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이건희미술관’ 짓겠다는 건, 기증의 뜻 헤아리지 못한 발상”

2021.06.29 21:48 입력 2021.06.29 21:50 수정

정준모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인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이건희미술관’ 건립 여부 등의 발표를 앞두고 지난 24일 경향신문사 여적향에서 국립미술관 건립을 둘러싼 쟁점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미술평론가인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이건희미술관’ 건립 여부 등의 발표를 앞두고 지난 24일 경향신문사 여적향에서 국립미술관 건립을 둘러싼 쟁점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전시기획자(큐레이터)이자 시각문화·정책 비평가,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공동대표다. 중앙대, 홍익대 대학원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등을 지냈다. ‘기무사에 미술관을 원하는 사람들’ 모임과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총감독 활동을 통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청주관의 설립 계기를 마련했다.

‘이건희미술관’을 둘러싼 논란과 유치전이 점입가경이다. 지난 4월 말 ‘이건희컬렉션’ 기증 후 문화체육관광부는 고인의 기증 뜻을 기린다며 섣부르게 미술관을 신설할 뜻을 밝혀 논란을 자초했다. 국립미술관 신축·건립이 지니는 무게·파장·현실 등을 고려하지 않은 서툰 행정이 소모적인 논쟁을 부른 셈이다. 문체부는 몇 차례 연기 끝에 “7월 초에 논의 결과를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그사이 논쟁은 지자체들의 유치전으로 번졌다. 30여개 지자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서 신설될 미술관 유치전을 벌이고 있다. ‘이건희미술관’이 ‘미술관’이 될지, ‘전시실(관)’이 될지 결정이 안 됐는데도 일단 유치 경쟁에 나선 것이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둔 단체장들의 ‘공약 한건주의’와 맞물리면서 그 행태가 자못 볼썽사납다.

이건희컬렉션을 시민에게 어떻게 향유시킬 것인지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는 실종됐다. 최소 수백억원의 예산이 투입될 ‘국립이건희미술관’을 세워야 할까? 기증의 뜻을 기리는 합리적인 다른 방안은 진정 없는 것인가? 이건희 삼성 회장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 리움과의 차별성은? 등등 논의해야 할 지점들은 많다. 미술관의 성격, 소장품 구성과 향후 수집방향, 국립미술관으로서의 역할 등에 관한 토론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이렇게 복잡해진 원인은 유례가 드문 이 회장의 기증을 계기로 한국 미술계 수준을 한 단계 높일 논의·토론의 장을 만들어야 할 문체부가 제 역할을 못해서다. 이제 미술계에선 자연스럽게 ‘국립이건희미술관’의 현실적 한계들을 지적하며 이 회장의 이름을 딴 특별 전시실을 갖춘 ‘국립근대미술관’의 건립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미술계의 여론을 듣고자 미술평론가인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64)과 지난 24일 만났다. 정 평론가는 우선 “이건희컬렉션 기증의 뜻을 기리자면 문체부가 나서지 말고 전문기관인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에 맡겨야 한다”며 “또 국립미술관을 세우고자 한다면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국립근대미술관’을 건립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이건희미술관’을 둘러싼 논란과 쟁점을 살펴보고, 기증의 뜻을 기리기 위한 방안들, ‘국립근대미술관’ 건립 주장, 국내외 미술관의 현실 등을 짚어봤다.

- ‘이건희미술관’ 건립 여부 등을 문체부가 7월 초에 발표한다. 최근의 논란을 어떻게 보는가.

“이건희미술관 건립을 검토한다는데 도대체 어떤 성격·형태의 미술관인지 종잡을 수 없다. 현실적 문제가 많은데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어떤 소장품을 토대로 연구·전시 등을 할지, 운영의 지속 가능성은 어떠한지도 살펴야 한다. 기증품 2만3000점의 시대·장르·특성 등은 면밀하게 분석했는지 묻고 싶다. 그런데 이런 절차나 과정을 거쳤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별도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했다. 중앙박물관·현대미술관 내에 이 회장의 뜻을 기리는 특별 전시실 마련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귀한 것이라면 모두 함께 모아 전시하는 중세시대 분더캄머(Wunderkammer) 형태의 ‘미술관’ 건립으로 확대됐다. 기증품 중 미술품은 3000여점으로 이미 전국 미술관에 기증됐다. 기증품들을 다시 한곳에 모으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런데 아직 방침이 정해지지도 않은 ‘이건희미술관’을 놓고 지자체들은 서로 유치하겠다고 나섰다. 미술품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먼 일이다.”

‘이건희미술관’ 두고 말이 많은데

기증 2만3000점 면밀한 분석 없이
섣불리 국립미술관 건립 꺼내 논란
문체부 말고 전문기관이 맡아야
이미 전국 곳곳에 기증된 작품들
다시 한곳에 모으는 건 비현실적

- 미술관 건립 여부를 놓고 찬반 주장이 양립하고 있다.

“귀중한 이건희컬렉션의 기증은 역사적 일이고, 숭고한 뜻을 기리자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그 선택이 ‘이건희미술관’ 건립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 유족들은 심사숙고 끝에 중앙박물관과 현대미술관, 전국 공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이 과정에서 미술관 설립 등 조건을 걸지 않은 것은 순수한 기증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해당 기관 소장품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 뜻도 있을 것이다. 또 이 회장 이름을 딴 기관이 세워질 경우 지속 가능성, 향후 발전 정도 등도 고려했을 것이다. 그 기증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리움이 운영 중인데 이건희미술관은 어떤 차별성이 있나, 리움의 분관이 아닐까.”

- 기증이 설립의 기반이 된 해외 미술관들은 어떻게 그 뜻을 기리고 있나.

“기증의 뜻을 기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기증 문화 활성화에도 중요하다. 외국의 주요 박물관·미술관은 소장품의 80% 정도가 기증품이다. 미술품은 공공재이고 민족·국가의 문화적 상징자산이라는 생각으로 기증이 활발하다. 소장품 구입 예산이 한정적이다보니 주요 기관들도 기증을 받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제시한다. 기증으로 시작된 해외의 박물관·미술관들의 경우 컬렉터 이름을 명칭에 사용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론 중성적 명칭을 붙인다. 이는 기증받은 기관이 기증 이후의 책임을 지겠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려는 것이다.”

- 이건희컬렉션의 기증을 기리기 위한 대안적 방안이 있다면.

“중앙박물관·현대미술관이 별도의 전시실(관)을 마련해 기증품의 조사와 연구·전시 등을 지속적으로 하면 된다. 리움 등과의 협업을 통한 기획전, 기획전의 지방 순회전 등 다양한 방안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기증의 뜻을 높이고, 나아가 한국 미술계 발전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선 ‘국립근대미술관’ 건립 검토가 필요하다. 기증품 중 근대미술품 1000여점과 현대미술관 소장 2000여점 등을 바탕으로 한 미술관이다. 기증을 ‘씨앗’으로 근대미술관이 건립된다면 그 자체가 기증 의미를 두고두고 크게 기리는 일이다. 미술관에 특별실 등을 마련할 수도 있다. 이건희미술관 건립보다 여러모로 합리적이다.”

중세 분더캄머 같은 미술관 대신…

조건 없는 순수한 기증 기리면서
한국 미술계 발전을 고려한다면
‘국립근대미술관’ 건립 검토 필요
부지로 정부서울청사·송현동 적절

왜 하필 ‘국립근대미술관’ 주장하나

기증품 중 상당수가 근대 미술품
‘근대’ 건너뛴 현대미술관 비정상
이번 기회로 사라진 근대 회복하고
학제 간 융복합 중추기관 만들어야

- 하필 왜 국립근대미술관 설립인가.

“근대미술관 설립 주장은 해방 이후 꾸준히 제기돼왔고, 이번엔 이건희컬렉션 기증품 중 상당수가 근대미술품이어서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은 외국과 달리 근대와 현대 미술을 함께 관장한다. 문명국가 중 우리처럼 근대미술관 없이 현대미술관을 먼저 세운 나라는 유례가 없다. 역사란 켜켜이 쌓아 올려져야 하는 것인데 근대라는 주춧돌 없이 현대만 쌓아 올리는 일은 부질없다. 고대와 현대를 잇는 다리가 근대지만 일제강점기 등의 영향으로 연구가 부족했다. 근대미술관은 역사적으로, 미술사적으로 잃어버린 근대를 되찾는 일이다. 사라진 근대를 회복하고, 지금의 왜곡된 상황을 바로잡는 일이다. 해외의 경우 프랑스의 오르세, 영국의 테이트 브리튼, 일본의 국립근대미술관, 독일의 20세기미술관 등이 근대미술관으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 근대는 보는 시각이 다양하고 시각차가 큰 경우도 있는데.

“그렇다. 정치적 시각에 따라 해석과 인식의 차이가 있고, 이는 분열과 진영 간의 대립이란 폐해를 낳는다. 미술사적으로 보면 일제와 친일 청산을 위해 친일 미술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깊이 있게 이뤄지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항일 미술이나 지사들의 삶을 대변하는 미술활동·문화예술운동은 연구가 부족하다. 근대미술관은 일제강점기 근대문화유산의 복원과 보존·활용 측면에서도 필요하다. 근대사 복원을 위해 학제 간 융복합을 실천하는 중추기관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 근대미술관 설립을 주장하는 ‘국립근대미술관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안다.

“현재 670여분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있다. 모임 결성을 알린 지 3일 만에 400여명이 참여 의사를 밝힐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미술인 외에 문인·역사학자·디자이너·컬렉터·문화예술경영 종사자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함께한다.”

- 모임의 향후 계획은.

“소장품 연구, 부지 검토 등을 해왔다. 앞으로 건립의 필요성을 알리는 토론회를 열고, 근대미술작품 기증 캠페인을 전개할 예정이다. 건립 부지는 여러 곳을 검토한 결과 광화문의 정부서울청사와 옛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터인 송현동 부지가 적절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 지자체들의 ‘이건희미술관’ 유치전이 과열되고 있다.

“이미 운영 중인 각 지자체의 미술관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되돌아보고 유치전에 나섰으면 한다. 지자체장들과 지자체는 미술관의 내용, 어떤 미술관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이건희미술관’이란 이름만 보는 기막힌 상황이다. 내년 지방선거로 더 과열된 것 같다. 향후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 입지 선정 때는 지자체의 미술관 운영실태를 핵심 기준으로 삼았으면 한다.”

- 전국 지자체 미술관은 문화시설이 적은 지방에서 그 중요성, 역할이 막중하다.

“지자체장의 관심 부족으로 건물만 번듯할 뿐 상당수가 거의 방치된 실정이다. 전문 인력은 물론 기본적인 항온항습·조명시설 등을 갖추지 못한 곳도 있다. 비가 새는 전시장, 소장품 구입예산이 아예 없는 미술관도 있다. 미술관을 그렇게 운영하는 지자체장이 이건희미술관 유치에 나서다니….”

- 1990년대 중반 ‘기무사에 미술관을 원하는 사람들’ 모임을 결성해 기무사 터에 지금의 현대미술관 서울관 설립을 이끈 것은 문화예술계에서 유명한 일화다.

“많은 분들이 함께 집요하고 끈질기게 주장해 결실을 맺었다, 근대미술관 건립 모임에서 많은 분들이 그때 얘기를 한다. 당시 현대미술관 공무원 신분임에도 모임의 간사를 자처할 정도로 무모했지만 다행히 징계는 피했다(웃음). 부침도 많았지만 이제 많은 시민들, 외국인들이 서울관을 찾는다. 근대미술관도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

- 미술품 물납제 도입도 선구적으로 주장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술품 물납제를 이건희컬렉션 기증과 연관짓는 이들이 많았는데, 물납제는 진작부터 도입을 주장해왔다. 1998년 영국·미국 등 선진국 미술관들이 구입 예산의 한계를 극복하며 소장품을 확보하는 방안을 연구한 결과다. 최근 관련 논의가 많아 보람을 느낀다.”

우리에게 필요한 미술관이란

번듯한 건물만 세워둘 게 아니라
소장품 구입 등의 한계 극복하고
전문성 갖춰 조사·연구 이뤄져야

- 문화가 중요한 시대라고들 한다. 이 시대 미술관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은.

“국공립이든 사립이든 미술관은 비영리 공공성을 전제로 문화의 수호자, 창조적인 영감의 원천으로 작동해야 한다. 대중과의 교감도 소중하지만 주요 미술품을 전문성 아래 조사·연구하는 기능이 중요하다.”

- 최근 ‘아트테크’가 관심을 끈다.

“마치 ‘임도 보고 뽕도 따는 격’으로 생각하는데, 모든 재테크가 그렇듯 자신의 책임성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반갑지만 그림을 구입하면서도 그림에 대한 기본적 공부 등에는 무심한 듯해 아쉽기도 하다.”

- 미술관, 미술작품과 더 친숙해지는 방법을 조언한다면.

“미술관의 문턱이 높다고들 하지만 관람객 스스로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 미술관을 찾아 작품을 관람하는 것은 경험의 축적이다. 작품을 통해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다. 예를 들어, 전시장의 작품들 중 하나를 공짜로 가지라면 어떤 것을 가질까 하는 생각을 했으면 한다. 골랐다면 그 많은 작품 중 왜 그것을 골랐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라. 이렇게 축적하다보면 미술관을 찾고, 작품을 관람하는 재미가 더 쏠쏠해질 것이다.”

[논설위원의 단도직입]“국립 ‘이건희미술관’ 짓겠다는 건, 기증의 뜻 헤아리지 못한 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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