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인체해부학의 탄생

2014.10.24 21:10 입력 2014.10.24 21:41 수정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인체해부학 시조 베살리우스, 의학의 황제 갈레노스 오류 잡으려다 된서리

지금부터 꼭 500년 전인 1514년, 벨기에 브뤼셀(당시는 네덜란드령)의 유명한 의사·약사 가문에서 한 아기가 탄생했다. 아기는 자라서 가족들의 염원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실 주치의가 되어 집안의 전통을 이었다. 이것뿐이라면 이 소중한 지면에서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그가 만 스물아홉 살이 되기 직전에 이룬 업적이 이번 이야기의 주제이다. 의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 가운데 하나인 이 위업을 흔히 ‘현대의학(modern medicine)의 기원’이라고 일컫는다. 영어 ‘modern’은 근대로도, 현대로도 번역된다. 역사학 용어로는 근대라고 옮겨야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근대는 현대 이전이라는 어감을 주는 까닭에 여기서는 부득이 ‘현대의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일곱권으로 이루어진 베살리우스의 명저 <인체 구조에 관하여>(1555년 판) 제1권 중의 골격 해부도. 베살리우스의 정확한 관찰력과 화가 반 칼카르의 뛰어난 묘사력, 그리고 당시 빠르게 발전하던 목판인쇄술이 결합된 성과이다.

일곱권으로 이루어진 베살리우스의 명저 <인체 구조에 관하여>(1555년 판) 제1권 중의 골격 해부도. 베살리우스의 정확한 관찰력과 화가 반 칼카르의 뛰어난 묘사력, 그리고 당시 빠르게 발전하던 목판인쇄술이 결합된 성과이다.

■ 해부학은 생리학·병리학의 ‘기초’

40여년 전 대학 재학 시절,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통하지 않는 의과대학에서 해부학은 1학년 1학기 내내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무소불위의 과목이었다. 학점은 조직학(미세해부학)을 포함해서 11학점, 수업시간은 전체의 절반을 조금 넘었다. 토요일까지 포함해 오후 내내 배정된 실습시간 가운데 해부학 실습은 엿새 중에 나흘이나 되었다. 수업 주간도 20주나 되어서, 3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자나 깨나 해부학의 눈초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우리는 기억력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어마어마한 분량의 해부학 용어들을 뒤죽박죽 머릿속에 쑤셔넣었다. 시험 날이면 머릿속의 기억이 와르르 쏟아질까 염려되어 발걸음도 조심스레 시험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험지에 답을 적을 때마다 기억은 손가락 끝을 통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해부학 공부를 왜 시키는지, 우리들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인체해부학이 탄생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의학은 틀림없이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또 현대의학은 고대 그리스 의학이나 한의학 등 다른 의학 체계들과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인체해부학의 유무가 핵심적이다. 오늘날 한의과대학에서 해부학을 가르치지만 한의학 자체의 발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현대의학의 교육내용을 차용한 것이다.

의과대학의 교과과정은 대체로 현대의학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반복한다. 학생들은 맨 처음에 해부학, 그 다음에 생리학, 이어서 병리학을 공부한 뒤 내과와 외과 등 실제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 과목을 접하게 된다. 현대의학은 서양에서 16세기부터 이런 순서로 발전해 왔으며 발전의 밑바탕에는 해부학이 있다.

현대의학에서 사용하는 질병 명칭을 살펴보자. 대체로 폐-결핵, 유방-암, 위-궤양, 신장-결석과 같이 폐, 유방, 위, 신장 등 질병 발생 부위의 해부학 명칭이 나오고 이어서 병의 특성이 언급된다. 서양에서도 18세기경까지는 주로 열병, 기침병, 설사병 등으로 불리다가 해부학의 영향을 받아 그런 식으로 변화했다. 사람 이름이나 마찬가지로 병 이름에도 철학과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19세기 중엽 이래 외과의 비약적인 발전도 해부학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어렵다. 요컨대 현대의학은 인체해부학이라는 자궁에서 잉태되었다.

■ 동물 해부 통해 인체의 구조 유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은 사람의 몸을 해부하는 것은 절대적인 금기였다.

서양도 마찬가지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에서 기원전 280년 무렵부터 20여년간 주로 사형수들에 대한 해부가 허용된 것을 제외하고 언제 어디서나 인체해부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고대 이집트 등에서 행해진 미라 만들기는 해부학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시신에 칼을 대는 목적은 오직 부패하기 쉬운 내장 장기들을 끄집어내어 따로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욱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행해졌던 인체해부의 내용은 몇 차례 큰 화재로 말끔히 사라져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 의학의 황제 갈레노스도 동물 해부를 토대로 인체 구조를 유추했을 뿐이다.

그러던 차에 놀랍게도 12세기 들어 이탈리아에서 오랜 금기가 풀려 인체해부가 행해졌고 13세기부터 사례가 증가했다. 아마도 법의학적 이유에서 볼로냐와 피렌체에서 해부가 시작되었으며, 이어서 프랑스의 몽펠리에 그리고 14세기 중엽 흑사병이 창궐하는 동안 아비뇽에서도 교황의 후원 아래 해부가 실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로냐 대학의 문디누스(Mundinus·1270~1326년)의 저서 <해부학 강의>에서 보듯이 인체 구조에 관한 지식에는 발전이 없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해부도. 레오나르도가 탁월한 해부학자였다는 사실은 이 해부도 한 장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해부도. 레오나르도가 탁월한 해부학자였다는 사실은 이 해부도 한 장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 갈레노스 추종자들 비난에 해부학 단념

이런 상황에서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1514~1564년)가 등장했다. 그의 명저 <인체 구조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는 저자 스스로 직접 행한 인체해부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최초의 현대적인 해부학 책이다. 어려서부터 곤충과 작은 동물 해부를 즐겨했던 베살리우스는 벨기에의 루뱅 대학과 프랑스 파리 대학 의학부에서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여러 가지 동물과 인체를 해부했다.

파리 대학을 졸업한 베살리우스는 당시 의학 분야에서 볼로냐 대학과 함께 서양 최고를 다투던 파도바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곧 외과 및 해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537년의 일이다. 그리고 화가 반 칼카르(Jan Stephan van Calcar)의 도움을 받아 1543년 일곱 권으로 된 <인체 구조에 관하여>를 출간했다. 1543년은 현대적인 우주관을 세우는 데 밑받침이 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년)의 저작 <천구들의 회전 운동에 관하여>가 출간된 해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천문학과 인간학에 대한 혁명은 같은 해에 시작되었다. (코페르니쿠스도 1501년부터 3년간 파도바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베살리우스와 면식은 없었다.)

베살리우스는 자신의 책에서 인체해부 등 손으로 하는 행위를 경멸하는 의사들의 구태의연한 자세를 과감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원숭이, 돼지, 개 등을 해부하고는 그 결과를 인체에 적용했기 때문에 생긴 갈레노스의 오류들, 예컨대 다섯 엽의 간, 일곱 조각의 흉골, 두 부분으로 나뉜 하악골, 뿔 모양의 자궁 등을 스스로의 관찰을 바탕으로 거침없이 지적하고 바로잡았다.

자신의 연구에 대한 기성 의학자들의 부당한 비난과 질시에 지친 베살리우스는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해부학도 단념했다. 대신 황실 주치의라는 선망의 자리를 얻어 가문의 영광을 이어갔다. 파리 대학 시절 스승인 실비우스(Sylvius·1478~1555년)를 필두로 많은 의학 교수들이 베살리우스를 맹렬히 공격했던 것은 1000년이 넘도록 도전받지 않았으며 그들이 신봉해 마지 않은 갈레노스의 오류를 지적한 베살리우스의 태도와 성과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비우스도 불경스러운 제자를 공격하기 위한 자료를 얻고자 제자의 방법대로 직접 해부하고 관찰한 결과 갈레노스의 여러 잘못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잘못들은 물론 인체해부를 할 수 없었던 갈레노스가 원숭이와 돼지 등 동물 해부에서 관찰한 사실들을 인체에 무리하게 적용함으로써 생긴 것들이었다. 갈레노스의 절대적 추종자였던 실비우스는 차마 갈레노스의 오류를 인정할 수 없어서 갈레노스 이후 천몇백년 사이에 사람의 해부학적 구조가 변화했다는 천재적인 변명을 늘어놓았다.

의사인 해부학 교수가 자기 손으로 직접 해부하고, 눈으로 관찰한 결과를 기록한다는 것은 그 무렵까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인체를 해부하는 것은 당시 비천한 신분인 이발사-외과의사의 몫이었고 해부학 교수는 갈레노스의 해부학 책이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들을 강독할 뿐이었다. 결국 베살리우스는 당시의 규범에서 벗어난 행동을 통해, 곧 고등교육을 받은 의사의 신분으로 손수 해부하고 관찰함으로써 새로운 의학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장인적 전통과 (철)학자적 전통이 만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학문이 열리는 과학혁명기의 특징이 의학 분야에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 다 빈치가 인체해부학 창시자?

이러한 베살리우스의 업적을 통해 해부학 발전의 길이 열린 것은 물론이고, 해부학을 바탕으로 하는 현대적인 생리학과 병리학이 탄생했다. 따라서 베살리우스를 인체해부학의 시조뿐만 아니라 현대의학의 기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일이 아니다.

베살리우스가 해부학을 하루아침에 혼자 힘으로 창조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학문적 성취는 크지 않았지만 그에 앞서 몇백년 동안 많은 인체해부 행위가 있었다. 그 가운데는 르네상스 예술 사조의 영향으로 화가와 조각가들이 인체의 정확한 묘사를 위해 인체해부를 행한 것도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년)가 수많은 인체해부를 통해 뛰어난 해부도들을 남긴 것이 좋은 보기이다. 죽은 지 200년이 넘어서야 공개된 레오나르도의 해부도가 생전이나 사망 직후에 알려졌다면 우리는 베살리우스가 아니라 레오나르도를 인체해부학의 창시자로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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