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009.03.01 17:51 입력 2009.03.02 09:44 수정
오도엽 | 시인

“희망이 있냐고? 절망이다”

“뭐라, 희망이 있냐고? 왜 살고 있느냐고 묻는 거냐? 죽지 못해 산다, 왜? 병원에는 왜 다니는 줄 아냐? 죽지도 못하고 아프니까 참을 수 없어 다닌다. 넌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 보면 희망이 보이냐? 절망이다. 절망.”

팔십 평생을 살아온 이소선은 꼭 희망이 있기에 가시밭길을 스스럼없이 걸어온 것은 아니다. 세상이 반드시 바뀔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절망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뼈저리게 느꼈기에 이소선은 오늘도 죽을 힘으로 약을 먹고 집회장을 쫓아다닌다.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껴안고 오열하고 있는 이소선. <경향신문 자료사진>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껴안고 오열하고 있는 이소선. <경향신문 자료사진>

“희망이 있어 내가 살아온 거는 아니야. 내가 학교를 다녔냐, 지식이 있냐? 희망이 뭔지나 알겠냐. 일제시대 때부터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지 않았냐. 희망이란 본래 없는 것인지도 몰라. 뭐 길이 있어서만 걷냐. 가야 하니까 걷는 거지. 가시넝쿨이 있으면 헤치고 가는 거야. 그러다 보면 길이 생기고 그라는 거지. 그냥 미친 듯 싸우며 살다 보니 독재도 물러가고 직선제도 하고 민주노총도 만들고 이렇게 된 거야.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 거지, 희망이 보여 달려온 거는 아냐.”

이소선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했는데, 절망을 먼저 이야기한다. 이래서 나는 이소선이 좋다. ‘그래도 희망이다’라는 억지보다는 절망에서 헤어나려는 몸부림을 말하는 이소선의 솔직한 지혜에 귀가 더 솔깃하다.

“이러다가 우째 하겠냐. 대학등록금 낸다고 대출받아 공부하고 나면 취직이 안되니까 대출금도 못 갚아 신용불량자가 된다고 하지 않냐. 태일이가 했던 말이 우찌 이리 꼭 맞는지 모르겠다. 학생들이 노동자들과 함께 힘을 합쳐 싸우지 않으면 학생들도 삼사십년 뒤에는 노예처럼 발에 사슬차고 일한다고 했거든. 칠십 년대 시다가 요즘 비정규직 아니냐. 대학 들어가려고 학원 다니고, 대학 가서는 비싼 돈 들여 외국 나가서 어학연순가 뭔가 하고 와도 취직이 안되고, 운 좋게 직장 들어가면 모두 비정규직이니, 이 세상이 어찌 될 건지 답답하다.”

며칠 전에는 유가협 정기총회를 마치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종로약국 옆 인력시장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더란다. 그런데 일자리도 못 찾고 바들바들 떨다가 돌아서는 모습이 너무도 안됐다며 이소선은 답답할 뿐이라고 한다.

“골라도 그렇게 고를 수는 없을 것이다. 주변에 다 도둑질만 하던 사람들만 골라 자리에 앉혀놨으니 어떻게 없는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있겠냐. 누구 욕할 것 없어. 그런 사람 뽑은 사람이 죄지. 어떡하냐? 올해가 가고 내년이 되면 더 죽겠다는 사람이 많을 건데….”

이소선은 싸운다고 당장 세상이 좋아지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동자고, 학생이고, 재야세력이고 흩어져서 싸울 게 아니라 한꺼번에 힘을 합쳐 맞서야 한다며 힘주어 말한다. 정말 죽겠는데, 갈수록 어려워질 건데, 죽겠다고 한탄만 하지 말고 ‘이판사판 죽을 힘’으로 맞서라고 한다.

“요즘 집회한다고 하면 경찰차로 뺑뺑 둘러싸서 집회장소에도 못 가게 한다며? 썩을 놈들, 지금 어디 계엄령이라도 내린 거냐. 도심 한복판에 경찰 깔고 집회도 못 하게 하는 걸 보니 정말 독재하겠다는 거 아니냐. 몇몇 모여 성명서나 낭독하고 기자회견만 해서는 안돼. 할라면 전체가 모여 집회장을 전경차로 똘똘 싸면 그 앞에 전부 몰려가 차문 열라고 소리 지르고, 도망가지 말고 모두 잡아가라고 경찰차에 올라타야 해. 경찰 유치장이 넘치고 구치소가 넘치게 모두 잡혀가면 돼. 경찰이랑 승강이할 것도 없이 차문 열어라, 우린 독재랑 못 살겠으니 잡혀가겠다, 전국의 전경차 다 갖다 문 열어라, 그라며.”

지독한 절망의 시절, 이소선은 섣부른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절망 밑바닥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 하지만 처절한 저항을 이야기한다. “본래 길이란 없어. 걸어가려니 길이 만들어진 거지.” 희망도 본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저항하는 것일 뿐. 배움이 없다는 이소선의 목소리가 진리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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