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르네상스 예술 꽃핀 피렌체, 음악의 향기도 남달랐다

2022.03.04 20:25 입력 2022.03.07 11:11 수정
문학수 선임기자

‘꽃의 도시’의 음악가들

미켈란젤로 광장(Piazzale Michelangelo)에서 바라본, 석양에 물든 피렌체의 전경. 아르노강이 길게 흘러가고, 왼편으로 피렌체 대성당의 돔이 보인다. 출처 : 위키피디아

미켈란젤로 광장(Piazzale Michelangelo)에서 바라본, 석양에 물든 피렌체의 전경. 아르노강이 길게 흘러가고, 왼편으로 피렌체 대성당의 돔이 보인다. 출처 : 위키피디아

‘꽃의 도시’ 피렌체

피렌체는 ‘꽃의 도시’(La Citta del Fiore)로 불린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아르노강 유역에 주둔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강변에 꽃이 만발한 풍경을 보고 ‘플로렌티아’(Florentia)라고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카이사르가 작명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처음에는 도시라기보다 군사적 요새에 가까웠다. 동서남북으로 1.6㎞를 넘지 않았다. 번듯한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1세기에 들어서면서였다. 같은 세기 후반에 피렌체의 인구는 5만명에 근접했다. 파리보다 적었지만 런던보다는 많은 인구였으니 ‘대도시’라는 표현이 어색치 않았다. 동방과의 교역을 통해 상업도시로 부상했던 1300년 무렵에는 인구 10만명을 넘어섰다. 물론 지난 회에 언급했듯이 1347~1350년의 첫 흑사병 유행으로 적어도 인구의 3분의 1이 줄었다. 하지만 피렌체와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 등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흑사병 이후 빠른 속도로 원상태를 회복했다.

스스로를 ‘피오렌티노’라고 부르는 피렌체 시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꽃의 도시’라는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1296년 착공해 1436년 돔(Dome, 둥근 지붕)을 완성한 피렌체 대성당(Duomo di Firenze)의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인데, 우리말로 옮기면 ‘꽃의 성모 대성당’이다. “로마 시대의 건축물을 모방했으되, 명백히 우월하고 압도적인 건축물을 창조하려는 욕망”(피터 머레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이 만들어낸 이 대성당은 지금도 피렌체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자리해 있다.

풍광의 수려함을 뛰어넘어, 피오렌티노들의 마음에 문화적 자부심이 싹튼 것은 15세기부터였다. 미술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1818~1897)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서 언급했듯이, “15세기와 16세기 초를 살다간 피렌체 사람들의 열광적인 헌신과 교양의 욕구”는 꽃처럼 아름다운 도시에 그 이상의 내면적 아름다움을 부여했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하나의 가문과 수십명의 예술가들에 의해 이뤄졌다. 이제 그 가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시 피렌체의 정치와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문화와 예술까지 쥐락펴락했던 그 가문의 이름은 바로 ‘메디치’(Medici)였다. 피렌체의 화폐였던 플로린(Florin)을 유럽의 기축통화로 만들었고, 두 명의 교황(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카테리나, 마리아)를 배출하면서 거의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한 권력 가문이었다(교황 레오 11세도 메디치 출신이었으나 재위 기간이 27일에 불과해 배제했다).

메디치, 권력의 정점에 오르다

16세기 초 간행된 베르나르도 지암불라리의 <여러 사람이 만든 가장무도회를 위한 노래>에 삽화로 수록된 채색목판화. 왼쪽에 붉은 망토를 두른 인물이 로렌초 데 메디치다.

16세기 초 간행된 베르나르도 지암불라리의 <여러 사람이 만든 가장무도회를 위한 노래>에 삽화로 수록된 채색목판화. 왼쪽에 붉은 망토를 두른 인물이 로렌초 데 메디치다.

메디치 집안의 이야기는 조반니 데 메디치(1360~1429)에서 막을 올린다. 물론 가문의 최초 내력은 시기를 훨씬 거슬러 오른다. 샤를마뉴 대제 시절의 “용맹스러운 기사 아베라르도”(크리스토퍼 히버트, <메디치 스토리>)가 그들의 선조로 일컬어진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피렌체 북쪽의 무젤로라는 마을에서 농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거인을 격퇴했다. 샤를마뉴가 그 용맹에 감탄해 가문의 문장(紋章)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전설일 뿐이다. ‘메디치’라는 이름에서 유추해 의사거나 약사 집안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 또한 떠도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메디치의 사내들이 피렌체의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말부터였다. 가문의 일원이었던 아르딘고가 1296년에 곤팔로니에레(Gonfaloniere)로 선출되면서였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유력한 길드(Guild)의 대표자들로 이뤄진 협의체가 의회 겸 행정부의 역할을 맡았고 이를 ‘시뇨리아’(Signoria)라고 불렀는데, 곤팔로니에레는 이 협의체에서 선출된 대표자를 일컬었다. 메디치 가문은 3년 뒤에도, 또 14세기에 들어와서도 몇 명의 곤팔로니에레를 배출했으니 꽤 명망을 지닌 집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의 대통령이나 총리처럼 막강한 권한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모든 의결은 시뇨리아의 협의를 거쳐야 했다. 임기도 짧으면 2개월, 길어봤자 1년에 그쳤다. 게다가 1400년 무렵의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유력한 재벌’이었던 것도 아니다. “(재산으로 따진다면) 당시의 메디치가는 피렌체의 중산층”(G. F. 영 <메디치 가문 이야기>)에 속했다.

하지만 적어도, 조반니가 이후 350년간 이어지는 ‘메디치 권력’의 시동을 걸 수 있었던 조건은 마련된 셈이다. 모직공장 두 곳을 소유하고 있던 그는 사촌 비에리가 운영하던 은행에서 일하면서 금융업에 눈을 떴으며, 40대 초반이던 1402년에 은행 길드(Arte del Cambio)를 대표해 시뇨리아에 입성했다. 은행 길드는 양모 길드와 더불어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길드로 손꼽혔다. 조반니는 이 두 곳을 장악했고 1421년 곤팔로니에레로 선출됐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선조들이 이미 앉았던 그 자리가 아니었다. 그의 꿈은 ‘의자’가 아니라 부(富)였다. 돈이야말로 권력의 원천임을 궤뚫고 있었던 야심가는 결국 로마의 교황을 고객으로 끌어들여 ‘메디치 은행’을 유럽 최고의 금융업체로 키워냈다. 교황은 메디치의 최대 고객이자 전주(錢主)였다. 교황청으로 모여든 십일조와 각종 헌금 및 세금이 메디치의 계좌에 차곡차곡 쌓였다. 당시 ‘교황 계좌’를 유치하려는 유력 가문들의 암투는 15세기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마피아의 혈투를 연상시키는데, 이탈리아 공영방송 RAI가 제작한 드라마 <메디치 : 마스터스 오브 플로렌스>는 그 부분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해 눈길을 끈다. 조반니와 그의 아들 코지모, 증손자 로렌초로 이어지는 메디치 가문은 수십년간 이어진 혈투의 최종 승자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조반니는 “품위 있고 온유하며,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중년 남성이었으며, 공익을 위해 돈을 내놓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평민 편에 서서 귀족들과 끊임없이 투쟁해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메디치 가문 이야기>) 겸손한 표정과 말투로 적을 만들지 않았던 그는 “달변은 아니지만 재기가 엿보이는 대화를 이끌었으며, 그의 재기는 창백한 얼굴에서 풍겨나는 처량한 표정과 어우러져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들었다.”(<메디치 스토리>) 이런 평가들을 종합해보면, 드라마가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야비함과 음험함으로 점철된 인물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메디치 왕국’의 창업자는 1429년 세상을 떠나면서 “소송이나 정치적 논쟁을 피할 것,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말을 두 아들에게 남겼다고 전해진다.

메디치 가문의 예술 후원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1436~ 1488)가 조각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테라코타 흉상. 1478년 작으로 알려져 있으니, 로렌초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39세)의 모습이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1436~ 1488)가 조각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테라코타 흉상. 1478년 작으로 알려져 있으니, 로렌초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39세)의 모습이다.

‘꽃의 도시’는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예술의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꽃’은 도시의 이름 그 자체로 영원히 남겠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뇌리에서 피렌체를 표상하는 것은 역시 찬란한 르네상스 예술이다. 단언하거니와 그것은 메디치가 있어서 가능했다. 사실 ‘순수한 예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서야 생긴 관념이며, 그 이전의 역사에서 예술이 독립적이거나 자율적인 적은 거의 없었다. 특히 미술(건축, 조각을 포함)은 더욱 그랬다. 언제나 부(富)와 권력을 찾아 이동했다. 메디치 주변으로 예술가들이 몰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메디치 가문은 약 150년간 피렌체의 예술을 후원했다. 오늘날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불리는 거의 대다수가 그 가문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후원자(주문자)의 취향은 당대의 예술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사 전문가인 이은기의 <르네상스 미술과 후원자>에 따르면,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가 보여주는 고전적 단순함은 (조반니의 아들) 코지모의 취향”이었다. 피렌체의 메디치궁 벽면을 장식한 베노초 고촐리의 ‘동방박사의 행렬’은 “금색을 좋아하고 궁정 취향을 선호하던 (코지모의 아들) 피에로”가 주문한 것이었기에 “매우 장식적이며 세부 묘사에 치중”했다.

메디치는 이렇듯이 예술 후원과 컬렉션을 통해 ‘최고의 가문!’임을 선전하고 과시했다. 물론 이런 경향은 다른 귀족이나 부호들에게서도 빈번히 나타난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예술’이라는 상징자본으로 스스로를 과시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메디치 가문이 지녔던 남다른 미적 취향과 애호가적 전통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예컨대 메디치와 경쟁 관계였던 스트로치(Strozzi) 가문이나 파치(Pazzi) 가문이었다면? 피렌체의 패권을 놓고 벌인 혈투에서 메디치가 패하고 그들이 승리했다면?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만나는 르네상스의 걸작들 가운데 상당수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르네상스 예술과 관련해 메디치의 의미를 짚어내야 한다면 바로 그 지점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메디치는 오로지 미술에만 몰입하지 않았다. 그들의 후원이 미술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음악에서도 이 가문의 영향력을 배제하긴 어렵다. 피렌체 대성당과 산 로렌초 성당, 산 지오반니 수도원 등의 음악가들은 정해진 급료 외에 메디치 가문이 주는 보너스를 수시로 받았다. 부르고뉴의 캉브레에서 태어나 로마 교황청 성가대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당대의 대작곡가 기욤 뒤파이(1397(?)~1474)는 메디치 가문과 약 30년간 밀접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모테트 ‘Nuper Rosarum Flores’(이제 장미꽃이 피었네)는 1436년 완성된 피렌체 대성당 돔(Dome)의 봉헌미사를 위해 작곡한 음악이었다. 다들 건축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내저었던 그 거대한 돔을 메디치의 후원을 받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는 기어이 완성했고, 작곡가는 그것을 ‘장미꽃이 활짝 피었네’라고 은유했다. 결국 그 음악은 ‘꽃의 도시’에 대한 찬가였고 ‘메디치 가문에 영광 있으라!’는 송가(頌歌)였다.

시인, 작곡가, 연주자였던 ‘위대한 로렌초’

메디치의 일원 중에는 스스로 창작에 빠져든 경우도 있었으니, 피렌체 시민들이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라고 불렀던 로렌초가 대표적이다. 그는 머리에 왕관을 쓰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피렌체의 군주였다. ‘공화국의 군주’라는 표현이 어불성설로 들릴 수 있겠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그는 공화정을 거의 독재정으로 바꾼 권력자였다. 한데 이 지점에서 지금 우리의 감각으로는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 펼쳐진다. 돈과 권력을 양손에 쥔 도시의 지배자, 정적들과의 혈투뿐 아니라 다른 도시들과의 외교와 전쟁으로 노상 골머리를 싸매고 살아야 했던 그는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본인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로렌초는 특이하게도 군사적 재능이 없었으면서도 외교술로 여러 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어느 군주도 견줄 수 없는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였다. (…) 그는 피렌체를 학문과 예술과 유행의 중심지로 만들었다.”(니콜로 마키아벨리, <피렌체사>)

15세기 피렌체에서 인기가 높았던 음악 장르 중 ‘라우다’(Lauda)라는 것이 있다. 이탈리아어로 작사한 종교적인 노래를 지칭한다.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들이 부르던 노래였다. 로렌초가 라우다를 창작하게 된 배경에는 어머니 루크레치아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를 집에 들이고 아들처럼 돌봐줬다고 전해지는 루크레치아는 빼어난 라우다를 여러 편 남겼는데 현재 피렌체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어머니의 교육과 유전자가 아들에게 이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보티첼리를 ‘가문의 화가’이자 평생의 친구로 삼은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로렌초는 라우다 외에 축제에서 부르던 세속음악들도 작곡해 사람들과 어울렸다. 오르간 연주에도 상당한 실력을 갖췄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메디치궁의 컬렉션을 두 배로 늘렸고 당대에 후원하지 않은 화가나 조각가가 거의 없었음에도, 자신이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을 회화나 조각으로 남기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채색 목판화 한 점이 남아 전해진다. 피렌체의 어느 축제일, 얼굴에 가면을 쓴 일행이 거리에서 노래하는 장면이다. 붉은 망토를 두른, 화면 왼쪽의 인물이 바로 로렌초다. 오른편에서 세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소년이 노래하고 있다. 몇 명의 여성들이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 채 노래를 듣고 있다. 아마도 ‘음악가 로렌초’를 증거하는 유일한 그림일 것이다. “평균보다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졌으며, 피부는 검고 얼굴은 그리 잘생긴 편이 아니었던”(니콜로 발로리, Niccolo Valori) 로렌초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극심한 통풍을 앓다가 마흔셋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하지만 피렌체의 예술은 지금도 여전히 빛난다.

[클래식 오디세이 - 음악의 역사를 항해하다]⑤르네상스 예술 꽃핀 피렌체, 음악의 향기도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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