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히포크라테스는 누구인가

2014.08.15 21:11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의사, 그러나 우리가 가장 모르는 의사

▲ 생몰연대도 알 수 없는 ‘의학의 성인’… ‘합리성’ 추구한 의학의 시초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이름을 빌린 의사 선서는 ‘의술의 신’ 이름이 가득

의학과 무관한 사람이라도 대개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377년?)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그에 대해 물으면, 옛날 서양의 유명한 의사라거나 그의 이름이 붙은 ‘의사 선서’를 언급한다. 의학 역사를 전문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더라도 거기에서 많이 나가기는 힘들다. 그만큼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별로 없다는 이야기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이름난 의사, ‘의학의 성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사람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니! 뜻밖이지만 사실이다. 생몰 연대도 어림값일 뿐이다.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자료가 적지는 않다.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출신의 의사 소라노스(서기 100년경)가 쓴 것을 비롯해서 전기도 몇 편 있고, 전승된 이야기는 제법 많은 편이다. 하지만 그것들의 신뢰성이 크게 떨어져 역사적 사실이라고 인정할 만한 것은 별로 없다.

‘아르타크세륵세스의 선물을 거절하는 히포크라테스’. 프랑스 화가 지로데(Anne-Louis Girodet, 1767~1824년)의 작품. 오른쪽에 무릎을 꿇고 선물을 바치는 사람이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륵세스이고 그 왼쪽에서 손을 저어 거절하는 사람이 히포크라테스이다.

‘아르타크세륵세스의 선물을 거절하는 히포크라테스’. 프랑스 화가 지로데(Anne-Louis Girodet, 1767~1824년)의 작품. 오른쪽에 무릎을 꿇고 선물을 바치는 사람이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륵세스이고 그 왼쪽에서 손을 저어 거절하는 사람이 히포크라테스이다.

■ 플라톤 저서 ‘프로타고라스’에 최초 등장

지금까지 알려지기로는 히포크라테스에 대해 최초로 기록을 남긴 사람은 플라톤(기원전 427~347년)이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자네가 자네와 동명이인이자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인 코스 사람 히포크라테스에게 가서 자네에게 도움을 주는 대가로 돈을 지불할 마음이 있는데, 누군가가 ‘말해 보세요, 히포크라테스. 히포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이기에 그에게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시나요?’라고 자네에게 물어본다면, 자네는 뭐라고 대답하겠나? 그가 말했지, ‘의사여서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강성훈 옮김. <프로타고라스>) 짧은 대화이지만 두 명의 히포크라테스가 등장한다. 하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인 가상의 청년이고 또 한 사람은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인 코스 출신의 의사 히포크라테스이다. <프로타고라스>에 언급된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이것이 전부이다.

이번에는 <파이드로스>를 보자. “소크라테스 : 모르긴 몰라도 의술의 방식은 연설술의 방식과도 같을 걸세. 파이드로스 : 어떤 방식이죠? 소 : 양쪽 모두에는 본성을 나누는 과정이 불가결하니, 한편에서는 육체의 본성을 다른 편에서는 (영)혼의 본성을 나눠야 하네. 만약 자네가 기술로써 한편에는 약과 식이요법을 처방하여 건강과 활력을 만들어 주고, 다른 편에는 이야기와 규범에 맞는 활동을 처방해서 자네가 전하길 원하는 모든 신념과 훌륭함을 전해 줄 참이라면 말일세. 파 : 그러는 것이 합당하기는 하니까요. 소 : 그러면 자네는 전체의 본성과 무관하게 (영)혼의 본성을 명실상부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파 : 만약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들 중 히포크라테스의 말을 어느 정도 믿을 필요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방법 없이는 육체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지요. 소 : 그래, 벗이여, 그의 말이 훌륭하지. 하지만 히포크라테스와는 별도로 우리는 이야기를 잘 검토해서 그것이 그 사람과 어울리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네.”(김주일 옮김. <파이드로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도 <정치학> 7권 ‘이상국가와 교육의 원리’에서 히포크라테스에 대해 말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의사로서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천병희 옮김. <정치학>)

■ ‘코스 출신 위대한 의사’ 외엔 정보 없어

히포크라테스와 거의 동시대이거나 직후의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에 언급된 내용을 통해 히포크라테스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짧은 문장에서 ‘히포크라테스식 사유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 ‘코스 출신’ ‘위대한 의사’ 정도이다. 꼭 플라톤의 저서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후대에 히포크라테스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십몇대 자손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아스클레피오스부터 히포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이름들이 명기된 족보가 등장하고, 나아가 제우스 신의 20대 손자라는 해석까지 나타나지만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근거는 없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의사인 아폴론을 두고, 아스클레피오스를 두고, 히게이아를 두고, 파나케이아를 두고, 그리고 모든 남신과 여신을 두고, 그들로 나의 증인을 삼으면서 내 능력과 판단에 따라 이 선서와 이 계약을 이행할 것을 맹세합니다.” 역사적으로 ‘히포크라테스 의학’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초자연적, 종교적인 데에서 벗어나 합리성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선서에서는 의술의 신들을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있다. 합리적 의술을 행한다면서도 여전히 신의 권위를 빌리고 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라는 표현도 그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또한 신전 의술과 합리적 의술의 관계는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완적인 측면이 많다.

고대 그리스 의학의 중심지로 코스와 크니도스, 그리고 시칠리아를 꼽는다. 코스는 지금의 터키 서해안에 인접한 섬이고, 크니도스는 코스 섬에서 멀지 않은 반도이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남단의 섬이다. 지금은 세 곳의 국적이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로 각기 다르지만 고대에는 모두 그리스 식민지였다. 또 코스와 크니도스는 당시 이오니아라고 불린 지역에 속했는데, 이오니아는 서양 철학과 과학의 발상지이다. 요컨대 고대 그리스의 합리주의적 의학은 철학과 과학이 싹트던 곳에서 그 영향을 받으며 탄생했다. 히포크라테스는 바로 그 코스 섬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의사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히포크라테스가 허구의 인물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볼 일은 아니다. 연대가 확실치는 않지만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설파할 무렵에 히포크라테스라는 코스 출신의 저명한 의사가 활동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히포크라테스가 2000년이 넘도록 명성을 날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와 근거는 <히포크라테스 전집>이다.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조금 갈리지만 이 ‘의학 전집’은 “인생은 짧고 예술(기술, 즉 의술)은 길다”라는 문구로 유명한 <금언집> 그리고 <히포크라테스 선서> 등 약 60권의 책이나 문서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원전 280년경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편찬되었다고 여겨진다. 히포크라테스 시대보다 100년 뒤의 일이다. 전집을 이루는 저서들의 메시지는 공통적이다. 연재 17회에서 언급했던 <신성병에 대하여>와 같이 질병은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생기는 자연 현상으로 치료도 신에게 기도하는 대신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 ‘히포크라테스 전집’ 저자는 최소 20여명

전집의 저자는 누구인가? 히포크라테스의 저작으로 확인된 것은 단 한 권도 없으며, 저자가 확실하게 밝혀진 책도 없다. 하지만 대부분 기원전 5세기 후반과 4세기 전반 코스와 크니도스 출신 의사들의 저작물이라는 데에는 견해가 일치한다. 그리고 나중에 추가된 책도 몇 권 있다는 것이다. 전집에 히포크라테스 이름이 붙은 연유도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히포크라테스가 ‘코스 학파’ 의사 중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용과 문체 등을 볼 때 전집의 저자는 20명이 넘는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히포크라테스 전집>은 한 천재의 작품이 아니라 합리적인 의술을 추구하는 여러 의사들의 성과가 집대성된 것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합리적 의술의 탄생이라는 의학 역사상 가히 혁명적인 변화는 초인적인 개인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집단 지성’의 산물인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를 영웅시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다. 새로운 의술의 등장이 히포크라테스라는 인물로 의인화되었다고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히포크라테스에 관한 전설 두 가지를 덧붙인다. 역사적 사실이어서가 아니라 시대 상황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 동안 ‘아테네 역병’이 창궐했을 때 아테네 성 안에 인위적으로 불을 지펴 역병을 퇴치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등 그 역병에 대한 기록들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없다. 히포크라테스가 돋보이도록 나중에 꾸며낸 이야기일 터이다. 역병에 무력한 인간들이 영웅을 기대하는 심리의 반영일 수도 있다.

또 한 가지는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륵세스(재위 기원전 465~424년)가 역병을 퇴치해 달라고 히포크라테스에게 금은보화 등 선물을 바치지만 적국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전설이다. 이것은 히포크라테스의 ‘애국심’과 ‘청렴함’을 칭송하는 이야기로 널리 회자되었다고 한다. 페르시아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이 설화도 사실이라는 근거가 없고, 따라서 이것으로 히포크라테스를 평가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의사가 적이라고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 예찬의 대상일 수 있을까? 그 당시는 그랬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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