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의 ‘주주자본주의’

2020.06.07 20:25 입력 2020.06.07 20:27 수정
김학균 |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김학균의 금융의 속살]한국과 미국의 ‘주주자본주의’

21대 국회에서 상법 개정안을 비롯한 통칭 ‘경제개혁입법’이 논의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어떤 지배구조가 좋은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의 답이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오너 경영’ 대비 ‘전문가 경영’이 더 우월하다는 인식은 약해지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을 중심으로 대주주의 오너십 행사 정도가 낮은 전문경영인 주도 기업들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친 ‘단기주의’이다. 얼마 전 부도위기에 내몰렸던 미국 보잉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보잉은 20년 넘게 연속 흑자를 내온 우량기업이지만 과도한 주주환원이 문제가 됐다. 보잉은 벌어들인 이익보다 더 큰 규모로 자사주를 매입했고, 배당금을 지급했다. 주주들에게 선심을 쓰느라 위기 때 쓸 수 있는 여유자금을 사내에 쌓아놓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코로나19 국면에서 일시에 타격을 받았다.

보잉이 이런 행태를 보인 것은 회사에 주인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는 패시브 투자의 확대와 관련이 있다. 상장지수펀드(ETF)로 대표되는 패시브 투자는 개별 기업 하나하나를 매수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유형의 기업군을 묶음으로 산다. 그러다 보니 개별 기업에 대한 구체적 주주권 행사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보잉만 하더라도 ETF들이 주요 대주주 자리를 꿰차고 있다. 7.4%의 지분을 보유한 뱅가드가 2대주주에 올라 있고, 각각 5.8%와 4.6%의 지분율을 가진 블랙록과 스테이트스트리트가 3대주주와 5대주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들은 모두 ETF 회사이다.

의결권 행사에 관심이 적은 패시브 투자자들의 영향력이 커지다 보니 미국은 경영진이 전횡을 하는 경우가 많다. 도가 넘는 보수를 받는 슈퍼스타 경영인이 나오고, 보잉의 경우에서 보듯이 지나친 주주환원 정책을 쓰다가 일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최근 미국에서 주주행동주의 투자자들의 공격 타깃은 전횡을 일삼는 전문경영인에게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오너경영은 보다 장기적인 시각에서 기업이 운영된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오너경영 자체가 주주들에게 자동적으로 좋은 결과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기업 몇 곳은 오너들의 잘못된 인수·합병(M&A) 결정으로 주주들에게 큰 손해를 끼쳤다.

오너냐 전문경영인이냐는 문제는 부차적이다. 전반적인 지배구조 개선의 방향은 다수 주주들의 의견이 이사회에 잘 반영될 수 있는 쪽으로 가는 게 옳다고 본다. 이 경우에 대두될 수 있는 리스크는 단기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투자자(주주)들에 의해 기업이 휘둘릴 수 있다는 점이다. 언제든지 주식을 팔고 떠날 수 있는 포트폴리오 투자자들의 이해관계는 기본적으로 단기적일 수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이러한 위험을 지적하는 이들은 외국자본의 적대적 M&A로 기업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고를 내놓고 있기도 하다.

필자는 주주자본주의에 내재된 단기주의적 편향을 인정하지만 한국에서는 주주권 강화로 얻을 편익이 더 크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 외국인 투자자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한국 상장사들의 전반적 지배구조가 개선됐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경영권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받았던 사례들도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SK그룹은 헤지펀드 소버린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 논란의 과정에서 가장 큰 수혜를 받았던 이는 다름 아닌 SK그룹의 대주주들이었다. 지배구조가 투명해졌고, 주가도 장기적으로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KT&G도 대표적인 기업 사냥꾼 칼 아이컨의 공격을 받았는데, 한국의 대표적인 주주환원 우량기업인 KT&G가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15년 전 아이컨 펀드가 요구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 경영진 또는 대주주에 대한 기타주주들의 견제가 꼭 적대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만도 아니다. 한국에서는 외국자본이건, 내국자본이건 경영권 분쟁 사례 자체가 많지 않지만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와 휼렛패커드 등은 주주 행동주의 펀드와 협력해 기업가치를 높인 바 있다.

보잉의 예에서 보듯이 미국은 주주자본주의 과잉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한국에서의 문제는 주주자본주의 결핍이라고 본다. 주주들의 권리가 제도적·합법적으로 관철되는 틀은 이사회이기 때문에 다수 주주들의 의견을 잘 반영하는 쪽으로 제도 개선이 이뤄진다면 시장은 이런 변화를 환영할 것이다. 한편 주주자본주의에 내재된 단기주의 편향을 완화시키기 위해 장기 보유 주주들에 대한 차등 의결권, 차등 배당 등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뤄진다면 더 좋겠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