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엘르’ 괴물 같은 여성, 괴물 같은 배우

2017.06.12 21:40 입력 2017.06.12 21:44 수정

[리뷰]영화 ‘엘르’ 괴물 같은 여성, 괴물 같은 배우

첫 장면부터 끔찍하다. 검은 화면 뒤로 소리만이 들려온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묵직한 소리, 여성의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 남성의 성적 절정에 오른 소리…. 화면이 밝아지면 스키 마스크를 쓴 남자가 바지를 끌어올리고는 뒤돌아 밖으로 나간다. 남겨진 여자는 혼자 옷을 추스른다. 방금 일어난 일은 성폭행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미셸(이자벨 위페르)이란 여성의 대응 방식이 남다르다. 그녀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그저 깨진 찻잔을 치우고 몸을 깨끗이 씻을 뿐이다. 모처럼 찾아온 아들과의 저녁 식사에서도 아들의 동거녀와 주택 대출 자금에 대한 잔소리를 할 뿐이다.

유명 게임 회사의 최고경영자인 미셸은 출근도 정상적으로 해 평소와 다름없이 직원들을 독려한다. 다만 약식 건강검진을 받는 것처럼 성병 검사를 하고, 생활필수품을 사듯 호신용 스프레이와 도끼를 구입한다.

[리뷰]영화 ‘엘르’ 괴물 같은 여성, 괴물 같은 배우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먼저 선보였던 <엘르>(감독 폴 버호벤)는 문제작이다. 미셸의 모호한 행동들은 불쾌함과 통쾌함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다. 버호벤 감독은 <토탈 리콜>(1990), <원초적 본능>(1992), <스타쉽 트루퍼스>(1997)처럼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도 할리우드스럽지 않은, 어딘지 뒷맛이 개운치 않은 영화들을 만들어낸 적이 있다. <엘르> 역시 미국에서 촬영하려다가 “도덕관념을 넘어서는 역할을 맡을 미국 배우가 없으리라 생각했다”며 프랑스의 이자벨 위페르를 캐스팅했다. 그렇게 <엘르>는 기존의 윤리의식,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 상업영화의 전형적 플롯을 넘어선다.

분명한 것은 미셸이 ‘피해자’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심각한 성폭행을 당했지만, 이에 대응하는 태도는 어딘가 살짝 긁히기라도 한 듯 심상하다. 오히려 미셸은 직장과 가정에서 독설과 직언을 감추지 않는 사람이다. 출시를 앞둔 게임 개발자들에게는 좀 더 강한 폭력과 성을 요구하고, 어머니, 아들, 아들의 동거녀에겐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는다. 그런 의미에서 미셸은 피식자가 아니라 포식자다. 다만 다른 포식자에게 습격을 당한 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다.

미셸은 최근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본 적이 드문 능동적 여성이다. 가족사로 인한 큰 상처를 안은 채 살아남았지만, 숨거나 외면하기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마음을 끝내 풀지 않는다. 세간의 시선으로는 부도덕한 일도 벌이지만, 그 부도덕함에 대해 솔직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을 정확히 알면서도,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성폭행범의 실체를 마주한 뒤 그를 다룸에 있어 능란하고 담대하다.

<피아니스트>(2001)에서 정확하게 드러난 바 있는 위페르의 차갑고 직선적인 연기는 대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엘르>의 미셸은 괴물 같은 여성이며, 위페르 역시 괴물 같은 배우다. 1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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