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지 못한 당신이라는 책, 당신만이 읽고 결실 맺을 수 있다

2020.12.01 21:47 입력 2020.12.01 21:58 수정

카프카 유작 원고 반환 소송에서 착안한 창작뮤지컬 ‘호프’

뮤지컬 <호프>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전쟁과 홀로코스트를 거치며 상처투성이가 된 호프의 생애를 법정이란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알앤디웍스 제공

뮤지컬 <호프>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전쟁과 홀로코스트를 거치며 상처투성이가 된 호프의 생애를 법정이란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알앤디웍스 제공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해
읽지도 않는 원고에 집착한
주인공 호프의 인생 이야기

생동감 있는 연기·노래들로
상처받은 삶 위한 희망 전해

“호페는 자신의 딸에게 카프카의 유고를 상속할 권한이 없으며 카프카의 유고는 브로트가 원래 의도한 대로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에서 보관해야 한다.” 2012년 10월, 이스라엘 텔아비브 가정법원이 내린 판결은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고 분명했다. 1924년 죽기 직전 자신의 모든 원고를 넘기며 “모두 불태워달라”던 프란츠 카프카의 부탁을 무시한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 전쟁 중 브로트가 맡긴 원고를 착복한 비서 에스더 호페, 모친 호페에게 상속받은 원고의 소유권을 주장하던 에바 호페까지…. 100년 가까이 어둠 속에서 사람들 손에 떠돌던 카프카의 미공개 원고가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순간이었다.

“이 원고가 나야! 나라고!”

창작뮤지컬 <호프(HOPE)>는 이 역사적 순간의 산통을 깨는 노파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낡은 종이 뭉치를 품에 안은 남루한 노인의 이름은 에바 호프(Hope), 78세다. 2018년 세상을 떠난 에바 호페(Hoffe)와 꼭 빼닮은 그는 카프카를 연상케 하는 현대문학의 거장 요제프 클라인의 미발표 원고 반환 소송 마지막 공판장에 와 있다. 카프카 유작 반환 소송에서 착안한 작품인 만큼, 결말은 어느 정도 예상된다. 끝까지 원고를 내주지 않으려는 호프의 악다구니는 곧 법에 의해 저지될 것이다. 상식 역시 그의 편이 아니다. 법정 안 사람들은 읽지도, 팔지도 않을 원고만 부여잡고 사는 호프에게 ‘이 동네 미친년’이라며 비난만 퍼붓는다. 실제 재판 과정에서 호페가 겪었던 일들이다.

<호프>는 분명한 법의 판결, 납득 가능한 상식의 세계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한 인간의 삶을 문학과 음악의 언어로 풀어낸다. 작품은 호프를 불가해한 존재로만 취급하는 공간인 법정 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전쟁과 홀로코스트를 거치며 상처투성이가 된 호프의 생애를 보여준다. 합당하게만 보이는 판결 뒤로 이런 삶이 있을 수도 있다고, 세상에는 이런 아픔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전쟁통에 뜻 모를 원고만 껴안고 “이것만 있으면 집에 돌아갈 수 있다”며 집착하는 엄마의 광기, 그런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하다 어느새 “원고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노래하는 호프. 이들이 이처럼 망가진 배경에 전쟁과 가난, 배신이 뒤엉킨 혹독한 세상이 있었다고 <호프>는 호소력 있는 서사와 노래를 통해 끈질기게 설득해낸다.

법정 안 사람들은 호프의 말을 모두 헛소리 취급하지만, 절절한 얼굴로 노래하는 배우들과 호흡한 관객은 결국 저 말 안 되는 말들 속에 담긴 진실과 상처의 깊이를 알게 된다. 법과 상식의 세계에서는 영영 불가능해 보이기만 했던 이해의 문을 열면, 뜻밖에 위로의 장이 펼쳐진다. 관객들은 호프를 점점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껏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던 자신만의 아픔까지 위로받는 경험을 한다. 극 말미 관객석 곳곳에서 눈물, 콧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이유다.

“네가 네 인생을 써줬어. 당신이란 책을 다시 읽어봐. 누구보다 빛나는 결말을 맺어.”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해서, 읽지도 않는 원고에 자신의 생을 걸어버린 호프에게 K가 말한다. K는 미발표 원고를 의인화한 캐릭터로, 호프의 모든 삶을 지켜봐온 이다. K의 전폭적인 이해와 응원을 받은 호프는 결국 “내가 살아온 증거”라 믿었던 책 대신 자신만의 삶을 찾아 떠난다. 작품 부제인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 비로소 독자를 찾는 순간이다. 이 뮤지컬의 제목이 호페(Hoffe) 아닌 호프(Hope), 즉 희망인 까닭이 여기 있다. 카프카 원고 반환 소송 기사를 접한 뒤 ‘무엇이 저들의 인생을 저렇게 만들었나’라는 궁금증으로 이 작품을 시작했다는 강남 작가와 김효은 작곡가는 그 인생을 일으켜 세우는 ‘희망’으로 작품을 끝맺는다.

현재의 호프(김선영·김지현)와 과거의 호프(최서현·이예은·이윤하), K(김경수·고훈정·조형균)의 생동감 있는 연기와 노래가 힘을 더하는 작품이다. 피란길인 줄 모른 채 엄마와의 여행에 들뜬 어린 호프의 마음을 담은 ‘콩당콩당 콩콩콩콩’부터 30년째 이어진 재판의 판결에서 과거와 작별하고 새로운 내일을 맞이하는 호프가 부르는 ‘판결’까지 인상적인 넘버(노래)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지난해 1월 초연해 누적 관객 수 3만4000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 이 작품은 한국 양대 뮤지컬 시상식으로 꼽히는 예그린뮤지컬어워드와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총 11개 부문 수상을 기록하며 그해 최고의 창작 뮤지컬이라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2021년 2월7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한다. 중학생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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