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저항의 시혼’ 김남주 20주기

2014.02.14 21:08 입력 2014.02.14 23:02 수정
김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전사’ 김남주의 ‘사상의 거처’는 사라졌는가

지난 2월12일 경향신문 5층 강당에서 김남주 20주기 심포지엄이 열렸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기조발제 ‘역사에 바쳐진 시혼’에서 “군사독재와 외세 지배에 대한 불굴의 저항, ‘광주 코뮌’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짧지만 강렬한 해방의 경험, 그리고 이 경험의 민중적 확산을 통한 역사의 반전-이러한 광주항쟁의 정신을 온몸으로 전 생애에 걸쳐 살았던 인물로서 김남주를 빠뜨릴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고 말했다.

전남대 함성지 사건과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 사건으로 오래 투옥된 김남주는 1988년 전주교도소에서 나온 직후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에 시인은 항시 있어야 하고 저 또한 있을 생각입니다”라는 결의를 다졌듯 1994년 세상을 뜰 때까지 스스로 ‘전사’로 불리길 원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등졌던 1994년조차 김남주의 뜻과는 달랐다. 김남주는 혁명적 조직을 원했으나 변해버린 현실과 그의 외침 간의 거리는 멀었다. 1988년 영어의 몸에서 자유로워진 이후에도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마다 찾아갔으며 투사이자 전사의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조직도 파괴되고/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부끄럽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징역만 잔뜩 살았으니/ 이것이 나의 불만이다”라는 시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1991)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일상과 투사의 삶 간의 간극으로 적지 않게 힘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4년 그의 사후, 김남주의 직설적이고 명징한 언어들의 의미는 점차 잊혀져 갔다. 시인의 길보다 혁명을 꿈꾸는 전사의 길을 걸었으며, 문학은 변혁의 무기라면서 시인들이 피했던 용어들을 자신의 시에서 사용했던 그의 자취는 갈수록 변화되어 가는 세계와 조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980년 2월3일 신향식(앞줄 왼쪽), 이재문(앞줄 일어선 사람), 김남주(이재문의 왼쪽) 등 남민전 사건 관련자 73명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불행히도 이재문은 사건 2년여 만인 1981년 11월23일 옥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신향식은 1982년 10월8일 사형이 집행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 2월3일 신향식(앞줄 왼쪽), 이재문(앞줄 일어선 사람), 김남주(이재문의 왼쪽) 등 남민전 사건 관련자 73명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불행히도 이재문은 사건 2년여 만인 1981년 11월23일 옥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신향식은 1982년 10월8일 사형이 집행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긴급조치와 사상적 성숙

1971년 말부터 대학생들은 학생운동 참여가 어려웠다. 위수령 때문에 많은 활동가들이 대학에서 제적돼 학생회 기능이 멈춘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간에도 활동가 양성은 이어졌다. 1973년 2학기 서울대 상대의 경우, 전체 학생 195명 가운데 150명이 서클 대항 체육대회에 참석할 정도였다.

당시 사회과학 서적이 귀했지만 동대문·청계천 등 서울뿐만 아니라 대구, 광주, 부산의 헌 책방을 뒤지면 <고요한 돈강> <세계사교정> <낙동강> <임꺽정> 등 해방 직후 발간된 잡지나 서적들이 널려 있었다. 학생들은 이 책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김남주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전남대에서는 문학계간지인 ‘창작과 비평’, 박현채와 리영희의 저서 그리고 금서로 취급되던 <들어라, 양키들아> <스페인 내전> <레닌의 생애> <붉은 10월> <인간의 세속재산> 등이 널리 읽혀졌다.

민청학련의 전국적 시위 실패 이후 활동가들은 박정희 정권이 허약한 정권이 아닌 것을 감지하고 직업적 운동가 양성을 위한 여러 가지 모색을 했다. 학생 서클의 대표적 유형은 이론적 탐구보다 행동을 중시한 ‘후진국사회연구회’ 같은 곳이었다. 이에 비해 서울대 ‘한국사회연구회’(한사연)는 무조건 학생운동에 참여하기보다 이론적 탐색을 중시하는 조직이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한사연은 40명이 넘는 1학년생이 세미나에 참석해 2~3개팀으로 나눠 세미나를 진행했다. 이처럼 민청학련 이후 학생운동은 대규모 조직을 만들기보다 장기적으로 운동 주체를 키우는 준비론적 경향을 지니게 됐다.

김남주가 관여했던 전남대 학생운동은 1971년 10월 교내신문 ‘녹두’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민족사의 새로운 구성을 주창했다.

또한 1972년 즉각적인 반유신 투쟁을 촉구했던 지하신문 ‘함성’의 작성을 위해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지하신문, 러시아혁명기 지하신문의 배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유인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들인 가리방(등사판), 철필, 묵지를 마련하기 위해 주머니 돈을 털고 책을 팔기도 했다. 지하신문 ‘함성’은 유신체제에 사형을 내린다는 의미에서 죽을 사(死)를 써서 유신을 비판했고 유신체제에 동조하는 행동을 죽음의 행렬, 노예의 길로 묘사했다.

이후 김남주와 동료 김상윤은 카프카서점과 녹두서점을 운영하며 일본어 사회과학 학습팀을 운영했다. 뿐만 아니라 1978년에는 본격적으로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박관현, 안진, 박병섭 등을 중심으로 들불야학을 조직했으며, 1979년 광천공단에서 야학활동을 하던 학생들이 공단 실태조사를 위해 ‘사회조사연구회’를 만들기도 했다.

■ 남민전, 김남주 그리고 사상의 거처

1976년 2월29일 서울 중구 청계천3가 태성장에서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3인은 잭나이프를 포개 잡고 ‘남민전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 발기인 3명은 강령과 규약, 선서문 등을 검토하고 지도부를 형성했다. 남민전은 실제 지도부로서 남민전과 반유신 민주화 투쟁의 지도부로서 ‘한국민주화투쟁국민위원회’(민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검거된 후에도 남민전이란 조직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성원들도 있었다.

남민전은 몇몇 지도부의 결단의 산물이 아니었다. 누구도 유신체제가 붕괴되리라고 믿지 않은 긴급조치 9호 이후 대부분 조직운동이 활동을 정지한 시기에 민주주의와 변혁을 지향하는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투쟁하고 저항하는 것이라고 이들은 판단했다. 긴급조치 9호는 운동인자에게 전향 혹은 재구속과 도피 및 활동이라는 양단 간의 선택을 강요하는 조건을 만들어냈고 결과적으로 ‘싸우다 죽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남민전이 표방했던 투쟁 방향은 먼저 유신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적인 연합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한국 사회를 신식민지로 규정했다. “식민지 사회에서는/ 단 한 사람도 자유롭지 못하다고”(‘각주’)나 “사상은 노동의 대지를 그 밭으로 삼는다”(‘사상에 대하여’)는 김남주의 시 구절은 당시 남민전 구성원의 현실인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준다. 김남주는 “신식민지 사회에서의 민족해방이란 제국주의로부터의 고리를 끊어내고 최종적인 변혁을 이룰 때까지 민족모순의 과정을 계속해 나아가는 것이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경과한다든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즉 1978년 김남주 자신이 번역한 파농의 <자기 땅에서 유배받은 자>에서 언급한 것처럼 탈식민화란 폭력투쟁을 통해 어떤 ‘종’(種)의 인간을 다른 ‘종’의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특히 1978년은 남민전 활동이 적극적으로 이뤄졌던 해다.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삐라의 살포가 전개되었다. 10월4일 속칭 ‘파라슈트 작전’을 통해 ‘김치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게 만든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라는 논설이 실린 ‘민중의 소리’ 2호를 발간했다. 2호의 주요 내용은 반독재 학생운동을 강화하자는 논단, ‘독도 영해권을 왜 팔아먹느냐’는 사설, 김남주가 가십난에 쓴 ‘백성의 마음은 속일 수 없다-돈과 권력의 궁합’, 대학가 소식과 동일방직 투쟁 소식이다. 무장투쟁 조직인 혜성대라는 남민전 조직은 당국의 무장폭동 사주라는 음해와 달리 선전선동의 주도, 자금 확보와 체력 단련을 하는 수준이었다. 혜성대에서 김무송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진 김남주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남민전에 들어갈 때에 이름도 없이 죽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이 죽어주기를 내가 바랄 수 있겠어요. 해방은 죽음 없이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 인식을 왜 내가 실천하지 않고 남이 해주기를 기다려야 되겠어요.”

■ 70년대와 80년대를 잇는 사상의 징검다리

이처럼 김남주가 사상과 조직을 만들고 전사이자 투사가 되기를 결의했던 시기는 헌법으로 보장된 기본권을 국가가 유신이란 이름으로 무력화시킨 때였다. “총구가 나의 머리 숲을 헤치는 순간”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하는 ‘진혼가’의 한 구절처럼 폭력과 죽음의 두려움에 맞서 스스로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결단의 시점이었다.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김남주, 그는 유신에 맞섰던 것이다.

하지만 잊혀져 갔던 김남주와 전사들은 반유신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들은 1980년 광주를 거치며 근본적인 사상과 운동을 실천하기 시작한 1980년대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였다. 김남주 20주기, 그가 마지막까지 놓치려 하지 않았던 ‘사상의 거처’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은 유신과 신군부란 폭력에 맞섰던 ‘사상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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