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자처한 그대가 ‘남초’들의 지지를 받는 건 왜일까요?

2017.12.01 17:23 입력 2017.12.01 17:43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배우 유아인의 ‘애호박게이트’

과학 잡지 ‘스켑틱’의 편집장 마이클 셔머는 비판적 사고를 가로막는 오류 중 하나로 ‘박해를 받는 쪽이 올바르다는 믿음’을 꼽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를 보고 웃었다. 사람들은 라이트 형제를 보고도 웃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순교자가 된다고 해서 당신이 옳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셔머의 이 통찰은 “온라인 생태계와 인권 운동의 정신을 교란하는 폭도”들과 “일당천”(모두 본인 발언에서 인용)으로 전투를 벌이는 중인 배우 유아인에게 꼭 필요해 보인다. 한 트위터 유저가 “유아인은 (중략) 애호박 하나 덜렁 들어있으면 (중략) 코를 찡긋하며 ‘혼자라는 건 뭘까?’ 하고 코를 찡긋할 것 같”다고 올린 멘션에 그는 직접 “애호박으로 맞아봤음? (코 찡긋)”이라는 멘션으로 대응했다가 어쨌든 농담으로라도 때린다는 표현은 폭력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맥락이 있다는 비판에 강하게 반발하며 몇날 며칠째 트위터에서 설전을 이어갔다. 페이스북을 통해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며 다시 한번 자신의 결백과 선의를 주장했던 그는, 이후 또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조직폭력배와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상당수 여성 누리꾼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셔머의 말을 빌리자.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자신의 도덕성이 훼손된 것에 대해 유아인이 느끼는 분함과 억울함이,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는 진정성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은 아니며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 역시 되지 못한다.

배우 유아인이 출연한 드라마 속 한 장면.

배우 유아인이 출연한 드라마 속 한 장면.

오히려 유아인이 스스로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데 몰두할수록 실제로 증명된 것은 진정성에 대한 집착의 악영향이다. 애호박으로 맞아본 적 있냐는 말에 큰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현실 세계에선 애호박으로든, 오이로든 남성이 ‘맞을래’라고 말하는 것이 여성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자신의 발언을 이러한 맥락 위에서 파악하는 것이 페미니스트로서의 실천이다. 애호박 발언이 여성혐오적이라는 게 조금 과도할 수는 있을지언정 페미니스트로서 살겠다는 사람이 할 농담은 아니며,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한 번 더 당당히 선언하면서 끝끝내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농담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대신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메갈짓”을 하는 “폭도”로 규정했다.

여기엔 두 가지 불의가 작동한다. 우선 2015년 등장한 이후 사이트가 사라질 때까지 메갈리아에서 이룬 실천적 성취가 부정당한다. 메갈리아를 통해 여성들이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으로 여성 일반이 겪는 부당함에 대한 공통의 경험세계가 실증되었으며, 이러한 공통의 기반 위에서 정당한 분노를 공유하고 과격하다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한국의 여성혐오 문화에 직접적 타격을 가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메갈리아의 성취다. 하지만 메갈리아와 진짜 페미니즘을 구분하는 이분법을 통해 이러한 성취를 부정하는 남성은 그럼에도 진짜 페미니즘의 수호자로서 도덕적 우월함을 내세울 수 있다. 이것이 두 번째 불의다.

정치적 선언을 한다는 것은 앞으로의 실천에 대한 스스로의 다짐으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 그 자체로 어떤 자격이나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실천이다. 남성 페미니스트란 자신이 속한 남성중심적 사회에 스민 여성혐오적 관점과 편견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반성하며, 자신에 대한 여성들의 의구심 가득한 시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언제든 의도와 상관없이 성 불평등 구조 안에서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잊지 않는 그 모든 실천으로서만 존재한다. 스스로에 대한 한 치 의심 없는 유아인의 태도는 그래서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다. 단순히 모순적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익숙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메갈리아가 등장했을 때 수많은 남성들은 유아인이 그러했듯 착한 페미니즘, 진정한 페미니즘 운운하며 페미니즘의 투쟁적 힘을 빼앗으려 했다. 좋은 말만 해선 변하지 않는 세상은 모른 척하고 여성들의 과격함만을 문제 삼았다. 이미 수많은 여성들을 통해 논파된 기만이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는다면서 유아인은 ‘메갈짓’을 비난하지만, 지난 2년간 증명된 건 여성들도 남성들을 모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뒤에야 형식적으로나마 여성들의 눈치를 보는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넷페미 운동사로 명명해도 될 이 일련의 과정에 대해 유아인은 놀라울 정도로 무지하다.

무지 자체는 죄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지가 무언가에 대해 몰라도 되는 입장에서 유래한다면 이는 권력의 문제이며, 이 권력이 뿌리 깊은 구조적 불평등 위에서 작동한다면 윤리의 문제가 된다. 유아인의 무지는 비윤리적이다.

유아인이 트위터 설전 중 올린 트윗 캡처.

유아인이 트위터 설전 중 올린 트윗 캡처.

유아인이 딱히 새롭지 않은 낡은 논리와 현실 인식으로 여성들을 공격한다는 것이 사태의 심각성을 누그러뜨리는 것은 아니다. 논의를 퇴보시켰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큰 해악이다. 가상세계에 숨지 말고 진짜 본인들이 입은 피해를 입증해보라는 말은 어떠한가. 자신의 페미니스트로서의 위치는 본인의 선언만으로 정당화되지만, 자신도 인정한 여성차별 사회에 사는 여성들은 자신의 피해자성을 입증해야 한다. 그는 선량한 피해자로서의 여성과 폭도로서의 가짜 페미니스트라는 허구적 이분법을 통해 여성들을 갈라치기하려 했지만 결국 그의 편을 드는 것은 남성 페미니스트의 시혜적 태도에 감읍하는 가상의 여성들이 아닌 일베, 오유 등으로 대표되는 남초 커뮤니티다.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무기를 제공하진 않았다. 정교한 반성적 논증 대신 스스로에 대한 떳떳함 하나로 돌파하는 그는 어느새 남초 커뮤니티에서 일기당천의 장수가 되었고, 이러한 이미지를 구심점 삼아 모인 남성들이 과격한 폭도로서의 ‘메갈’에게 공격받는 선량한 남성의 포지션을 다시 한번 점유하게 해줬다. 대체 여기 어디에 페미니즘이 있는가.

애호박에 대한 시답잖은 농담으로 시작된 설전은 여기까지 왔다. 정말이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또한 그렇기에 기억해둘 만한 일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꽤 올바른 말과 행동을 하던 개인이 자신의 진정성을 몰라주는 것에 분노하다가 결국 자신이 믿는 자기 모습의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는 과정을 단 1주일 속성 코스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유아인의 영혼을 걱정하는 것은 한가한 일일 것이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이제 여성혐오로 불릴 말과 행동은 조심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경험적 학습은 다시 당당한 무지의 상태로 퇴행하는 중이다. 여성들에게서 분노할 권리를, 남성을 모욕할 권리를 빼앗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고분고분한 피해자로서의 자리를 요구하는 이들이 다시금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전유하려고 한다. 페미니즘을 참칭하며 안티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이들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여성들의 목소리를 잠재우려는 시도 앞에서 걱정해야 할 건 다시 또 지난한 싸움을 앞둔 저 수많은 여성들이다. “밥그릇을 걸고” 싸웠다지만 덕분에 단숨에 남성연대의 아이콘이 된 한 스타가 아니라.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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