 세계 괴담을 수집하는 ‘괴담캠퍼스’ 프로그램이 있는데, 선발된 괴담들에 멘토를 붙여주고 그 프로젝트를 업그레이드시켜 영화로 만들어지게끔 거름을 주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작년에 시작했는데, 우리가 지원해 만든 영화 9편을 이번 영화제에서 튼다. (<곡성>을 만든) 나홍진 감독이 제작하고 태국 감독이 만든 <랑종>도 월드프리미어로 상영된다. 나 감독이 장편영화를 만들기 전 단편 <한> <완벽한 도미요리> 등을 부천에서 상영했다.”

3년째 부천영화제 집행위 맡았는데…

“숭고한 척하는 예술은 질색”
판타스틱영화제, 예술 하는 곳 아냐
올해 슬로건은 ‘이상해도 괜찮아’
오타쿠 등 ‘언더도그’ 키우는 상영장

- 부천영화제의 위상과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나.

“아시아 쪽에서는 가장 큰 판타스틱영화제로, 언더도그를 키우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어디서 떨어진 사람들, 오타쿠들을 건져올려 관객들과 만나게 하고 싶다. 부천지역 2개 극장, OTT 웨이브를 통해 영화를 상영할 계획인데, 코로나 때문에 극장 상영이 이뤄질지는 하늘에 달렸다.”

- 영화계에는 어떻게 발을 들여놓았나.

“감독 지망생이었다. 김수용 감독의 <도시로 간 처녀> 연출부로 시작했다. 1986년 피카디리극장 선전실에 근무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관객들 대부분이 쓸쓸해서, 마음이 상해서 온다. 이전에는 대중에게 예술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관객들은 위로받길 원하는 거다. 예술을 강요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또 감독들이 집 팔아서 만들었다는 한국 영화들을 보니까, ‘관객들 보라고 영화를 만드신 건가’ ‘망하려고 작정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기획자(프로듀서)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국 시장에서라도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를 넘도록 해야겠다는 목표를 잡았다.”

- 한국 영화 제작 시스템은 어땠나.

“그때 제작자들은 외화 쿼터를 받으려고 한국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허가받은 영화사가 20개 있었는데, 폭탄이 스무개 있었으면 다 폭파시켜야 한국 영화가 산다고 생각했다.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영화사들이 외화 수입을 위해 한국 영화를 땜빵으로 만들었다.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쉽게 만들었다. 현장에선 제작비를 반으로 갈라 한쪽 주머니에 넣고, 반만 제작비로 썼다. 주머니에 넣은 돈은 어디로 상납했는지 모르겠다. 관객들과 승부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뒷거래, 요정정치, 그때 사회상과 비슷한 거다.”

- 제작자로 한국 영화의 전근대적 제작 시스템을 바꿨다는 평가를 듣는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가 데뷔작이다. 한국 영화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결혼이야기>(1992)는 감독도 신인이고 현장도 거의 신인이었다. 과거 시스템에 익숙한 사람들이 다 밀려났다. 제작비를 현장에서 다 쓰고 정산도 합리적으로 했다. 기획과 시나리오 작업도 길었다. 초짜라 망할 거라고 했지만 메가히트(서울 관객 52만6000명)를 했다. 지금으로 치면 1000만명이다. 이후 한국 영화 제작 방식도 새 시스템으로 바뀌는 등 새 물결이 시작됐다.”

- 많은 화제작을 기획·제작한 만큼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다.

“<구미호>(1994)는 컴퓨터그래픽(CG)을 처음 도입한 한국 영화다. 감독에게 시나리오 고치라고 했는데, 속았다. 하하. 찍으면서 고친다더니 안 고쳤더라. <구미호>에서 배운 CG를 <은행나무침대>(1996)에서 제대로 썼다. <거짓말>(1999)은 장선우 감독한테 미안하다. <나쁜 영화>(1997) 등 과거 작품 때문에 외설 논란 등 구설에 오르기 싫다고 하는 걸 꼬셔서 제작하게 했다.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교황청 신문에 의해 봐서는 안 되는 영화로 찍혔다. (야하다는 이유로) 개봉 전 세운상가 등에서 CD로 엄청 풀렸고, 외설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해서 봤는데, ‘어휴 저걸 왜 만들었지’라고 했다.”

- <엽기적인 그녀>(2001)는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않았나.

“여름영화 시장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눌렀다. 일본에서도 홍콩에서도 난리가 났다. (PC통신 나우누리에) 연재 중이었는데 제작이사가 재밌다고 해서 연재도 끝나기 전에 샀다. 곽재용 감독이 두 달 만에 각색을 해왔는데, 너무 잘했더라. 곽 감독의 멜로감성과 장난기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애초부터 (주연배우로) 전지현과 차태현을 찍었고, 두 사람은 한 소속사에 있었다. 소속사에서 계속 오케이를 안 하니, 화가 나서 다른 사람을 캐스팅하자는 생각까지 했다. 나중에 소속사 사장이 ‘여자 캐릭터가 너무 강해 다음에 뭘 시킬지 고민이 되어서 결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하더라.”

- <엽기적인 그녀> 성공 이후 한동안 제작을 쉬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한국 영화를 글로벌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브루스 리(이소룡) 부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신체조건이 같은 배우가 연기를 하고, 얼굴을 입혀 영화를 찍는 방식이었다. 브루스 리의 부인과 판권 계약이 되고 일본 게임회사 회장도 투자하겠다고 해 미국에 갔다. 4년 동안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기술 개발도 했지만 거기서 영화 할 만큼 실력이 안 됐다. 계약도 스테이지마다 유족 허락을 받는 등 독소조항이 있었다. 무식하고 준비가 덜 돼 벌어진 것이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번 돈을 다 까먹었다.”

K팝 나오듯 K무비 나와야

요즘 자기 시각 살린 작품 안 보여
도발적 시도 대신 ‘공장형 영화’만
포스트 ‘박찬욱·봉준호’ 나오려면
용감한 투자 시스템 뒷받침돼야

- 국내 장르 영화 경향을 어떻게 보나.

“너무 도식화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자기만의 시각을 갖고 도전하는 작품들이 별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 시나리오를 보고 투자를 도왔다. 투자를 받은 뒤 ‘아니 이것도 투자가 됐단 말이야’라고 놀랐다. 그땐 도발적인 시도가 많았다. 한국 영화가 굉장히 다이내믹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요즘은 공장형 영화만 나온다.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다.”

- 하지만 박찬욱·봉준호 감독은 세계적인 거장이 되지 않았나.

“우리 문화와 예술의 수준을 올려준 사람들이다. 자랑스럽다. 봉 감독의 <기생충>을 보고 ‘최고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을 뒤따르는 마스터(거장)를 만들어내려면 용감한 비전이 있는 투자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제작사에서 시나리오를 신별로 채점해 점수를 매긴다는데, 그렇게 하면 퀄리티가 떨어지는 작품은 나오지 않겠지만 독특한 영화도 안 나온다. 해외 영화인들이 ‘한국 영화 중 특별하게 본 영화가 없어진 거 같다’고 한다. 할리우드를 추월하는 모델을 만들어야 할 때가 됐다. K팝이 나오듯이 K무비가 나와야 한다.”

- 한국 영화계를 함께 이끌었던 이춘연 씨네2000 대표가 별세했다.

“춘연이 형은 신씨네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다. ‘너 신씨잖아’, 그래서 신씨네가 됐다. 스크린쿼터 지키기 운동 등에 앞장섰고, 젊은 제작자들이 맞닥뜨리는 어려움, 곤란한 일을 자기 일처럼 해결해주려는 친형 같은 사람이었다.”

- 영화제작자로서 목표가 있다면.

“나이가 드니까 죽기 전에 예술가인 척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2018), <원더풀 라이프>(1998) 같은 영화들이 좋아지더라. 죽기 전 해야 할 프로젝트가 2개가 있다. 그걸 마무리 지어야 한다. 자칫 뻥쟁이가 될 수 있으니 나중에 말하겠다.”

[논설위원의 단도직입]“OTT에 빛바랜 영화의 영광…이젠 ‘극장 울타리’ 벗어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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