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안내원들 몸수색 저항은 선구적 반성폭력 운동”···‘박정희 정부의 활용’과 ‘기계-인간 대결’까지

2024.02.22 11:02 입력 2024.02.22 17:28 수정

조민지 ‘1960~70년대 사례’ 논문 발표

‘여성에 대한 폭력’ 등 3가지 주제 다뤄

조민지(서울대 강사)가 ‘사회와 역사’ 제 140집(2023년 겨울)에 실은 논문 <1960~70년대 여성 노동자의 ‘인권’ 문제와 버스안내원이라는 사례>는 ‘여성에 대한 폭력’ ‘박정희 정부의 인권 개념 재규정과 버스안내원 활용’ ‘기계와 인간의 대결’이라는 3가지 문제에 주목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해당하는 게 몸수색이다. “범죄를 적발하기 위해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일회적인 사건이라기보다 날마다 노동자들의 복종을 확인하는 일종의 의례”에 가까웠다. 조민지는 “격리된 합숙소 속에서 이루어지던 몸수색이 대중들의 시선에 노출되기까지 당사자들은 끊임없이 저항하여 사건을 만들어내야 했다”고 말한다.

조민지는 이 저항과 투쟁에서 ‘여성 특수과제’ 즉 젠더 이슈에 주목한다. “버스안내원들의 산발적인 집단행동이 직장 내 성폭력에 저항하는 선구적인 형태의 반(反) 성폭력 운동”이라고 규정한다. 이들의 저항은 “성폭력이라는 개념으로 언어화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해 이들이 공유하던 당대의 감각을 보여준다”고도 했다.

1971년 승차를 돕는 버스 안내원.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1년 승차를 돕는 버스 안내원.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민지는 그간 여성노동 연구는 1980년대가 되어서야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운동이 시작됐다고 본 점을 지적하면서 “버스안내원들의 저항은 I960년대부터 일관되게 성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제기한 매우 드문 사례였으며, 이들이 오히려 가부장적 순결 이데올로기를 역으로 활용하여 여론전의 전략으로 삼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몸수색에 대한 대중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순결 이데올로기”를 활용한 것이다. 버스안내원들은 “처녀로서 처음 당하는 일에 눈물마저 났다”고 적극 호소했다. 전략의 차원만은 아니었다. 1966년 몸수색을 당한 한 버스안내원이 자살하는 일도 벌어였다.

조민지는 한국 사회가 버스안내원의 노동 조건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 중 “처녀의 몸수색”을 인권 “유린”으로 규정한 점을 특기할 만한 것으로 꼽았다. “그 어떤 열악한 노동 조건보다 ‘사춘기에 접어든 처녀들’을 대상으로 ‘내의 빤스까지 몸에 손을 대’”는 상황은 탄식을 자아냈다. 1966년 대륙교통 안내원들도 자신들이 당한 몸수색을 “인권 유린”으로 규정했다. 그해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옹호위원회는 안내원 실태조사를 마친 뒤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업자들에 대하여는 일벌백계의 견지에서 엄단”하라고 촉구했다.

조민지는 버스안내원들을 “착취와 동원의 대상일 뿐 아니라 나름의 개인적, 집단적 대응 전략을 가진 주체”로 규정한다. 1960~70년대 가장 대표적인 서비스 직종 중 하나였던 버스안내원들이 끊임없이 집단행동을 도모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들은 출근 시간에 행진이나 농성 같은 집단행동을 감행했다. “이들은 ‘인권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권리를 요구하는 집단행동으로 대중들의 일상에 잡음’”을 만들어냈다. 이들이 수기, 기고 등으로 꾸준히 자기 목소리를 낸 점에도 주목한다. ‘근로여성 생활수기: 희롱의 굴욕도 참으며’(‘자동차노보’, 1975년 8원 25일자) 등이 한 예다.

버스안내원들의 인권 문제는 자주 이슈가 됐다. 1960년대 초부터 열악한 노동 조건이 문제가 됐다. 1964년 서울 시내 버스업자들이 “우리나라 노동사상 처음으로” 근로기준법을 위반하여 버스안내원들을 혹사시킨 혐의로 입건·기소됐다.

언론들도 ‘여차장들의 인권’ 등을 달아 보도했다. 1970년대에도 시민사회나 언론은 버스안내원들의 인권 문제를 꾸준히 다뤘다. YWCA는 1965년의 설문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조민지는 수많은 직종 중에서도 유독 버스안내원들의 ‘인권’이 주목받은 이유도 분석한다. “공공장소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대면 서비스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의 업무환경이 대중들의 시선에 노출되었던 이유가 컸다. 특히 업무 현장에 소비자들이 깊이 연루되는 서비스노동의 특징은 노동자들의 쟁의행위나 저항에도 영향을 미쳤고, 안내원들은 자신들을 향한 대중들의 관심을 십분 활용했다.”

몸수색 중단 의제가 전면에 부각된 것을 두곤 “정부 당국이나 언론이 주목하는 일종의 ‘허용된’ 의제였다는 점이 분명히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고도 했다.

인권은 ‘다의적 개념’이었다. 독재 정권도 ‘인권’이라는 개념을 동원했다. 이승만 정부는 12월 10일로 인권의 날을 정했다. 1962년 군사정부도 법무부에 ‘인권옹호과’를 설치했다. 조민지는 박정희 정부에게 버스안내원은 ‘인권’이라는 용어를 언급할 일이 생길 때 유용한 소재였다고 말한다. “정부로서는 승객이나 업자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또 “정부는 인권이라는 개념의 급진성을 탈각시키기 위해 이들을 적극 활용”했다.

버스안내원을 이용한 이미지 전략도 이어간다. ‘박 대통령, 버스안내양 방한복 손수 디자인’(동아일보, 1977년 12월 20일자) ‘박 대통령 하사 버스안내양 방한복, 구 시장이 전달… 내일부터 착용’(경향신문, 1977년 12월 23일자) 같은 보도가 나왔다. 방한복·내복을 ‘하사’하는 대통령 모습을 연출하는 전략은 이후로도 이어졌다.

조민지는 버스안내원 등의 ‘인권’이 정부가 설정한 범위에만 머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몸수색 중단’ 의제는 “사용자가 성별화된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데 대한 저항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권이라는 ‘안전한’ 개념은 성폭력을 동원한 노동착취에 반대하는 당사자 운동의 외피가 되어주었다”고 말한다.

1970년대에도 몸수색은 이어졌다. 새로운 통제와 감시 방식도 생겨났다. 바로 계수(計數)다. 사람을 동원(계수원)하거나 기계를 부착(계수기)해 승객 수를 세려 했다. 승강구에 설치해 놓고 승객이 밟을 때 무게를 책정하는 자동식 계수기가 특히 문제가 됐다. 1974년 자동식 계수기 부착율은 조사 대상 버스 중 57.9%였다. 계수기는 할인 또는 무료 대상인 사람이나, 잘못 탔다가 내린 이들이나 무임 승차한 자들도 일반 승객으로 간주해 계산했다.

조민지는 업무 현장 감시와 노동자 통제 과정의 기계화에 주목한다. 버스안내원들이 최소한의 자율성을 기계로 일괄 처리하고, 그 결과를 기준으로 처벌까지 하는 것은 “업무 주체로서 엄연히 가지고 있던 권한을 완전히 박탈하는 조치”였다. “인간의 지위가 도구로 전락했다는 감각”까지 생기게 했다.

사측은 횡렴 혐의를 제기하는 데 계수기를 이용했다. 1976년 1~8월에는 횡령 혐의를 벗으려고 자살 시도로 결백을 증명하려 한 사건이 5차례나 일어났다. 당시 언론은 계수기 부착도 인권 유린 문제로 접근하며 비판했다.

1976년 당시 시내버스에 설치된 계수기.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6년 당시 시내버스에 설치된 계수기.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민지는 계수기 논란이 여성 노동자의 ‘인권’을 둘러싼 논의를 기계와 인간의 관계라는 새로운 쟁점으로 확장하는 걸 보여줬지만, 한계도 드러낸 점도 지적한다. “(박정희 정부야말로) 이 직종을 여성화하는 과정을 주도하는 등 안내원들의 노동환경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조건들을 결정한 당사자였다. 그럼에도 기계화되고 비인간적인 노동 통제와 ‘인권’을 대립시키는 구도 속에서 정부는 기계와 대조되는 자애로운 인간 박정희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활용할 수 있었다”고 했다.

1980년대 들어 “이들의 목소리는 자동 안내방송으로, 문을 열고 닫던 팔은 자동문으로, 요금을 수납하던 신체는 요금함으로 대체”된다. 조민지는 “실제로 상품 가치가 떨어지자 가장 먼저 기계로 대체되어 사라진 직업이라는 점에서, 버스안내원을 둘러싼 기계-인간 관계에 대한 논란은 기술 변화에 따른 여성 서비스노동자들의 지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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