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의 다음 장애물은 ‘EU 역외보조금제’

2022.11.01 09:46 입력 2022.11.01 09:57 수정

내년 6월 시행… 한국기업 대응책 고심

[주간경향] EU가 추진 중인 역외보조금 규제 법률안이 오는 12월 공식 채택돼 2023년 6월 시행될 전망이다. 역외보조금제도는 외국 기업이 EU 시장에서 기업 인수·합병 등 기업결합을 추진하거나 공공조달에 참여할 때 최근 3년간 정부로부터 받은 보조금 내역을 신고해야 하는 법안이다. EU 집행위는 EU 경제정책에 따라 회원국의 보조금은 엄격하게 규제해왔으나 역외국에는 이를 적용할 수 있는 규정이 없어 역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는 법안 취지를 내세웠다. 하지만 법률안 내 주요 개념이 불명확하고 광범위한 직권조사 권한 등으로 전혀 통제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법안이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 9월 14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최근 미국과 EU의 보조금 입법 동향 및 대응방안’ 세미나에서는 EU의 역외보조금제도가 지나치게 광범위한 규정을 담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법안은 보조금을 정부로부터 받은 ‘재정적 기여’라고 규정한다. ‘재정적 기여’는 보조금으로 받은 돈뿐만 아니라 세액공제 등 다양한 지원책을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법의 적용대상, 위반 시 조치 등도 광범위하다. EU 집행위는 인수합병(M&A), 공공조달 분야뿐 아니라 경쟁 왜곡이 의심되는 모든 분야를 직권조사할 수 있도록 했다. 김두식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EU 역외보조금제도는 적용대상이 제조업뿐만 아니라 모든 서비스업까지 포함하고 있고, 보조금을 받았다고 사전신고해야 하는 소급의 범위가 넓으며, 어디까지가 재정적 기여인지 판단하기 어렵다”라며 “조치도 다양하고 황당하다. 과징금을 부과하고 보조금을 반환하거나 사업을 취소할 수도 있다. 조사·판단의 주체가 EU 집행위원회인데 전혀 통제받지 않는 쪽으로 문을 열어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나치게 포괄적인 법안 내용에 대응을 준비 중인 기업들도 막연한 상황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요즘은 정부가 기업에 직접 보조금을 지원하기보다 은행을 통해 간접지원을 하거나 정책을 통해 세제 혜택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리스트업하고 또 EU 역내 국가들의 지원책들을 따져보면서 정부와 대응논리를 만들어가고는 있다”라면서도 “법률안이 포괄적이다 보니 EU 역외보조금제도의 타깃이 명확하게 무엇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사실 감을 잘 못 잡겠다”라고 말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 EU집행위원회는 2023년 6월 EU 역외보조금 제도를 시행할 예정이다. /AP연합뉴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 EU집행위원회는 2023년 6월 EU 역외보조금 제도를 시행할 예정이다. /AP연합뉴스

타깃은 중국, 한국은?

2021년 12월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발간한 ‘글로벌 보조금 규제의 새로운 현상: 역외보조금·기후변화 보조금·환율보조금(이천기·강민지·김민주)’에 따르면 EU 역외보조금 법안은 EU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 기업에 대한 대응을 배경으로 한다. 2021년 9월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연례 정책연설에서 역외보조금 입법안을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대응(Dealing with China and Russia)’이라는 목차에서 소개한 바 있다. 보고서는 “2021년 5월 발표된 입법안에서는 EU 역내 기업이 받았더라면 EU 국가보조 규칙하에서 불법이었을 지원을 중국 정부가 EU 내 중국기업에 공여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같은 날 발표된 영향평가 보고서는 중국의 ‘중국제조 2025’ 산업전략하에서 로봇공학, 전기차, 의료장비, 항공우주, 해운 및 철도 등 다수의 산업, 특히 고기술 핵심산업 육성에 시장조건보다 유리한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아울러 중국과 체결된 EU의 공공조달 계약은 2019년 7억5000만유로에서 2020년에 20억유로에 근접한 수준까지 급상승한 반면 EU 기업들은 중국 공공조달 시장에서 거의 배제된 상태라고 말했다.

중국 기업의 EU 시장 잠식 우려가 고조된 상황에서 도입되는 EU 역외보조금제도를 한국기업은 비껴갈 수 있을까. 이천기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EU 역외보조금제도는 기업 인수·합병, 공공조달 시 적용되는데, 법안은 이 두가지의 ‘여집합’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밖의 상황’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 밖의 상황’을 EU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쓰려고 할지가 아직은 불분명하다”라며 “다만 과거 유사 사례 규제에 비춰볼 때 1차 타깃은 중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2015년 6월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무역특혜연장법(TPEA)을 통과시켜 반덤핑 규칙을 개정했다. 이 개정에는 반덤핑조사에서 수출국 국내 시장의 왜곡에 정상가격을 산정하기 위한 ‘특별시장상황(PMS)’ 규정,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자료를 충분하게 제출하지 않으면 해당 기업에 불리하게 반덤핑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불리한 가용정보(AFA)’ 규정이 포함됐다. ‘비시장경제국’으로 분류되는 중국을 겨냥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실제 적용은 ‘시장경제국’인 한국산 철강에 집중돼 2017년부터 한국산 철강제품에 추가 반덤핑 관세가 부과됐다. EU도 2017년 12월 미국의 PMS 조항과 상응하는 ‘중대한 시장 왜곡’ 조항을 신설했으나 아직까지 한국산 제품에 이를 적용한 사례는 없다.

이천기 부연구위원은 “미국이 반덤핑 규제책으로 한국산 철강제품에 대해 추가 관세를 부과했고 EU도 같은 제도를 거울 입법처럼 만들어 시행했다. 한국도 기술적으로 위 개정의 영향권에 있었으므로 높은 반덤핑 관세를 부과받을 수 있었으나, 지금까지 한국산 제품에 EU가 위 시장 왜곡 조항을 적용하고 있지는 않다. EU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국가보고서에서 시장 왜곡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고 실제 시장 왜곡 조항을 적용했다. 이에 따라 추가 반덤핑관세를 부과한 대상은 EU로 수입되는 중국산 제품뿐”이라고 말했다. 다만 기업 인수·합병의 경우 EU 역내 공급망 생산 전략과 맞물려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천기 연구위원은 “미국처럼 EU도 공급망 재편을 통해 핵심적인 품목의 생산이 역내에서 이뤄지도록 유인하고 있다. 이로 인해 EU 고객사가 역내 생산에 제공되는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우리 기업에 EU 내 생산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며 “EU에 생산시설을 건설하는 방법도 있지만 EU 역내 기업을 인수·합병할 수도 있다. 이때 기업이 단독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워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으로부터 특혜금융 지원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역외보조금제도가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경남 거제 대우해양조선소 내 작업 현장 모습/문재원 기자

경남 거제 대우해양조선소 내 작업 현장 모습/문재원 기자

한국 조선업도 주의해야

지난 7월 14일 미국 매체 ‘폴리티코(Politico)’는 ‘역외보조금 규정을 주의해야 할 5가지 산업(5 industries that need to watch foreign subsidies rules)’ 기사에서 역외보조금제도가 겨냥하는 산업으로 철강, 알루미늄 등 기초산업과 인프라 등을 지목했다. 기사에서는 해당 산업의 중국 기업들을 주로 언급했지만, 한국의 조선업도 지목했다. 기사는 “중국과 한국의 정부지원 조선소나 중동의 국영항공사에 대한 오랜 불만이 EU에서 고조돼왔다. 유럽조선협회는 한국과 중국의 부실 조선소들이 대출을 받았다고 지적했다”며 EU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구조조정 계획없이 부실기업에 대한 무제한 보증이나 보조금이 왜곡을 일으킬 가능성이 가장 큰 해외보조금”이라고 말했다. 대한상의 세미나에서 윤영원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법안의 제4조 제1항은 ‘당해 보조금이 없다면 중·단기 내에 폐업할 가능성이 높은 기업에 대한 외국 보조금의 제공’을 시장 왜곡 가능성이 높은 보조금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조선산업을 타깃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선박을 건조하고 대금을 받지 못해 조선사들이 정부의 정책자금을 많이 받았던 시기가 있었고, 이는 이전부터 지적돼왔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 조항은 대규모 공적자금이 들어간 대우조선해양을 겨냥했다는 분석이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과거에 일본이 대우조선해양이 정부에서 지원을 받아 연명하고 있다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 적이 있다. ‘은행이 기업에 대한 상업적 판단을 한 것이지 정부에서 지원한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으로 일단락됐는데, 내년에 역외보조금제도가 시행되면 이 사례가 어떻게 적용될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며 “한화의 대우조선해양 인수가 마무리되면 이러한 우려가 다소 나아질 것이라고도 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일단 대규모의 공적자금이 들어간 대우조선해양이 문제가 될 수 있다”면서도 조선업계에서 관행처럼 이뤄지는 선수환급금제도도 점검해보고 있다고 말했다. 선수환급금제도는 외국 선주가 국내 조선업체에 선박을 발주할 때, 선박 인도 전에 지급하는 선수금에 대해 조선사를 대신해 은행이 지급을 보증해주는 제도를 말한다. 관계자는 “EU 집행위원회가 걸고넘어지면 선수환급금제도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보통 선박 건조가 2년 정도 걸리고 1척당 3000억~4000억원 정도의 돈이 들어간다. 조선사가 재정적으로 건전하지 않아 파산해버리면 선주들이 돈을 떼이게 된다. 그래서 선주들은 보증을 선 은행을 보고 발주를 넣는다. 국책은행인 수출입은행에서도 보증하고 있는데 오래된 관행이라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보지만 법안 적용에 따라 이것도 문제 삼을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원전 수출도 규제 대상 가능성

현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원전 수출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윤영원 변호사는 “원전 수출과 관련해 체코 등에서 호재가 들려오고 있는데, 이 또한 역외보조금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라며 “이는 원전의 입찰자인 한수원뿐만 아니라 주요 하도급업체도 해당한다”고 말했다. 최근 한수원의 폴란드 원전 수주 입찰과 관련해 출혈 입찰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에너지전환포럼은 10월 24일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폴란드의 싱크탱크인 ‘폴리티카 인사이트’ 및 다수의 현지 언론보도를 인용하며 한수원이 프랑스, 미국 등의 경쟁업체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입찰했다고 지적했다. 또 이를 ‘출혈 입찰’이라고 비판하고 수출입은행 등 공공기관들의 금융지원 비용 부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분석했다. EU 역외보조금 규정은 왜곡 가능성이 가장 큰 보조금 중 하나로 “보조금으로 인해 기업이 과도하게 유리한 입찰서를 제출할 수 있었고, 해당기업이 공공계약을 체결하게 되는 경우”를 거론하고 있다. 일각에서 체코, 폴란드 등 유럽시장에서 ‘싼값’으로 경쟁하는 한국의 원전 수출 전략 또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EU 시장에서 영업 중인 기업들은 역외보조금 도입을 앞두고 대응책 마련을 모색 중이지만, 법안의 내용이 광범위해 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현재 시점에선 어떤 경우에 보조금에 해당하는지가 불투명하다. 법안이 발효되면 EU 내 투자 등에 있어 기업의 규제위험 부담 증가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천기 부연구위원은 “역외국 정부에 의한 모든 지원을 추적하고 모니터링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상 기업들에 상당한 준수비용을 야기할 것으로 우려된다”라며 “기업 입장에서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사의 생산·수출 상품과 관련된 공급망 및 자금조달 방식을 재점검하고, 향후 EU 역외보조금 규정에 따라 요구될 것으로 예상되는 소명자료를 구비하고, 데이터베이스(DB)화하는 준비 작업이 필요해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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