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금관총의 주인공은 소지왕?

2013.08.27 10:18 입력 2013.08.27 11:00 수정

‘왜놈들이 왕릉을 파서 그런 거야!’

1921년 9월 말, 경주의 하늘이 대낮인 데도 침침했다. 때마침 만주에서 불어닥친 황사 때문이었지만, 민심은 흉흉했다.

일본인들이 노서리의 술집 뒷마당에서 금관을 비롯한 엄청난 황금유물을 파내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어느 70대 노파는 순사의 손을 뿌리치고 발굴 현장 한복판에 주저앉아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임금님 무덤 파는 것이 웬말이야!’는 구호를 외치며…. 현장이 심상찮게 돌아가자 경주의 ‘아마추어’ 발굴자들이 서둘러 3일 간의 긴급수습에 나섰다.

이 역사적인 발굴은 이렇게 ‘아마추어 같이’ 졸속진행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출토된 금관 등 황금유물들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일제가 만든 발굴보고서는 “금관총 황금유물들은 1877년 중앙아시아에서 확인된 옥수스 출토품들을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감탄했다. 일제는 그러면서 “우리 ‘일본 영토’에서 처음 발견됐고,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두드러진 고분발견의 예”라고 자랑했다. ‘일본 영토’서 발견됐다고? 쓰린 표현이지만 식민지 시대의 아픈 추억임을 어쩌랴.

금관총 허리띠 장식(왼쪽)과 백제 송산리 4호분 허리띠 장식. 재질만 금(금관총)과 은(송산리)으로 다를 뿐 디자인과 크기가 완전히 똑같다. 경주의 장인 한사람이 제작한 것이 틀림없다.|이한상 교수 제공

금관총 허리띠 장식(왼쪽)과 백제 송산리 4호분 허리띠 장식. 재질만 금(금관총)과 은(송산리)으로 다를 뿐 디자인과 크기가 완전히 똑같다. 경주의 장인 한사람이 제작한 것이 틀림없다.|이한상 교수 제공

■홍안박명

‘홍안박명(紅顔薄命)’이라 했던가. 1927년 12월, 금관을 제외한 금제 허리띠와 장식 등 90여 점의 황금유물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수사는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당시 언론은 ‘도적은 잡지못하고 애매한 혐의자만 고생시킨다’면서 경찰의 가혹수사를 질타하기까지 한다. 경찰과 박물관측은 “천년 넘은 금제품은 요즘의 금 성분과 달리 녹이면 금방 알아치린다”는 선전전을 펼쳤다. 경주번영회 같은 민간단체도 현상금 1000원을 내걸었다. 결국 범인은 사건발생 6개월 만에 도난품 일체를 경찰서장 관사 문밖에 두고 사라졌다.

천신만고 끝에 회수한 것이다. 1956년 3월7일에는 다름 아닌 금관총 금관이 감쪽 같이 사라진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 때의 금관은 만일을 위해 만들어놓은 모조품이었다. 범인은 ‘도난 금관이 모조품’이라는 언론보도를 접한 뒤 문제의 모조품을 경주 서천의 모래사장에 파묻어 버렸다.

■이사지왕의 출현

지난 7월초 말많고 탈많은 금관총이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고분 주인공의 허리에 차고 있었던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획기적’인 명문을 발견한 것이다. 칼집의 금속부에 선각된 명문의 내용은 ‘이사지왕(이斯智王)’이었다.

이것은 그저 ‘금관총’이라 이름붙은 피장자의 신원을 밝힐 수 있는 대단한 명문이 아닌가.

사실 금관총을 비롯한 황금유물은 신라시대 대규모 적석목곽분이 유행했던 마립간 시대의 산물로 여겨진다. 마립간 시대라 하면, 17대 내물(재위 356~402년)~18대 실성(402~417)~19대 눌지(417~458)~20대 자비(458~479)~21대 소지(479~500)~22대 지증(500~514년) 사이를 뜻한다. 그렇다면 ‘이사지왕’은 이 6명의 마립간 가운데 한 명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금관총에서는 금관 뿐 아니라 금제관모, 관식, 금제 허리띠는 물론 허리춤에 찬 환두대도까지 확인됐다. 피장자의 지위가 최상위급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지왕’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역사기록에서나, 그 어떤 금석문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사지왕이 마립간이 아닌 왕족일 가능성을 제기하는 이들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에서 확인된 ‘이사지왕’이라는 명문. 백제 동성왕과 혼인동맹을 맺은 신라 소지왕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에서 확인된 ‘이사지왕’이라는 명문. 백제 동성왕과 혼인동맹을 맺은 신라 소지왕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도 있다. 신라 때는 ‘갈문왕’이나 ‘차칠왕등(此七王等)’처럼 왕(마립간)이 아닌 왕족에게도 왕의 칭호를 붙였다는 것이다.

■이사지왕은 소지왕?

이 가운데 황금유물 전문가인 이한상 교수(대전대)의 ‘추론’은 흥미롭다.

그는 이미 금관총과 서봉총·황남대총 남북분 등을 연구한 성과를 토대로 적석목곽분의 절대연대를 추정한 바 있다. 그는 금관총의 경우 절대연대를‘5세기 4/4분기’로 보았다. 즉 475~500년 사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소지왕(재위 479~500년)이 아닌가. 무슨 근거로? 이 교수는 금관총에서 출토된 허리띠와 띠꾸미개가 공주 송산동 4호분의 출토품과 디자인이나 크기가 100% 똑같다는 점을 주목한다.

“디자인이나 크기가 완전히 같습니다. 재질, 즉 금관총의 것이 금제인 반면 송산리의 것이 은제라는 점만 다릅니다. 경주의 장인(匠人) 한 사람이 만든 동일한 형태의 제품이 금관총과 송산리 4호분에 묻힌 것입니다.”(이한상 교수)

송산리 4호분의 절대연대는 5세기 말~6세기 초, 즉 백제 동성왕(479~501) 시대이다. 그런데 “493년, 동성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으며. 신라는 이찬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냈다.”(<삼국사기> ‘백제본기·동성왕조’)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에 맞서 맺었던 ‘나·제 결혼동맹’의 기사이다. 이 교수가 또 하나 주목하는 것은 ‘이사지왕’의 ‘이(이)’자이다. ‘이(이)’자가 사전의 의미대로 ‘그(其)’, 혹은 ‘이(此)’의 의미라면? 그렇다면 ‘이사지왕’은 ‘그 분이나 혹은 이 분’인 ‘사지왕’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경우 ‘사지왕’은 혹시 ‘소지왕’과 동일인물은 아닐까.

■백제·신라 결혼동맹의 결과물?

또 동성왕에게 딸을 시집보낸 ‘비지(比智)’라는 인물과 ‘사지(斯智)’는 어떤 관계일까. 백제와 결혼동맹을 맺을 정도라면 최소한 왕족을 시집보냈을 가능성이 짙다. ‘사지=소지’왕이 그와 혈연관계에 있는 왕족, 즉 ‘비지’라는 인물의 딸을 보낸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비지’의 관등이 왕족의 관등인 ‘이찬’이라는 점도 주목거리다. 그렇게 보면 송산리 4호분은 신라에서 백제로 시집간 ‘비지의 딸’과 어떤 연관이 있는 무덤일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 소지왕이 왕족인 비지의 딸을 백제왕에게 보내면서 은제 허리띠를 혼례품으로 하사했을 수도 있고…. 혹은 비지의 딸이 백제 땅에서 죽자 장례품으로 보냈을 수도 있고….

소지왕과 (이)사지왕…. 소지왕과 왕족 ‘비지’…. 그리고 백제 동성왕과 비지의 딸…. 어쩌면 풀릴 수 있는 퍼즐 놀이 같기도 한데…. 물론 이한상 교수는 “그것은 단지 추론일 뿐”이라고 신중한 입장을 나타낸다. 어쨌거나 묻힌 지 1500년 만에 현현했고, 이후 또 92년 간이나 잠들었던 수장고에서 기지개를 켠 이사지왕이 후손들에게 수수께끼 한 문제를 낸 셈이다. ‘내가 누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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