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피란선이 선유도에 닿은 후 아버지와 난 부산까지 가는 걸 단념했어

2012.08.17 21:31 입력 2012.08.17 22:19 수정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전쟁 체험은 통사적이고 연대기적인 ‘사건’들만의 기록으로 박제되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 드러나지 않은 기억들 속에 묻힌 실제 전쟁의 비극과 상처를 저는 지금 듣고 있어요. 이건 또 하나의 한국전쟁사입니다. 아직도 진행 중이고 여전히 살아있는 6·25라는 동사는, 그래서 1950년대 이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의 매듭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단의 구조 안에 서식하면서 영혼의 꼬리를 밟고 있습니다. 군산을 떠난 피란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고은=피란선의 1차 기착지는 비응도였어. 몇 가호의 어부마을이 하나 있는데 마을이라고 할 것도 없는 5~6가구의 오두막집들로 이루어진 개펄 기슭이었고 섬 부근의 연안에나 뜨는 돛 한 개의 목선이나 주낙 놓는 작은 배 몇 척이 말뚝에 매여 있었어. 부두라 할 것도 없는 천년포구였지. 씁쓸한 것이 장소의 본연이지.

김형수=지금은 쾌속선이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제법 번화한 섬인데요.

고은=서북풍은 거의 폭풍 규모여서 섬 하나가 온통 그 폭풍의 솔바람 소리와 격렬한 파도 소리에 파묻혀 있어서 옆 사람의 말소리도 잘 알아듣기 어려웠지. 뒷날 내가 통영 미륵도 토굴에서 살 무렵 어쩌다 통영 거리에 건너갈 때면 그곳 항구에서 떠들어대는 소란을 두고 그곳 뱃사람들이 ‘지(제)줏배가 들어 왔나. 으째 이리 귀가 아프노’라고 투덜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었는데 제주도 못지않게 통영 갯가 사람들도 무척 시끌덤벙이더군.

김형수=잠시도 봐주지 않고 목청을 지우는 폭풍과 격렬한 파도 속에서 의사소통의 통로를 찾아내는 뱃사람들의 육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항구마다 톤이 다르다면 결국 바다의 차이가 사투리들의 차이를 빚어낸 셈이네요.

고은=제주도는 바람 속이므로 서로 말할 때는 육지의 대화로는 그 말소리가 바람에 휩쓸려가 버리므로 큰 소리로 말해야 하지. 그런 제주도 어선이나 짐배가 통영 부두에 들어오면 통영의 큰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던 것이지. 바닷가나 바다 위에서의 소리는 육지의 소리 몇 단계의 강도가 필요하지. 그래서 바다에서는 연인의 속삭임 따위는 허용하지 않는 모양이네. 침묵 아니면 절규와 오열이 바다에서의 언어인지 몰라. 그렇다면 바다의 문자도 다 대문자이겠지.

김형수=하, 대문자라 하시다니! 파도의 흥분을 눈으로 재듯이 바다의 오열을 귀로 듣는 실감이 놀랍습니다. 지난번에 노래섬을 말하면서 겨우내 울부짖는 소리를 내는 정신이 소년에게 이입되었다 했는데, ‘노래섬’이라는 시가 바로 그 내용을 담고 있지요? 선생님의 시 세계에서 의미심장한 미학적 지평을 형성한 제주도의 바다들이 사실은 피란민이 기착한 겨울 비응도 앞바다에서 이어진 것 같아요. 모두 죽음과 맞닿은 긴장된 경계에서 출발한 것 아닙니까?

고은=기껏해서 육지를 떠난 지 며칠 안되는 비응도의 한겨울 바다의 멈출 줄 모르는 분노의 동작에 대해서 인간이란 철저한 수동체일 수밖에 없었어. 다만 그 실신 상태의 멀미만이 사라진 그 재생의 행복만으로 일단 마음을 부려놓을 수 있었어. 인심 두터운 집의 호의에 의한 된장국과 생선찌개 따위로 입맛이 돌아온 행복만으로도 우리 일행은 중공군 남하의 긴급 상황이 몰고 온 공포에서 잠시 물러서 있었어.

김형수=아, 갑자기 저도 ‘입맛이 돌아온 행복’을 느끼고 싶어집니다. 서울도 난바다 못지않은 멀미를 일으켜요.

고은=우리 일행을 부산에 데려다주고 돌아갈 피란선 선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부산 갔다 와서 다른 피란민 수송으로 돈을 벌어야 했으므로 사흘 뒤에는 배가 떠나야 했지. 우리 일행은 파도가 좀 잠잠해지는 날을 기다리자 했으나 그런 날은 없다고 하여 이틀 밤을 지나고 이른 아침 배는 다시 닻을 감아 올렸어. 지금이야 두 시간쯤이면 도착할 고군산군도 선유도를 그날 밤중에야 도착했지.

김형수=난리통이라도 돈벌이의 엄혹함이란 빈틈이 없는 법이라.

고은=더 엄청난 멀미는 다시 일행들을 당장 배의 밑창 바닥에 눕혀 놓았지. 판사 부인들은 멀미가 심해서 토사물을 치울 여력도 없었어. 섬에 내린 뒤에도 남편의 부축으로 업혀 갈 정도였지. 선유도는 비응도보다 주민이 많아서 제법 어촌의 면모가 갖추어진 포구더군. 밤의 호롱불빛이 있었고 램프 불빛도 한둘 있어서 그 불빛들은 유난스레 컸어. 살얼음 조각이 길바닥에 깔려 있는 추운 첫날 밤 아버지와 나는 한 어부네 윗방에 들었어. 선유도 역시 비응도 못지않게 섬 인심이 도타웠어.

김형수=선생님은 중공군의 공포를 피해 섬을 떠돌던 극한의 상황을 말씀하시는데 전 자꾸 문학적 감흥이 확장되는 착각이 일어납니다. 방금 내용에 제목만 달면 그대로 시가 될 것 같아요.

그림 | 임옥상 화백

그림 | 임옥상 화백

▲ 나는 날마다 섬 벼랑에 올라서서
몇 시간 동안 파도를 바라보았어
내 존재 부재의식도 그때 생겼는데
아버지는 “내려 와라” 호통치셨지

고은=시는 극한의 선물이니 그렇겠지. 과연 오랜 세월 손님을 조상처럼 섬겨서 맞아 온 조선의 묵은 미풍이 그런 전란 속에서도 여기저기 남아 있었어. 옛날 고대 그리스신화 속에서도 주신(主神) 제우스가 다른 신들이나 인간 세계에서 손님 박대를 엄벌에 처한 사실로 보아 인류에게는 타자 제거나 타자 배척의 다른 한쪽에서 아주 신성한 모순인 듯 타자에의 환대라는 관계의 절경을 이루어온 것이지. 데리다의 ‘환대론’도 돌연변이 명제가 아닌 인류의 핏자국 아니겠는가.

김형수=문명의 층위가 다양하게 펼쳐지던 세계에서 ‘타자’란 근대 주체 개념에서 파생된 옹색한 자기애의 전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손님’ ‘나그네’ 같은 해체 이전의 개념과 타자라는 용어가 함께 사용되는 시대가 된 듯합니다.

고은=어린 시절의 두메마을에도 한 해에 몇 번은 나그네가 오는데 갓 쓴 두루마기짜리는 마을의 지체 있는 집 사랑채에 빈객으로 맞아들였어. 그 사랑채에는 바깥주인 거처를 빈객의 거처로 내어주고 주인은 안채 마누라 방으로 건너가 잤지. 밥상도 정식으로 차려내고 술도 막걸리가 아닌 동동주를 반주로 냈지. 그런 대접으로 사흘쯤 머물다 떠날 때는 노자도 얼마 챙겨 주었어. 또 도붓장수나 먼 길의 보부상이나 밑바닥 뜨내기는 동네 머슴방이 며칠이고 무료 숙식을 제공하는 곳이었어.

김형수=근대인들은 낯선 것들과 마주했을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쪽과 저쪽, 내 편과 네 편, 피아를 구분합니다. 그와 달리 낯선 것들에 대한 신성함이 살아 있던 세계의 풍경은 얼마나 아늑한지 몰라요. 제 고향 밀래미도 그런 곳이었습니다.

고은=이런 오랜 미풍양속은 유라시아 유목사회나 고대, 중세 유럽도 또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아프리카 부족들에게도 그 사생결단의 막판과 적의 사이에서 연면히 이어진 평화공존의 의식으로 보편화되었지. 이런 바탕 위에서 중세 유랑의 시인 남불의 트루바두르나 독일의 미네젱거들이 가능했고 조선 후기 수많은 김삿갓들의 방랑도 가능했던 것이지. 나그네 속에 성자가 있었지.

김형수=문명도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라면 자본주의와 과학의 속도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로 우울증을 앓는 현대가 아닌 ‘다른 문명’의 경로도 가능했었을 텐데 마치 막다른 곳으로 밀려온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습니다. 길은 다 드러나기보다 반쯤 감추어져서 새로운 곳에 도달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 ‘길 잃음’을 가는 자들이 나그네들일 테니까요.

고은=한반도에서도 분단 체제에서 생겨난 간첩이나 오열(五列) 따위에 대한 적의와 불신풍조로 이런 나그네 환대가 없어지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는 핵가족 시대의 이기주의들이 타자 거부의 본능으로 일관하는 동안 손님 사절에 이르렀는지 몰라. 미국 도시의 야박한 분위기와 달리 가령 뉴욕주의 코넬 지방 농촌에 가면 낯선 외국인이나 나그네에 대한 예전 순정파 같은 후대가 눈물겹기만 하지.

김형수=나그네에 대한 환대가 신성한 법률처럼 지켜지는 사회가 아직 적지 않은 것 같아요. 몽골고원의 유목민들이나 자본화가 덜 진행된 중앙아시아 오지의 촌락들은 여전히 환대의 규범이 살아있습니다.

고은=1950년대 초, 오랜 농경사회의 정착성이 크게 동요될 때에도 그 갑작스러운 사회변동으로서의 피란민 사태나 각종 이동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상을 수용할 만한 순후한 인심 민심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웠어. 이런 인심 덕택으로 나의 선유도 피란살이 몇 개월이 결코 쓰라린 기억일 수 없었지. 그곳에서 2~3일간의 대기상태로 배가 떠날 날씨를 점치고 있었어. 왜냐하면 군산항에서 비응도나 선유도에 건너오는 연안 해역의 뱃길과 이제부터 서해 난바다로 나아가서 줄곧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서 남해 항로에 이르는 뱃길은 그야말로 겨울 바다의 격랑에서 결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으니까. 해난사고는 겨울철과 태풍의 계절에 집중되기 십상이지.

김형수=전쟁이 들끓는 용광로처럼 농경정착 문명의 미덕을 뒤섞어버린 1950년대와 그 이후의 한국 사회는 깊은 단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단절된 간극에서 시작된, 소위 근대화로 인한 문화적인 주변성도 극대화되는 길을 밟고요.

고은=그런 대기상태인데 중공군 남하전선이 경기도 오산 일대에서 주춤하게 되었고 유엔군의 새로운 반격이 병력 화력의 배가로 다시 북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선유도에도 들렸어. 누군가가 단파방송에서 들었다 하기도 하고 육지에서 건너온 희소식이라고도 했어. 아버지가 일행인 김기련이나 판사들과 밤중 의논을 한 나머지 전세 호전이라면 굳이 부산까지 갈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고 두 법관 가족의 한 판사는 전세 호전을 믿을 수 없다는 것과 중공의 인해전술을 유엔군이 못 당할 것이라는 것을 내세우며 죽어도 부산에 가서 죽고 죽어도 대마도에 가서 죽겠다고 역설했어. 결국 피란 일행 네 가족이 원래의 목적지인 부산으로 떠나기로 했어.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끝내 마음을 바꿔서 우리 부자는 선유도에 남겠다고 일행에게 통보했어. 나는 아버지의 결단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 미친 파도 더미를 무릅쓰고 출발하는 배 위의 일행들을 아버지와 나는 포구 가장자리에 서서 전송 작별을 했어. 물론 우리 부자가 부산까지 가는 그 비싼 피란 요금을 선불을 했으므로 우리로서는 적지 않은 결손이었지. 사실인즉 나는 겨울 바다의 위험이나 멀미에도 불구하고 부산에 가고 싶었지만 그 첫 고향 유리(流離)는 아버지에 의해 폐기되고 말았어.

김형수=거의 평생의 동작이라 할 나그네로서의 모험이 일단 거기서 저지된 셈입니까?

고은=그렇지. 나는 날마다 섬의 망주봉 벼랑을 기어 올라갔어. 그러다가 그 섬의 포구 위쪽에 자리한 선유국민학교에 가보았어. 교실이 두 개쯤 있고 숙직실이 교장 겸 교사의 숙소였는데 바로 그곳에서 내 고향 이웃마을 미제부락 출신의 김종숙을 만났지. 그이는 내 국민학교 5학년 담임을 잠깐 맡은 적도 있었어. 그 학교에서 쓰고 남은 폐지를 모아 나는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어. 아버지와 나는 방 하나에서 살며 헌 냄비와 그릇 몇 개를 얻어서 자취를 하기 시작했어. 뒷산에 가서 땔감도 해오고 뒷산 너머에 있는 풍장(風葬) 몇 군데에서 마을 노인의 주검이 육탈해 가는 것도 알게 되었지. 김종숙은 세계문학전집 일어판을 완독한 문학 취향의 교사였어. 나는 ‘보바리 부인’이라든가 ‘줄리앙 소렐’이나 ‘베르테르’라는 이름들을 들었고 나 혼자 섬의 모래를 거닐며 파도 소리를 온몸에 담기도 했지. 그런 이름들이 전쟁이나 피란 그리고 내 기억 속에 막 담겨 있을 고향에서의 학살 따위의 비극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그 섬의 국민학교 작은 방안에 떠도는 공기가 되어서 그 이름의 주인공들의 유령으로 떠도는 환상도 일어났어.

김형수=예기치 않은 장소, 예기치 않은 인연이 선생님을 또 문학으로 끌고 가고 있어요.

[고은과의 대화](48) 피란선이 선유도에 닿은 후 아버지와 난 부산까지 가는 걸 단념했어

고은=선유도의 날들은 파도와 파도 소리의 날들이었어. 파도 소리는 천연의 리듬을 발휘했고 끝내는 그 압도적인 파도 소리의 음성은 음성이 아니라 하나의 귀 먹먹한 적막이 된다는 사실도 알았지. 침묵이란 소리의 반대, 표현의 뒤가 아니라 소리들의 본성인지 몰라. 전쟁은 육지의 것이고 파도 소리의 적막은 나의 것이었어.

김형수=비응도, 선유도로 이어지는 전란의 피란처에서 큰 바다의 소리와 적막이 동시적인 우주의 리듬 속에 있는 한 몸임을 아셨군요. 관세음(觀世音)이란 세상의 모든 흔들림을 꿰뚫어보는 고통이며 적멸인가 봅니다. 통영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토굴이나 제주도의 태평양과 잇달은 거대한 바다의 씨앗이 전쟁을 피해간 곳에서 싹트게 되었다니 놀랍습니다.

고은=파도는 반복의 운동이지. 파도는 바람을 원인으로 하는데 어쩌다 바람 아닌 지진 따위의 갑작스러운 지각의 변주에 의해서 해일이 되기도 하지. 쓰나미라는 일본말이 이제 국제어로 된 그 해일의 상태 말이네. 그리고 달의 인력을 받은 조석(潮汐)의 파도도 있지. 그 밖에도 반복 아닌 고립파(孤立波)가 있고 바다 수면 위에 오르내리지 않는 로스비파도 있고 대륙붕파도 있는 모양이네. 저 제주도 서남쪽 이어도 일대에 그런 육붕파가 돌아다니는 모양이더군. 파도는 파장에 따라 파속이 다르지. 그러니까 파장이 길면 파속이 커진다네. 긴 파도가 앞서서 오고 나면 그 다음에 짧은 파도는 뒤로 처지면서 분산되고 말지. 파도는 이런 파장에 의해서 달라지지 않고 바다의 깊이에도 영향을 받아서 심해파와 천해파(淺海波)로 나뉘게 된다네.

김형수=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시는지요. 바다의 질량과 깊이, 무게와 속도가 각기 다른 이름을 얻어 가는 것이 무서운 축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같아요.

고은=파도는 내 종교였네. 이런 파도의 무위와도 같은 작위를 한나절이고 몇 시간이고 바라보다가 나는 내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재의식도 생겨났지. 아니 나는 왜 내가 아닌가 하는 자신의 타자성 따위도 생겨났어. 파도 앞에서 모든 진리의 고착성은 녹아버리지.

김형수=부재에 부재를 덧칠하는 파도의 광경에서 ‘부재의식’이 생겨났다는 말씀이 마치 존재하는 세계를 몽환적인 것으로 치환시키는 듯합니다. 꿈과 몸이 그렇듯이 원인과 결과의 인과적 법칙이 주체를 잃었을 때 수없이 많은 형식 이전의 형식으로 방출되듯이 말입니다. 파도와 바다에서 깨닫게 된 허무 또는 ‘자신의 타자’는 굳이 라캉 같은 심리학적 틀을 빌리지 않더라도 정신의 깊은 절경을 경험하게 합니다.

고은=아버지는 이런 나에게 사고가 나지 않을까 해서 자주 나를 숙소로 불러들였어. 그리고 화강암으로만 이루어진 망주봉 벼랑을 타고 올라가서 그 꼭대기에 불안하게 서 있는 나를 어서 내려오라고 호통을 치기도 하면 나는 그런 아버지가 점점 나로부터 멀어지는 사실을 알았지. 아무튼 그 선유도 속의 생활은 임시수도 부산이라는 목적지를 단념한 실망과는 달리 아버지와 나라는 이 2대의 직계 남성끼리의 적나라한 ‘대면’을 실현한 것이지.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고 아버지가 나의 씨앗이라는 핏줄의 단독성이 그곳에서의 육친 체험 다음에는 있을 수 없었어. 이를테면 아버지와의 마지막 잔치였지.

김형수=아버지와 혈연적인 연대가 끝나는 자리, 선유도의 망주봉에서 스스로의 아버지가 되셨네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얼음바다를 헤치며 아버지를 떠나 세계의 심연으로 향하는 <정복자 펠레>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고은=아버지는 섬세했고 무미건조하거나 지루한 일상으로도 얼마든지 신명난 시간이 되는 그런 삶의 파도를 가진 사람이었어. 사물에의 감각도 진지했어. 무엇보다 조금도 세상에 대한 잔인성이 전혀 없는 뼈가 없는 살의 느낌이었어. 그래서 나는 이따금 내 증오심이나 저주에 그것의 핵심이 들어 있지 않은 공허를 깨달은 나머지 아버지의 자취를 발견한다네.

김형수=권위와 전통으로 굳건한 아버지가 아니라 스스로 의식주의 문제를 자기완결형으로 해결해가는 아버지들의 모범에는 파괴적인 공격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가축과 곡식을 기르고 대지의 호흡에 몸을 맡긴 삶의 순정성이 안겨준 성품이 아닐까 해요.

고은=태풍이 태풍의 눈이라는 허무의 핵심을 가지고 있을 때 그 태풍은 본질적으로 태풍일 수 없지. 선유도 생활의 바다는 내 생애의 여러 바다 체험에 대한 선험이 아닌가 하네. 전쟁은 그 바다에서 고대나 미래 같았어.

김형수=전쟁을 피해 바다로 나선 길이 보들레르의 말처럼 ‘우주보다 큰 허기’를 만나게 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대지의 상상력이 아니라 대해(大海)의 역동성이 향후의 스펙터클한 떠돎을 잉태했다고 생각되어요. 바다 이야기를 통해서 꽤 많은 의문이 풀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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