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3이 말하는 사정관제

2013.01.07 22:08 입력 2013.01.09 18:27 수정

“슈퍼맨 원하는 입학사정관 전형… 맞춤형 학생부, 소개서 대필 판쳐”

“입학사정관제는 저에게 모 아니면 도였어요. 아무 생각 없이 찔러봤는데 합격해서 로또를 맞은 애가 있는가 하면 올인했다가 다 떨어져서 수능까지 망친 애도 있는 게 현실입니다.”

지난달 3일 서울 노원구 카페에서 만난 이모군(19)은 마지막 남은 입학사정관제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 5곳의 사정관제 전형에 지원했는데 4곳에서 불합격의 고배를 마신 것이다. 지난해 여름을 통째로 사정관제 준비에 바쳤던 이군은 억울한 마음이 가득했다.

▲ “학생기자·봉사활동 등
온갖 스펙 쌓아도 탈락
이 제도는 모 아니면 도”

이군은 교내에서 영자신문 동아리를, 외부에서는 전국 고등학교에 배포되는 주간지 학생기자도 했었다. 봉사동아리를 직접 꾸려 250시간의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학교 공부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해온 것이다. 사정관제 서류 준비에도 만만치 않은 공을 들였다. 한 학교당 10~50장이나 되는 서류를 준비하려니 한 달은 족히 걸렸다. 대학마다 다른 자기소개서 양식에 한 곳당 4000자에 달하는 자기소개서 분량을 채우기 위해 8월 말~9월 초 원서접수를 하기 직전에는 밤까지 꼬박 새워야 했다.

그러나 이군은 왜 떨어졌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처럼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인터넷 수험생 커뮤니티에서 정보를 찾아보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물어봤지만 답은 똑같았다. “모른다”였다. 뽑힌 친구도 자기가 왜 뽑혔는지 모르고, 떨어진 친구도 자기가 왜 떨어졌는지 모르는 게 바로 사정관제였다. 이어 이군은 어떻게 대학에 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사정관제에 떨어진 이후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은 터였다. 서류 준비부터 합격자 발표까지 2개월간 사정관제에만 몰두하느라 정작 수능에는 신경을 못썼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심정이었다. “수능공부를 하던 중간에 서류 준비를 해야 하니까 수능준비 스케줄이 깨지죠. 면접까지 보게 되면 이 대학이 내가 갈 대학이란 느낌도 들어서 기분이 붕 뜨는 게 사실이에요. 지금도 가장 후회되는 게 이 부분이죠.” 논술전형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수능 최저등급을 맞추기 위해 수능 준비를 병행하기 때문에 수시에서 떨어져도 정시에 도전할 수 있지만, 서류와 면접이 전부인 사정관제를 준비하다 보면 으레 수능 준비에 소홀하게 된다는 얘기다.

얼마 뒤에 이군은 내신이 1등급대인 친구의 사정관제 합격소식을 들었다. 내신이 2등급 후반대인 이군은 그래도 반에서 5등 정도 하는 상위권 학생이지만 성적도 자신보다 좋고 공인자격(스펙)도 훌륭한 그 친구에게 대적할 수가 없었다. 외국에서 살다온 애들이 한 반에 최소 2~3명씩 있는 상황에서 학교 영어말하기대회의 상은 도저히 받을 수가 없었다. 국어경시대회에서는 수업시간에 배우지도 않은 고전시가를 한자 원문 그대로 주고 해석하도록 시켰다. 이군은 경제분야에 관심이 많았지만 정작 학교에서는 경제 경시대회를 열지 않았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입학사정관제 코너에 7일 입시 가이드북 20여권이 진열돼 있다.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입학사정관제 코너에 7일 입시 가이드북 20여권이 진열돼 있다.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이군은 주변에서 사정관제를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사정관제의 취지가 왜곡되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자기소개서는 물론이고 교사추천서까지 대신 쓰는 장면을 목격했다. 학생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 그 정보를 토대로 자기소개서를 써주는 식이다. 교사추천서를 외부 업체에 맡겨 대필한 뒤 교사에게 가져가 그대로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사정관제 학원에 다니며 특별지도를 받은 친구는 상위권 대학에 합격했다. 교사 고유의 영역이었던 학교생활기록부도 사정관제에 맞춰서 작성되곤 했다. 학생들이 어떻게 써달라고 교사에게 말하면 그대로 써주는 식이다. 학교들이 학생들의 입시결과를 높이기 위해 ‘학생부 잘 써주기’ 경쟁을 하는 게 현실이다. “나는 한 달 동안 피땀 흘려 자기소개서를 직접 썼는데 대필하고 합격하는 애들을 보니 박탈감이 심했죠. 대학에서 한다는 표절검사시스템으로는 부족해요.”

이군은 아직도 대체 사정관제에서 무엇을 중점으로 보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 학과를 합쳐 50명을 선발하는 연세대 사정관제 창의인재전형에서는 올해 에세이 논제로 ‘치타랑 우사인볼트랑 달리기 경주를 하면 누가 이길까요?’를 출제했다. 작년엔 ‘세종대왕이랑 ET랑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였다. 이군은 이런 문제들에 어떤 답을 써야 합격할 수 있느냐고 되레 물었다. “왠지 자신이 좀 창의적일 것 같다고 생각한 애들은 다 이 전형에 썼어요. 근데 낚인 거였죠. 아는 친구 중 1명이 이 전형에 붙었는데 특목고생이었습니다. 어떤 답을 써야 이 전형에 붙을 수 있는 건가요?”

이군은 결국 마지막 남은 사정관제 1곳에 합격했다. 그는 “어머니가 사정관제를 가리켜 슈퍼맨을 원하는 전형이라고 하더라”고 지적했다. “꿈을 향해 열심히 활동했다고 생각했는데 대학들은 저를 받아주지 않더라고요. 사정관제를 쓴다는 후배가 있다면 말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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