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에볼라 출혈열과 고대의 역병

2014.09.26 21:43 입력 2014.09.26 21:56 수정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고대 역병으로 10명 중 3~4명 사망… 에볼라는 비할 바 안돼

▲ 피해 규모도 엄청나지만 사회 질서 완전히 무너진 게 더 큰 문제… 인간의 의지 넘어 역사의 향방 좌우하기도

지난 23일(미국 동부 현지시간) 뉴욕타임스 등은 최악의 경우 에볼라 출혈열 환자가 내년 1월 말까지 140만명에 이를 수도 있다고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보고서를 인용해 보도했다. 이는 감염자가 최대 2만명이 되리라는 8월 하순의 세계보건기구 전망치를 크게 뛰어넘는 것으로, 세계보건기구 대변인은 자신들의 예상이 틀렸다고 인정했다. 또한 199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민간단체 국경없는의사회의 대변인은 이번 에볼라 열이 ‘이미 사상 최악의 대유행’이라고 표현했다.

에볼라 열 환자가 최초로 발생한 것은 1976년 8월26일 콩고민주공화국(당시 국호는 자이르)의 북부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 얌부쿠에서다. 마을 학교 교사인 로켈라는 며칠 전 북쪽으로 100㎞쯤 떨어진 에볼라 강 일대를 다녀와서는 열이 오르자 말라리아가 재발한 것으로 진단받았다. (에볼라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 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에볼라 강 유역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9월5일부터는 모든 신체 구멍에서 출혈이 생기더니 사흘 뒤에 사망했다. 마을의 관습대로 로켈라의 어머니를 비롯해 여자 가족과 친척이 그의 시신을 수습했는데 며칠 뒤 그들 대부분이 비슷한 증세를 보이고는 사망했다. 연말까지 민주콩고에서는 318명이 발병해서 280명이 사망했다.

이 병은 병원체인 에볼라 바이러스의 특성에 따라 자이르형, 수단형, 레스턴형, 코트디부아르형, 분디부교(우간다)형 등 다섯 가지로 분류되는데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딴 것이다. 수단형 에볼라 환자가 처음 발생한 것은 자이르형보다 두 달 앞선 1976년 6월27일이다. 자이르(민주콩고)와 인접한 수단 남부의 엔자라 마을 면화공장에서 일하는 유그는 처음에 열이 났고 이어서 출혈이 생긴 뒤 7월6일에 사망했다. 그리고 연말까지 수단에서 모두 284명의 환자가 생겨 151명이 사망했다. 에볼라 열은 1976년 처음 모습을 나타낸 이래 2012년까지 환자 2407명, 사망자 1582명이 발생해 66%라는 높은 치사율을 보였다. 특히 자이르형은 1459명 발병, 1124명 사망으로 치사율이 무려 77%나 되어 발병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에볼라는 이처럼 치사율은 매우 높지만 다행스럽게 전파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스페인 의료진이 지난 22일 시에라리온에서 에볼라에 감염돼 수도 마드리드 인근 군사기지로 이송된 신부 마누엘 가르시아 비에호를 구급차로 이송하고 있다. 마드리드 | AP연합뉴스

스페인 의료진이 지난 22일 시에라리온에서 에볼라에 감염돼 수도 마드리드 인근 군사기지로 이송된 신부 마누엘 가르시아 비에호를 구급차로 이송하고 있다. 마드리드 | AP연합뉴스

■ 에볼라 ‘사상 최악의 대유행’ 맞을까

하지만 이번의 에볼라 유행은 양상이 크게 다르다. 2013년 12월6일 기니에서 첫 환자가 발견된 이래 올해 9월23일까지 9개월 동안 환자 5843명, 사망자 2803명이 생겼다. 치사율은 48%로 이전보다 낮지만, 환자는 지난 36년 동안의 2.4배나 되었다. 발생 지역도 중부아프리카에서 서부아프리카로 이동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내년 1월 말까지 환자가 140만명 발생하고 치사율이 48% 수준을 유지하면 사망자는 67만명을 넘어선다. 끔찍한 일이다. 그럼 에볼라가 국경없는의사회의 주장처럼 ‘사상 최악의 대유행’일까? 과거의 역병들을 살펴보자.

우선 18회에서 간략하게 언급했던 ‘아테네 역병’에 대해 알아보자. 자신도 이 병을 앓았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에 이렇게 기록했다. “지난해 초여름, 역병이 갑자기 아테네를 덮쳤다. 이 역병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도 용서치 않았다. 지도자 페리클레스도 이 때문에 죽었고, 무수한 아테네 사람들이 생명을 빼앗겼다. …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전쟁에서 초기에는 우세했던 아테네가 이 역병이 창궐한 뒤로는 급속히 전의와 전력을 상실했다.”

역병이 1차로 맹위를 떨친 기원전 429년,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처음 상연된 소포클레스(기원전 497~406년)의 <오이디푸스 왕>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멸망의 신. 그것은 무서운 역병이 되어 나라를 황폐케 했으며, 때문에 카드모스의 웅장한 저택은 살고 있던 사람들이 사라져 텅 비었고, 그와 반대로 저승은 비탄의 소리로 가득 찼다.” <오이디푸스 왕>의 무대는 아테네가 아니라 테베이지만 소포클레스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아테네 역병을 묘사한 것일 터이다.

쥐벼룩 앞창자 속에 들어 있는 페스트균의 전자현미경 사진(미국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

쥐벼룩 앞창자 속에 들어 있는 페스트균의 전자현미경 사진(미국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

■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때 ‘질병의 세계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정확한 사망자 수가 적혀 있지 않지만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당시 아테네 인구의 4분의 1 내지 3분의 1쯤 되는 10만명 내외가 이 역병으로 사망했다고 추산된다. 피해 규모도 엄청나지만 투키디데스의 묘사처럼 사회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역병은 사회생활 전반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무질서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예전에는 외진 곳에서만 하던 짓거리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담하게 행해졌다. 신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인간의 법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모두가 하나같이 죽어 넘어지는 것을 본 탓으로 신을 공경하거나 공경하지 않거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살아서 재판을 받으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아테네 역병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후기의 안토니우스 역병, 비잔티움 시대 초기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중세 말의 흑사병 등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아테네 역병에 대해 의사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여기에 대해서도 투키디데스는 명석한 기록을 남겼다. “의사들은 역병을 치료할 방법을 몰랐다. 그뿐만 아니라 환자들을 누구보다도 많이 대했던 탓에 의사들이 죽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기승을 부리던 역병이 마침내 제 풀에 꺾이기까지 백약이 무효였다.” 의학이 무력한 것은 그 뒤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과거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현대의학도 여태 효과적인 에볼라 치료법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의료인의 피해가 큰 것도 비슷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482~565년, 재위 527~565년)가 비잔티움 제국을 통치하던 시절 대규모 역병이 세상을 휩쓸었다. 이보다 900여년 전의 아테네 역병은 한 도시에 국한되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팬데믹(pan-demic), 즉 범세계적 유행이라 할 만큼 규모와 피해가 엄청났다. ‘질병의 세계화’가 시작된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의 정체에 대해서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지만 최근 유력한 증거가 나타났다. 올해 초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을 비롯한 국제공동연구팀이 그 역병으로 사망했다고 여겨지는 당시 사람 2명의 치아에서 유전자재조합 방법으로 흑사병 시대(1348~1352년)의 것과 똑같은 종류의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을 찾아낸 것이다. 이로써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사상 최초의 페스트 유행임이 거의 확실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에 관한 대표적인 기록은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500~565년경)의 <전쟁사>이다.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역병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종족과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수많은 사람이 쓰러져 갔다. … 어떤 경우는 첫날, 아니면 다음날이나 며칠 안에 종기가 나타난다. 종기는 사타구니뿐만 아니라 겨드랑이나 귀밑 등 여러 부위에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묘사 등으로 오래전부터 이 역병이 페스트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져왔다.

프로코피우스는 “비잔티움에서 역병이 가장 격심했던 기간은 석 달 정도로, 사망자는 하루에 5000명, 심하면 1만명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었다”고 인명 피해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사회규범이 붕괴되어 가는 모습도 빠뜨리지 않았다. “묘지가 온통 시체로 가득 찬 뒤에는 아무데나 묻거나 성벽에 있는 탑들의 지붕을 열고는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시체들에서 풍겨오는 지독한 악취가 온종일 하늘을 뒤덮었다. 장례에 관한 모든 의식은 스르르 사라졌다. 사체를 해안으로 질질 끌고 가 바닷속에 던져버리면 그만이라고들 여기게 되었다.”

비잔티움을 비롯해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의 침입을 받은 지역의 사망자는 40% 내외였고, 제국 전체의 사망자는 2500만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한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역시 역병에 걸렸지만 용케 살아남았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제국이 역병으로 피폐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어서 비잔티움 제국은 300년이 넘도록 역병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지 못했다. 반면에 이 동안 신흥 이슬람 제국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과 팽창을 거듭했다. 이렇게 역병은 인간의 의지를 넘어 역사의 향방을 좌지우지해왔다. 아테네 역병과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수많은 사례 중의 하나일 뿐이다.

■ 에볼라·에이즈는 아프리카 난개발의 역습

에볼라 출혈열은 피해 규모가 과거의 역병들과 비할 바는 아니다. 이제 100년이 되어가는 1918~1919년의 인플루엔자 팬데믹(사망자 2000만~5000만명)에도 크게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아서 될 문제는 아니다.

에볼라와 에이즈 등 지난 40여년 동안 새로 생기거나 발견된 감염병(전염병)은 주로 아프리카 난개발 등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발병의 원천적인 주역은 강대국 거대자본들인데 피해는 고스란히 약소국의 취약계층에 집중되고 있다. 요컨대 현대사회의 모순이 중첩되어 생기는 현상이다. 에볼라는 그런 모순에 대한 문명사적 경종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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