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 일기를 읽는다]8. 잠을 깨는 조선의 언어

2006.10.17 17:24

“대신에게 수의(收議)하여 정탈(定奪)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초서로 쓰인 승정원일기 원문.

초서로 쓰인 승정원일기 원문.

승정원일기를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뭔 말인지…’ 할 것이다. 이 말을 좀 쉽게 풀어보면 “원로대신의 의견을 들어보고 나서 이 일을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도가 될 것이다. 여기서 ‘수의’를 의논이나 상의로, ‘정탈’을 결정이라고 바꾼다거나 보다 쉽게 풀어서 쓰지 않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다. 이 말이 당시 공문서에 쓰이는 용어일 뿐만 아니라 다른 유사한 용어와 변별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수의’는 중요 의사 결정에 대하여 대신에게 자문한다는 의미와 함께 해당 관원이 대신을 방문하여 그 사안을 전해 주고 자문을 받은 의견이라는 뜻이 있다. 이 말을 승정원일기에 자주 나오는 의논이라는 말과 비교할 때 대상의 한정과 높임이라는 면에서 분명한 차이가 난다. 이 말을 자칫 잘못 풀면 사안의 내용이나 자초지종을 해당 관원이나 부서에 물어보는 ‘문계’(問啓)라는 말과 혼동될 염려마저 있다. 그리고 ‘정탈’은 어떤 사안에 대한 가부를 결정하는 것인데 그 주체는 왕이 될 수도 있고 해당 관사가 될 수도 있다. 이 말은 상소나 계사에 답하는 왕의 비답(批答)과도 다르고 신하들의 건의에 대해 결정을 내려 일단락짓는 발락(發落)이라는 말과도 차이가 난다.

위에서 든 예는 솥뚜껑을 열어 고기 한 점을 맛본 것에 불과하다. 어떤 분들은 한문 번역에 대해 쉬운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자칫 원의를 모호하게 만들어 역사자료로서의 효용성을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 오히려 이런 말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공문서와 그에 쓰인 제도 용어, 그리고 조선 관료 사회의 정치하게 발달한 언어적 광경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또 도중(島中)이나 제일작(第一爵)을 ‘섬 안’이나 ‘첫 번째 잔’이라는 쉬운 표현으로 번역하지 않는다고 한마디 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도중문안관(島中問安官)이나 제1작과반진지가낭청(第一爵果盤進止假郞廳) 등의 직명에서 보듯 당시의 정황을 무시한 채 무턱대고 쉬운 한글로 풀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도중’은 평안도 앞바다의 가도에 와서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군영을 주로 지칭하는 말이다. 명나라 본국이나 가도에서 사신이 와 연회를 베풀 때 의식의 절차를 기록한 의주(儀註)에 따라 음악을 연주하고 해당 신하가 술을 올리는 하나의 과정 전체를 1작이라고 하므로 제일작은 그냥 술 한 잔 마신다는 것과 다르다. 또한 당시 명나라 사람을 가리킨 당인(唐人), 한인(漢人)과는 달리 금나라를 지칭한 노적(奴賊), 노중(虜中) 등의 표현도 당시의 특수한 정황과 함께 조선의 인식과 태도가 내포된 표현이므로 이것을 막연하게 중국사람, 오랑캐 등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승정원일기는 국어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역관 아무개가… 날이 저물도록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매우 괘씸합니다. 추고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여기에 보인 ‘괘씸하다’는 말은 원문에 ‘과심’(過甚)으로 되어 있다. 우리말의 음을 차용한 이두인 것이다. ‘모쪼록’(某條), ‘그만두어라’(安徐·아서라)가 다 이런 유형이다. 이 외에도 우리말의 변천을 알 수 있는 사례가 많다. ‘미안’(未安)이라는 말은 오늘날처럼 ‘마음이 불편하다’라는 뜻 외에 ‘온당치 않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으며, ‘한심’(寒心)은 ‘한심하다’라는 의미와는 다른 ‘매우 놀랍다’라는 뉘앙스를 가질 때가 많다. 이런 말은 의미가 축소된 경우인데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 경우도 있다. ‘짐작’(斟酌)이라는 말은 오늘날의 참작(參酌)이라는 말로 쓰이고, ‘물정’(物情)은 여론과 비슷한 의미로 주로 쓰인다.

‘실록’이 번역되어 많은 어휘들이 실제 문장 속에 다시 살아나 우리 언어의 바다를 풍성하게 해 준 것처럼 승정원일기도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지나간 역사를 잘 살피자면 그 언어가 살다간 기억을 보다 잘 복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언어로 바꾸는 노력은 그것대로 필요하겠지만 언어 자료적 가치를 잘 살려 당시의 언어로 독자를 안내하여 소상히 구경시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하겠다.

〈김종태/ 민족문화추진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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