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 ‘장애인 배척’을 파헤치다

2023.05.26 14:39 입력 2023.05.26 21:48 수정

홉스·로크·칸트서 현대 롤스까지

위대한 정치사상가 이론 속 담긴

비장애인 중심 ‘시민’ ‘주체’ 설정

이분법적 잣대 통해 ‘장애 배척’

·

“사회 구성원 인정·포함 넘어

사회 결정에 참여를 요구해야”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가 지난해 4월21일 서울 경복궁역 3호선 열차에서 장애인 예산과 이동권을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가 지난해 4월21일 서울 경복궁역 3호선 열차에서 장애인 예산과 이동권을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장애의 정치학을 위하여

바버라 아네일·낸시 J 허시먼 지음, 김도현 옮김 | 후마니타스 | 632쪽 | 3만5000원

현대 사회는 시민 개인이 ‘이성적 주체’라는 대전제 위에 세워졌다. 인간은 모두 평등한 권리를 가진 자립적 존재라는 전제에서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며 경쟁하는 합리적 존재라는 전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했다. 이 ‘주체’는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위하는 비장애인이었다. 장애인은 ‘주체’가 될 수 없었고, 그래서 ‘시민’이 될 수 없었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는 장애인에게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있으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정치학 교수인 바버라 아네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 교수인 낸시 J 허시먼은 <장애의 정치학을 위하여>에 엮은 정치학자들의 논문을 통해 장애를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장애인을 ‘시민’에 포함시키려 한다. 장애인언론 비마이너 발행인이자 노들장애인야학 교사인 김도현이 번역했다.

장애인의날을 하루 앞둔 지난 4월19일 김동림 김포장애인야학 교감이 서울 서대문구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저상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문재원 기자

장애인의날을 하루 앞둔 지난 4월19일 김동림 김포장애인야학 교감이 서울 서대문구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저상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문재원 기자

저자들은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이마누엘 칸트, 존 스튜어트 밀, 데이비드 흄, 한나 아렌트, 존 롤스 등 위대한 근·현대 정치사상가들이 장애인을 배제한 채 비장애인 중심으로 ‘주체’를 정의했다고 비판한다. 비장애인은 자유, 평등, 정의의 원칙을 적용받지만, 장애인은 자선과 시혜의 원칙을 적용받았다.

17세기 사상가 로크는 한국 중·고교생이 배우는 사회계약설을 주장했다. 로크는 장애인에 대해 “그는 결코 (이성을 가진) 자유인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의 정상적인 경로에서 벗어나 발생한 결함을 지니게 되면, 누구도 그처럼 성숙한 정도의 이성에는 도달할 수 없으며”라고 적었다.

20세기 사상가 롤스는 평생 ‘정의론’을 탐구한 거장이다. 롤스는 ‘원초적 입장’의 한계를 설정하면서 장애인을 배제했다. 롤스는 로크처럼 장애를 정상적이지 못한 ‘결함’으로 봤다. 롤스는 “여기서 나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볼 때 정상적이고 충분히 협력적인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영구적인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를 지닌 이들은 제쳐 둔다”고 적었다.

이처럼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시민(비장애인)’과 ‘비이성적이고 의존적인 타자(장애인)’의 구분은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어쩌면 21세기까지도 이어져왔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가 몸과 정신, 욕구와 의지를 나눈 이원론에서 출발했다. 이성은 정신의 의지로 몸의 욕구를 통제하는 능력이라고 여겨져왔다.

장애적 시각은 정신의 의지만으로 구성된 근대적 주체를 재정의하려 한다. 비장애인 중심적 이원론에 도전장을 던지며 “몸과 정신은 동일한 실체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한다. 투렛증후군, 뇌전증 발작, 저혈당 쇼크 등의 장애에서 몸이 정신에게 특정한 행위를 취하도록 명령하는 ‘몸의 의지’를 찾는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원들이 6세 발달장애 아들을 안고 투신해 목숨을 끊은 40대 어머니 등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해 5월26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추모제를 열고 있다. 이준헌 기자

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원들이 6세 발달장애 아들을 안고 투신해 목숨을 끊은 40대 어머니 등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해 5월26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추모제를 열고 있다. 이준헌 기자

21세기에서 장애에 대한 인식은 ‘몸에 결함이 있는 개인의 문제(의료적 장애 모델)’에서 ‘사회·정치적 장벽의 문제(사회적 장애 모델)’ 쪽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장애 관점에선 보행에 어려움이 있어 휠체어를 이용한다는 사실 자체는 ‘장애’가 아니다. 많은 건물에 경사로, 승강기, 자동문이 없다는 사실이 ‘장애’를 만든다. 사회에서 부당하게 배제됐던 장애인에게 이런 관점은 중요한 진전이다.

글자를 읽기 어려워하는 ‘난독증’은 장애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측면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문자 언어가 없는 사회에선 난독증이란 장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이 문자를 읽고 쓰는 능력은 선천적으로 가진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이다. 난독증은 ‘결함’이 아니라 ‘다양성’일 수 있다. 하지만 문자 중심 교육을 당연시하는 학교에서 난독증을 가진 학생은 실패와 좌절을 거듭한다.

저자들은 장애를 ‘비극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인식에 도전해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심상으로 사고하는 능력, 높은 공간적 상상력, 설득적인 대화 능력이 난독증과 결부돼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하는 식이다. 하지만 장애를 과도하게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면 더 심한 주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담겼다. 인기 TV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주인공인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 천재성을 가졌다는 설정에 잘못된 편견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저자들은 장애를 “사회적 공간 내에서 살아가는 몸들의 상호작용 과정들 내에 존재한다”고 본다. 시민의 권리를 이성의 유무가 아니라 “다른 개인들과의 신뢰, 의사 소통, 협력의 관계망”에서 찾으며, 장애인이 단순히 사회 구성원으로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요구한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한국에 등록된 장애인은 지난해 기준 265만3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5.2%이다. 사회가 고령화하며 증가하는 추세이다. 지금 비장애인이라도 언제든 불의의 사고로, 신체의 노화나 질병으로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실제 서울복지포털에 따르면 장애 원인의 88.1%가 후천적 요인이었다. 장애가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란 사실은 통계가 증명한다.

김도현은 저자 중 한명인 데버라 스톤의 서문에서 “우리는 모두가 그리고 언제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상호 돌봄과 도움이 우리 인간 존재에게 공기나 물과 같음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야만 한다”는 문구를 인용하며 이런 후기를 썼다. “돌봄과 사랑이라는 단어가 장애인 당사자들에게도 자연스럽고 평안하게 다가올 수 있는 세계란 지금과는 다른 세계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세계를 함께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책과 삶]현대사회 ‘장애인 배척’을 파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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